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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탈이의 세계여행'을 연재하고 있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김남희와 상근기자 박상규가 7박 8일 제주도 자전거여행을 떠났습니다. 두 기자는 '어색한 남녀의 제주도 자전거 여행'이라는 주제로 매일 옴니버스 형식의 여행기를 올릴 예정입니다. <편집자주>
[그 여자 김남희] "점점 자전거에서 내려오기 싫은데…. 어쩌지?"

비자나무 숲으로 가는 길.
비자나무 숲으로 가는 길. ⓒ 김남희
"북제주군 조천의 비자숲은, 배배 꼬인 분재 같은 나, 끄덕하면 세상의 상처를 운운하는 나를, 그렇게 우람하고, 그렇게 팽팽하게 세워서는, 같이 간 너의 외로움마저도 푹 젖게 하고, 벌쭉 열리게 해서는, 온 숲이 한바탕 처녀매미로 찢어지게 하고는, 솨솨솨 그 숲바람 소리에 아득아득 자물 쓰게 할 숲이었지." - 고재종의 <비자 숲 바람소리> 중

'숲'을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이렇게 말한 이 땅의 소설가가 있었다. 나는 지금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이는 그 숲에 서 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에게 위로받지 못할 때면 숲으로 갔었다. 말이 없이도 숲의 나무들은 벗이 되어주었고, 손이 없이도 나무들은 상처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오래된 나무의 등에 기대어 잠시 흐느끼다 돌아섰었다. 그렇게 숲은 내 마음의 산소호흡기가 되었다.

한 편의 시 때문에 오래 품어온 제주의 숲이 있었다. '비자림'. 제주를 떠올릴 때면 나는 북제주군 조천에 있다는 비자림이 떠올랐고, 비자림을 기억할 때면 늙은 나무들이 따로 또 같이 서 있다는 그 숲에 일렁이는 바람을 생각하곤 했다.

가는 비가 흩뿌리는 아침, 비자나무들이 숲을 이루며 서 있는 곳으로 향했다. 숲은 두렵지 않을 만큼 어두웠고, 부시지 않을 만큼 밝았다. 그 숲에 늙은 나무들이 있었다. 300년에서 800년을 산 비자나무 2800그루. 나무와 나무들은 서럽지 않을 만큼 떨어져 있었다.

숲에는 우리뿐이었다. 몇 발자국 앞서 걷는 내 뒤로 이 남자는 우산을 들고 따라왔다. 나무와 나무 사이의 거리만큼이나 우리 둘 사이의 거리도 좋았다. 평소 나를 웃게 하던 그의 장난기가 잠든 숲의 고요를 깨면 어쩌나 했던 건 내 기우였다. 나만큼이나 이 남자도 숲에서 말이 없었다.

우리는 별말도 없이 그저 느리고 느린 발걸음으로 나무 사이를 걸었다. 그 사이 세 마리의 노루를 만나고, 길을 건너던 어린 족제비 한 마리와 오래도록 눈을 맞추기도 했다.

육지에서 끝난 가을이 제주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육지에서 끝난 가을이 제주에는 여전히 남아 있다. ⓒ 김남희
늙어도 늙지 않는 나무들을 끌어안고 잠시 서 있을 때, 내가 아는 육지의 모든 숲이 떠올랐다. 울진의 소나무숲과 오대산의 전나무숲, 점봉산의 자작나무숲과 보길도의 동백나무숲, 그리고 안면도의 모감주나무숲까지. 숲의 성성한 기운으로 촉촉하게 젖은 내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상규야…."
"네, 선배?"
"더 이상 부족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단 하나가 아쉽다."
"씨, 그게 나라는 거야?"


눈치 빠른 이 남자, 말 안 해도 알 건 다 안다.

"나는 뭐 좋기만 한 줄 알아?"

항변하는 이 남자, 좀 더 놀리고 싶어진다.

"넌 지금 인생의 절정기 아니야? 그토록 흠모하던 나랑 같은 방을 쓰면서 다니고 있으니."
"선배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 더 이상 김빠 아니거든. 선배랑 다니면서 환상 다 깨졌어."


나는 목소리에 쓸쓸한 기운을 듬뿍 담아 대답했다.

"그래, 다들 그랬어. 내 실체를 알고 나면 다 떠나더라고."

마음 약한 이 남자, 벌써 수습 분위기에 들어가고 있다.

"선배, 농담이야, 농담. 사람이 뭐 농담 한 마디에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하고 그래?"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을이 바스락거린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가을이 바스락거린다. ⓒ 김남희
비자림에서 나와 다시 해안도로를 달렸다. 바다에서 돌아오는 고기잡이배들이 보였고, 바다는 자꾸 내 곁으로 밀려와 안겼다. 갈매기 몇 마리가 끼룩거리며 날아갔다.

월정 해수욕장을 지나고, 김녕 해수욕장과 함덕 해수욕장을 지나 자전거는 쭉쭉 나아갔다. 물빛이 고와서 가끔 자전거를 멈추기도 했다. 그 사이 하늘이 흐려지더니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거세졌다.

신기하다. 자전거를 타고 있을 때 바람은 늘 맞바람이다. 앞으로 나가려는 나를 뒤로 밀어내는 바람이다. 내 얼굴을 더듬고, 내 몸을 밀어대는 바람의 거친 손길이 나쁘지 않다. 거리의 불빛과 바다에서 밀려오는 비릿한 내음에 내 몸이 생생하게 깨어나고 있었다. 여전히 내 뒤에서 교통상황을 통제(?)하며 달려오는 이 남자에게 말했다.

"상규야, 너와 같이 올 수 있어서 참 좋아."
"선배, 갑자기 왜 그래?"


불빛 탓이었을까. 이 남자의 얼굴이 살짝 붉어진 듯 보였다.

나는 조금씩 자전거 위에 앉아 있는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다. 몸과 땅, 몸과 자전거 사이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접속이 좋아졌다. 자전거 위에서 내 몸은 예민했다. 눈으로 구별되지 않는 미세한 오르막과 내리막에도 몸은 깨어나며 반응했다. 나는 자전거가, 혹은 내 몸이 읽어내는 땅에 대한 그 생생한 구별이 경이로웠다. 자전거 위에서 나는 익숙한 것들을 새롭게 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모슬포에 도착할 무렵, 어쩌면 나는 자전거 위에서 내려오기 싫을지도 모르겠다.

늙은 비자나무 몸에 손을 얹고 나무의 푸른 기운을 느껴본다.
늙은 비자나무 몸에 손을 얹고 나무의 푸른 기운을 느껴본다. ⓒ 김남희
"푸른 바다 저 멀리 김남희도 넘실 거린다"
"푸른 바다 저 멀리 김남희도 넘실 거린다" ⓒ 박상규
[그 남자 박상규] "12월의 첫날, 그녀가 나를 안았다"

피톤치드 향 가득한 산림욕을 즐기는 박상규.
피톤치드 향 가득한 산림욕을 즐기는 박상규. ⓒ 김남희
빨래는 아침이 될 때까지 마르지 않았다. 나는 민박집 전기 난로를 이용해 내 속옷과 김남희의 양말을 말렸다. 김남희는 뒤돌아 앉아 송고할 기사를 최종 검토하고 있었다. 우리가 하룻밤을 보낸 방에 노트북 자판 소리가 작게 울렸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김남희는 갑자기 몸을 휙 돌렸다.

"오해하지 말고 들어. 넌 지금까지 무슨 힘으로 삶을 견뎌 왔냐? 별것도 없으면서, 그리고 기댈 곳도 없으면서 넌 참 긍정적으로 사는 놈 같아. 예쁘게 커서 참 다행이고…. 갑자기 널 한 번 안아주고 싶은데, 그래도 되지?"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김남희는 나를 안았다. 그녀는 내 등을 작게 토닥였다. 나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잠시 후 그녀는 다시 원고 검토에 집중했다. 그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뜨거운 난로 앞에 앉아 김남희의 양말을 말리는 것뿐이었다. 그녀의 양말에서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12월 첫날, 낯선 여자의 품에 안기며 하루를 여는 게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비자림으로 달리고 있다. 중산간 도로에는 차가 없고 공기를 가르는 건 우리의 자전거뿐이다. 숲으로 향하니 가슴이 떨린다. 내 자전거 청구도 그 떨림을 느꼈는지 바퀴 회전이 이전과 다르다.

비자림은 그 이름이 풍기는 느낌대로 신비롭다. 수많은 비자나무는 마치 서로 합의라도 한 듯 바람이 자유롭게 드나들 만큼의 공간을 두고 땅에 뿌리를 내렸다. 비자나무 사이에는 아직 다 낙엽을 떨어뜨리지 못한 나무들이 잎을 붉게 물들이고 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난 작은 길에는 낙엽이 가득하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발밑에서는 이미 육지에서 끝나버린 가을이 바스락거린다.

족히 500년은 살았을 법한 비자나무 하나를 안았다. 나무를 안은 건 나인데, 나를 위로하는 건 숲이다. 나는 왜 사람 사는 세상에서 쌓인 응어리를 나무들이 사는 숲에서 풀고, 사람에게 받은 나의 상처는 왜 사람이 살지 않는 숲에서 아물고 새살이 돋는 것일까. 그런 나를 비자림의 족제비가 오래도록 쳐다보더니 다시 숲으로 사라진다.

"줄 맞춰서 앞으로!"
"줄 맞춰서 앞으로!" ⓒ 김남희
숲을 등지고 다시 바다로 가는 길. 김남희가 한층 '업' 됐다. 10월 하늘이 세수를 마친 물이라면 그건 분명 제주의 바다가 됐을 것이다. 제주의 바다는 연한 푸른빛이다. 그 바다를 오른쪽으로 끼고 달리며 김남희가 소리치듯 말했다.

"상규야, 너랑 함께 여행 오길 참 잘한 것 같애."

분명 좋은 말이다. 난 농담은 잘 받아치지만 좋은 말 앞에서는 언제나 버벅거린다. 김남희는 내게 몇 가지 더 제안했다.

"상규야, 내년 여름엔 우리 '제주 숲 기행' 하자. 그땐 텐트를 들고 오는 거야. 어때?"
"자전거 타고, 텐트랑 침낭 들고 다니면 좀 무거울 텐데."
"뭐 어때, 어차피 상규 니가 들 거잖아. 김빠면 그 정도는 해야 하지 않겠어? 그때는 '어색남녀'가 아니라, '수상한 남녀 제주도 숲 기행'으로 하자."


우리의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야! 박상규, 나 내년 여행 마치고 올 때까지 휴가 쓰지 마라."
"나한테 선배가 그 정도로 비중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내가 내년까지 애인이 없을 것 같아?"
"응! 장담한다."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맞바람이 불어 우리의 전진은 더뎠지만, 늘어난 시간은 대화로 채워졌다. 오늘 하루는 제주에 내려온 후 가장 긴 거리를 달렸다. 제주시에 도착했을 땐 이미 캄캄한 저녁이었다.

오늘 우리가 머문 모텔방 풍경. 족구를 해도 될만큼 넓다.
오늘 우리가 머문 모텔방 풍경. 족구를 해도 될만큼 넓다. ⓒ 박상규
김남희와 나는 오늘 하루 모텔에서 밤을 보내기로 했다. 다른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인터넷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매일 여행기를 쓰면서도 인터넷을 이용할 수 없어 많이 힘들었다. PC방에 들릴 때마다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것도 아끼고 싶었다.

우리가 잡은 모텔 방은 10평이 넘는다. 이전에 잤던 민박집에 비하면 족구 정도는 능히 할 수 있는 크기다. 침대는 두 개 있는데, 재밌게도 하나는 더블이고 나머지 하나는 싱글이다. 더블 침대는 두 사람이 각종 여러 가지 일을 기획하고 실천할 수 있을 만큼 크다. 침대와 침대 사이에는 원앙 한 쌍도 있다. 휴지 한 통도 '완비' 돼 있다.

나는 오늘 낯선 여자의 포옹으로 아침을 맞이했고, 저녁에는 그 여자와 함께 모텔에 왔다. 길가는 사람들 잡고 물어봐도 모두 나쁜 하루는 아니라고 말할 것 같다. 오늘을 보내고 나면 우리의 여행은 하루만 남게 된다.

그나저나 모텔 안이라서 그런지 오늘 글이 정말 안 써진다. 앞에 앉은 김남희 자판 치는 속도가 장난 아니다.

침대와 침대 사이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 있는 원앙 한 쌍.
침대와 침대 사이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앉아 있는 원앙 한 쌍. ⓒ 김남희
모텔이라서 그런가? 오늘은 더욱 글이 안 써진다.
모텔이라서 그런가? 오늘은 더욱 글이 안 써진다. ⓒ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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