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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령사 석굴 계곡.
병령사 석굴 계곡. ⓒ 오창학
십만 부처의 땅 병령사 석굴

병령사(빙링쓰) 입장료는 60위안. 169굴과 172굴을 보려면 따로 300위안을 더 내야한다. 그래 장사를 하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

배 타고 예까지 왔는데 보기 싫으면 그냥 가라는 똥배짱. 수백 위안을 들여 50분 가까이 쾌속정으로 날아왔는데 입장료가 비싸다고 발길 돌리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참 멋있는 놈들이다.

@BRI@옛 실크로드는 지금의 물 아래 잠겨있다. 4∼5세기 북위 시대에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향후 1000여 년 넘게 황하유역에서 전성기를 누리던 곳이다.

지금의 '병령(炳靈; 빙링)'은 송대에 붙여진 명칭으로 '선파병령(仙巴炳靈)', 즉 '십만 미륵부처님의 땅'이란 티벳어를 음역한 것이다. 중국식으로 표현하면 일종의 '천불동(千佛洞)'인 셈인데 현재는 183개의 석굴이 황하기슭을 따라 약 2Km가량 펼쳐져 있다.

송(宋)대에는 토번(吐蕃; 티벳)이나 서하(西夏)의 침입에 대처하는 요충지였던 까닭에 공양객이 줄을 이었고, 석굴의 개보수 또한 활발했다.

황하의 물줄기가 얕았던 까닭에 이곳을 통해 황하를 건넜던 실크로드의 상인들도 여기에서 무사안녕을 빌었을 것이다.

아내는 참 절을 잘 한다. 작은 나무에도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심성, 그것이 신앙일 게다
아내는 참 절을 잘 한다. 작은 나무에도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심성, 그것이 신앙일 게다 ⓒ 오창학
아내는 참 절을 잘한다. 딱히 '신도'의 허울을 쓰고 있지 않으면서도 서낭당이든 절집이든 기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면 손 모으길 주저치 않는다.

무언가에, 누군가에 고개를 숙이는 일이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닐진 데, 내겐 왜 그토록 어렵기만 한 걸까. 유홍준 교수의 글이던가? 하찮은 나무에도 머리를 조아릴 수 있는 것, 그것이 신앙이라고.

아내에게 무엇을 빌었느냐 물었다.

"비밀."

무엇이면 어떤가, 설마하니 자기 혼자 잘 되게 해달라고 빌었을까.

병령사 석굴의 소불상들
병령사 석굴의 소불상들 ⓒ 오창학
사암재질의 석벽을 따라 잘 만들어진 순회로를 따라 걷다 보면 석굴과 불상들을 손에 닿을 거리에서 만날 수 있다. 철창과 테두리 속에 갇혀 있지 않아 보기 좋다. 덕분에 훼손의 시일이 앞당겨질지는 모르지만.

몇 걸음 걸었나 싶을 때 171굴의 당(唐)대 석조대불과 만나게 된다. 병령사 석굴의 상징인 27m의 떡대가 시선을 압도한다. 몸통 위쪽은 석벽을 쪼아 만든 것이고 하체는 진흙으로 만든 조소이다.

171굴의 대불. 병령사의 마스코트다
171굴의 대불. 병령사의 마스코트다 ⓒ 오창학
그 옆으로 굽이굽이 난 계단은 169굴에 오르는 길. 물론 300위안을 바친 자에게만 허용되는 천국의 길이다.

저 굴에서 명문이 발견됨으로써 최소 420년경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곳 병령사 석굴 중 가장 큰 굴이고, 그만큼 가치 있는 다량의 벽화와 불상으로 채워져 있다. 그 북쪽의 172굴은 북주 이후 시대별로 중수되었고 내부에 목조 삼세불이 있다.

이 둘의 공통점. 300위안이 있어야 그 아름다움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것.

병령사 계곡에서 있었던 일. 사건 전개 순서는 좌에서 우로.
병령사 계곡에서 있었던 일. 사건 전개 순서는 좌에서 우로. ⓒ 오창학
뭐 눈엔 뭐만 보인다고 이 위대한 문화유산 앞에서도 내 눈은 계곡 속에 있는 사륜 구동에 고정된다. 참 낡은 차종이다 싶고, 이 협곡 사이로 관광객을 태우고 나돌아다니는 게 신기해서 한참을 보는데 차가 고장이 난 모양이다. 보아하니 러시아제 우아즈(UAZ)의 중국 카피판 같은데, 엔진부에 손잡이를 붙여 경운기 발동하듯 시동을 거니, 언제 적 유물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한 무리의 중국 관광객들이(운전자까지 무려 10명이다, 차 한 대에) 재잘거리며 다른 차의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 참 오랜 시간이 지났다 싶을 때 멀리는 구조차가 달려온다. 관광객들이 반갑게 올라탄다. 차는 유유히 온 길을 되짚어 질주한다… 싶었는데, '빵!'

협곡의 양 벽이 메아리쳐 울린다. 타이어 터지는 소리가 흡사 소총 발사음 같다. 출발한 지 겨우 200여m. 이제 그 관광객들의 운명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재잘거리며 협곡을 걸어 나온다. 계곡엔 주인 없는 차들만 덩그러니 남았다. 오늘 우아즈의 체면이 영 아니다. 덕분에 내 눈은 즐거웠지만.

척박한 알모래 위에서. 간쑤성에서 부턴 햇살과 친해질 각오가 있어야 한다.
척박한 알모래 위에서. 간쑤성에서 부턴 햇살과 친해질 각오가 있어야 한다. ⓒ 오창학
계곡으로 내려가서 병령사를 올려다본다. 위에서 보던 것과는 다른 느낌이다. 자동차 여행에서 느낀 점. 차 안에서 바라보는 바깥 풍경과 차문을 열고 내려 바라보는 바깥 풍경은 사뭇 다르다. 절충이 필요하다.

이왕 내려선 것, 출구까지 계곡을 따라 걷는다. 언뜻 보아선 계곡 위로 올라설 길이 보이지 않는데 어차피 이 끝은 출구와 만나겠지 하는 마음이다.

피부가 바삭바삭하고 발등이 따끔거린다. 이곳 간쑤성에서부터는 햇살과 친해져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오늘 우웨이에 닿으면 내일은 네이멍구(내몽고) 고비 사막으로 들어갈 텐데 그 곳의 태양은 또 어떨까?

배변의 추억

문이 없는 중국식 화장실. 이럴 때 아는 사람이 들어선다면? 그래도 다행히 칸막이는 있다
문이 없는 중국식 화장실. 이럴 때 아는 사람이 들어선다면? 그래도 다행히 칸막이는 있다 ⓒ 오창학
병령사를 나서는데 속이 좋지 않다. 일찍이 자포님은 속병에 시달리며 고통스러워했는데, 내게도 신호가 오는가 보다. 요금을 내고 들어선 화장실이라 조금은 기대를 했는데 역시나 재래식에 문 없는 화장실이다.

올림픽을 앞둔 중국의 열성으로 대도시는 수세식에 문 달린 화장실이 대세인데, 이런 유명 관광지의 화장실치고는 의외라는 생각을 했다. 굳이 이런 유형의 화장실이 거북스러워하는 성격은 아닌데, 다만 여기서 일행과 마주칠까 하는 염려가 쾌적한 배변을 방해한다.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철봉씨, 에릭님, 자포님, 나리님이야 그렇다고 치자. 그래도 교수님은 내 은사님이고 우리 부부의 주례선생님이신데, 굳이 이렇게 원초적인 모습까지 공유하고 싶진 않다.

아니 천 번을 양보해서 내가 이럴 때 교수님이 들어오시는 것까지는 감내할 수 있다고 치자. 혹여 교수님 일 보시는데 제자인 내가 들어선다면? 거참…, 난감한 상황이다. 그래도 이 화장실은(사실은 '변소'라는 이름을 써야 정확한 어감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다) 옆 칸막이가 있다.

최악의 상황이 닥쳐도 아는 사람과 서로 엉덩이 사이로 떨어지는 배설물을 확인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여행은 참으로 작은 부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르친다. 퍽도.

'무사귀환'이 여행의 목적이라니...

병령사를 나와 왔던 길을 되짚어 류자샤 선착장으로 왔다. 주차해 둔 백구에 다시 오른 시간이 오후 5시 20분. 다소 늦은 시간이지만 우웨이(武威)까지는 달랑 277Km니 해 있을 때 안 들어가겠나 생각하며 시동을 켜려는데…, 어라? 차량의 시계가 이상하다.

대시보드의 전자시계가 한 시간 빠르게 돌고 있다. 길 떠난 지 13일. 중국 땅을 밟은 지 11일. 그간 차 안에서는 시차를 적용하지 않은 채 지낸 것이다. 손목시계는 이 땅의 경계에 들어서며 현지 시각으로 맞추었건만 차 내 시계는 여태 한국 시각이었다니.

백구 안의 공간은 여전히 익숙한 고국의 영역이었던 탓이다. 손에 익은 계기판과 항상 모국어가 통하는 공간. 차창 한 겹을 사이에 두고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계다.

떠나왔으면서도 여전히 부여 쥐고 있는 자기 공간. 버리지 못하는 아집. 서둘러 시간을 돌렸다.

우웨이 가는 312 도로 상의 백구. 이 모든 길이 지도상엔 고속도로로 표시되어 있다.
우웨이 가는 312 도로 상의 백구. 이 모든 길이 지도상엔 고속도로로 표시되어 있다. ⓒ 오창학
지도상엔 란저우에서 우웨이까지의 312도로는 곧게 뻗은 길이었고 전 구간 고속도로로 표시되어 있어 마음을 놓았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이 이렇다.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지도의 내용을 쉽게 믿는다.

해발 1900~2500m 사이 도로 위에서 맞는 저녁 햇살
해발 1900~2500m 사이 도로 위에서 맞는 저녁 햇살 ⓒ 오창학
19시 25분. 용천사 요금소를 지나 달리는데 현재 고도 해발 1915m. 공교롭게도 꼭 지리산 천황봉 높이에 도로가 걸려 있다. 서서히 해가 기운다.

그토록 피하려 한 야간운전이지만 결국은 또 하고 있다. 대체로 고원을 여러 개 넘어 잘 뚫린 길인데 구간, 구간 누더기 길이 많아 가로등이 없는 곳에서 전조등만으로 이걸 파악하지 못해 처박히듯 덜컹거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고속도로도 예외는 아니어서 시속 90∼100Km로 달리던 중에 아무 경고 없이 20여m짜리 비포장 구간이 나타난다. 고속도로 한 차선을 달랑 간이 공사표지판 표지로 막아 놓은 경우도 흔하다. 제때 발견하지 못하면 전복의 우려가 있다.

차 안이 고요에 싸였을 때 뒷열 왼쪽에 앉은 아내가 말한다.

"안전. 무사히 이 일정을 마치게 해 달라고."
"응?"

운전석의 내가 되묻는다.

"아까 병령사에서의 기원?"

그렇구나. 결국 그렇게 됐다. 애초 예상한 대로, 이번 여행을 통해 한민족의 발자취를 더듬고 대자연의 장엄함을 한껏 느껴보겠다는 따위의 포부보다 탈 없이 돌아갔으면 하는 소망이 더 크다. 이제 진정한 목표는 '무사귀환'이 된 것이다.

우웨이 도착이 가까워지자 모래 바람이 거세게 차를 밀어내고 있다. 도로 위를 스멀스멀 넘어가는 모래들이 느리게 이쪽을 흘끗거린다. 검은 밤하늘을 배경으로 쭉 뻗은 방풍림들이 바람에 사정없이 머리채를 휘둘리고 있다. 한밤중에 도착한 우웨이의 느낌은 더없이 스산하다.

숙소를 찾아 헤맬 때 껄렁해 보이는 젊은이들, 그리고 무력과 음산에 절은 눈빛의 사내들. 아, 이 우울의 근원은 무엇일까?

사막의 모래에서 빠져나오는 방법

밤 10시 50분. 숙소에 닿았다. 오늘 총 주행거리 372Km. 그 중 류자샤에서 이곳 숙소까지의 280여 Km를 주행하는 데만 5시간이 소요되었다. 방에 짐을 던져 넣자마자 식당을 찾아 우웨이 골목을 누빈다. 허름한 선술집에서 만난 중국식 뚝배기 돼지 사골. 맛은 기가 막혔지만 며칠째 좋지 않은 신호를 보내고 있는 장 때문에 몇 술을 뜨고는 수저를 내렸다.

맛이 일품인 우웨이의 뼈다귀탕 뚝배기. 그러나... 이 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맛이 일품인 우웨이의 뼈다귀탕 뚝배기. 그러나... 이 때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 오창학
"오늘 늦게 닿았고 내일은 시간적 여유가 있으니 오전 11시까지 자유시간을 갖고 출발하겠습니다."

아직 식사 중인 일행에게 일정을 말했다.

"대장님이 아프니 그제야 휴식 시간이 생기는군요."

자포님의 반응이다. 이어지는 에릭님의 한 마디.

"꼭 그렇게 시간을 정해 '몇 시까지 모여라' 할 필요 있나요? 무슨 패키지여행도 아니고."

그만 서운한 마음이 일어 발끈하고 말았다. 패키지든 아니든 하나의 조직체로 모인 단체는 조율이 필요한 것이고 명목이나마 내가 '대장'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다면 그 역할을 해야 할 이는 나 아니냐. 그러니 일정에 맞게 여러 사람의 의견을 종합해 졸가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래서 어떻고, 저래서 어떻고 하면 난 어쩌란 말이냐. 뭐 대충 그런 요지의 감정 표출이었다.

명치끝이 싸하다. 내가 내게 지고 말았다는 생각. 기어이 속 좁은 티를 내고 말았다는 자괴. 그간의 서운함이 기어이 터진 게다.

탐험대장은 35세의 내세울 것 없는 젊은이. 대원은 52세의 교수님, 46세의 중국 전문가, 46세의 전직 사업가, 45세의 현직 사업가. 남들에게 지시하고 모든 일을 스스로 결정하는 처지에만 있었던 분들이다.

그나마도 나와는 10년 이상의 터울. 더구나 나 또한 이 길이 초행길이니 지도력이란 게 발휘될 리 만무했다. 일정의 1/3을 지나는 동안 내내 꽁 해왔던 부분이 터진 것이다. 식당 안에 찬 기운이 내려앉는다.

어디선가 읽은 글에 이런 내용이 있다.

"사막의 모래에서 차가 빠져나오는 방법은 타이어의 바람을 빼는 일이다. 공기를 빼면 타이어가 평평해져서 바퀴 표면이 넓어지기 때문에 모래 구덩이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사람이 갈등의 모래사막에 빠져 헤맬 때 즉시 자존심과 고집이라는 바람을 빼야 한다. 그래야 둘 다 살 수 있다."

그런데 나는 바보처럼 잔뜩 팽팽해져 있다. 다행히 에릭님과 자포님이 물러나 주신다. 꼭 그런 뜻은 아니었다고, 그런 의미로 들렸다면 미안하다고. 바보. 이 밴댕이 소갈딱지야. 아…, 나는 왜 이토록 범상한 것이냐.

덧붙이는 글 | 2006년 7.14~8.21까지 중국 내 실크로드 구간 1만4000Km를 국산 사륜구동 2대로 여행하고 돌아왔습니다.

중국 내에서 외국차가 운행하기까지 공안국이나 국가여유국, 인민해방군 작전부 등 여러 부처의 승인을 얻고 복잡한 통관절차를 거쳐야 하기 때문에 많은 경비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작년에 한중 간 자동차 여행 자유화를 위해 산동성 일부구간 시범 운행이 있었고, 향후 적용 지역을 전국 단위로 확대할 방침이라 하니 이 연재가 끝날 때쯤이면 자동차 여행이 훨씬 수월해져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쪼록 모험과 역사, 그리고 대자연을 동경하여 자동차 여행을 꿈꾸는 분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이 글은 자동차여행 포털사이트 ‘알브이라이프(http://www.rvlife.co.kr)’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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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이 기자의 최신기사그레이트빅토리아 사막 횡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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