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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우도 해녀.
겨울바다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는 우도 해녀. ⓒ 김남희

[그 여자 김남희] 경외로운 해녀, 감동스런 오름

한 때 나에게는 은밀한 욕망이 있었다. 라이더의 꿈을 품기 전, 나는 다이버가 되고 싶었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나를 울린 첫 동화는 <인어공주>였다. 물거품이 된 인어공주는 7살 어린 나의 밤을 상상으로 채우던 최초의 친구였다.

그래서였을까. 자라면서 나는 점점 물이 무서워졌다. 증세는 해가 갈수록 심해져 바다나 강은 물론이고 사우나·찜질방·온천·목욕탕·스키장에 이르기까지 물과 연관된 모든 곳이 무섭고 싫었다.

변화는 영화 <니모를 찾아서>를 보고난 후 찾아왔다. 물 속 세상에 대한 동경이 시작됐다. 채식주의자를 열망하는 상어와 광대 물고기를 만나기 위해 나는 공포를 억제하며 두 달간 수영을 배웠다. 그리고 태국에서 2단계의 다이빙 과정을 마쳤다. 그 과정에서 놀라운 실력으로 강사를 경악시켰음은 물론이다. 인내력이 남달랐던 강사의 헌신적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새로운 일을 배우는 데 늦된 나는 강사에게 늘 잊지 못할 학생이 되곤 한다. 암벽을 배울 때도 그랬고, 다이빙을 배울 때는 물론이고, 마사지를 배울 때도 그랬다. "내가 김남희를 가르쳤는데 누구를 못 가르치겠어?"식의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마무리하는 강사가 있는가 하면 "당신은 내가 가르쳐본 최악의 학생이에요"라며 '학생운' 없는 자신의 신세를 노골적으로 한탄하는 강사까지 반응은 다양했다.

두려움 없이 삶의 바다에 뛰어든 제주도 할머니들

말이 샜는데, 어쨌든 나는 늘 물과 친한 사람들이 경이로웠다. 산소통도 없이 15m의 물 속에서 7분을 버틴다는 제주의 해녀들에 대한 경외감이야 말해야 무엇하리. 오늘, 경외하던 할머니 해녀들과 우도에서 마주쳤다. 자전거로 우도의 해변을 돌고 있던 아침이었다.

할머니들은 발랄했다. 물질에 대한 두려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랜 세월 물 속에서 삶과 죽음 사이를 넘나들며 살아온 해녀의 의연함이 엿보였다. 해녀복을 입은 한 무리의 할머니들은 새처럼 조잘거리고 있었다. 카메라를 들고선 우리를 향해 아이처럼 손을 흔들며 깔깔거리기도 했다.

멀리서 봐도 해녀들은 늙었고 무리 중에 젊은 여자는 없었다. 이 늙은 여자들이 가족을 먹여 살리고, 제주를 지켜온 해녀들이었다.

'물질'로 한 세상을 버텨온 제주 어머니들의 젖가슴을 닮은 용눈이오름.
'물질'로 한 세상을 버텨온 제주 어머니들의 젖가슴을 닮은 용눈이오름. ⓒ 김남희
여자는 어머니가 되면서 삶의 형질 전환이 일어난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 눈물 훔칠 틈도 없이 건너왔을 삶의 바다. 제주의 어머니들도 초겨울 시퍼런 바다 속으로 몸을 밀어넣는 고단한 삶을 견뎌왔다.

아직 어머니가 되지 못해 철없이 어리기만 한 나는 하얗게 부서지는 검은 파도 사이로 공처럼 떠올랐다가 다시 사라지는 할머니들을 무연히 응시했다. 할머니들의 뒷모습에는 신산한 삶에 대한 원망보다는 삶을 긍정해온 당신에 대한 자긍이 넘쳐났다.

단단해지는 내 몸, 장하다

물놀이라도 나온 듯 발랄하게 물 속으로 들어가는 할머니 해녀들의 뒷모습을 뒤로 하고 뭍으로 나왔다. 이제 12번 도로를 타고 가다가 1119번으로 갈아탄 후 수산리에서 16번 중산간 도로로 올라야 한다. 우리는 지금 제주에서 가장 어여쁜 오름 용눈이오름으로 향하고 있다.

뭍으로 올라오니 바람의 결이 달라졌다. 뺨을 때리는 듯 매서운 손길이다. 길은 계속되는 오르막. 다리에 온 힘을 다 싣고 전진해야 한다. 맞바람에 자전거가 밀린다. 바람이 거세지는 만큼, 길이 가팔라지는 만큼, 내 몸도 단단해진다. 어제부터 고갯길에서 단 한 번도 자전거를 끌지 않았다. 중간에 쉬기는 해도 자전거에서 내리지는 않는다. 그런 내 몸의 견뎌냄이 장하다.

제주 내륙 중산간을 잇는 16번 도로에는 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 저무는 겨울해를 받은 억새들이 바람에 몸을 맡긴 채 흔들린다. 거리의 고즈넉함이, 눈앞에 무덤처럼 솟은 오름들이 몸을 달아오르게 만든다. 자전거를 세우지 않을 수 없다.

용눈이오름은 '바람의 넉넉한 안깃'이다.
용눈이오름은 '바람의 넉넉한 안깃'이다. ⓒ 김남희
돌담을 두른 무덤 옆에 자전거를 눕혀 놓고 용눈이 오름을 올랐다. 오름 오르는 길에 바다가 보였고, 키를 낮춘 오름들이 따라왔다.

오름은 순하고 부드럽고 풍만했다. 물질로 한 세상을 버텨온 제주 어머니들의 젖가슴을 닮아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들어서는 우리에게 민박집 아주머니들이 담아준 고봉밥을 닮아 있었다. 세파에 지친 얼굴이 아니라 고통을 삶의 한 부분으로 긍정해버린 사람의 초연하고도 순한 얼굴을 닮았다. 그래서 오름은 같이 온 이 남자를 닮아 있었다.

"모든 여자 가슴은 짝짝이... 이 남자, 연애 안 해봤나"

우리는 오름의 정상에 드러누워 하늘을, 구름을, 바람을, 일찍 뜬 낮달을 보았다. 곁에서 이 남자가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를 불렀다. 지나가던 바람이 걸음을 멈추었다.

"꼭 어머니의 젖가슴 같다"는 내 중얼거림을 들은 이 남자.

"에이, 이건 크기가 다른 짝짝인데…."

나는 그를 돌아보며 말한다.

"모든 여자들의 가슴은 양쪽이 조금씩 크기가 달라. 네 몸의 모든 부분이 비대칭이듯이."

"너, 여자랑 제대로 연애나 해봤냐"고 묻고 싶은 걸 눌렀다.

김영갑이 말했다. 중산간 들녘의 아름다움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은 그 곳에 씨뿌리고 거두며 종국엔 뼈를 묻는 토박이들 뿐이라고.

지나가는 사람인 나는 자전거를 세우고 오름에 들어 잠시 잘 놀다 갈 뿐이다. '넉넉한 바람의 안깃'에 드러누워 잠시 품었던 하늘을 오래 기억하고 싶을 뿐이다. 내 곁에 누워 온 몸으로 바람을 맞고 있는 이 남자, 그의 미더움도.

"내 안에 개 있다"
어색남 박상규, 진짜 웃기다

이 남자 박상규, 진짜 웃긴다. 혼자 웃고 말기에는 어이없을 정도로 웃기는 순간이 가끔 있는데 오늘 그 대화의 몇 토막을 공개한다.

1. 이 남자, 자기 사진 한 장을 찍어주면 꼭 잘 찍었냐고 꼭 묻는다. 시큰둥한 태도로 나는 대답한다.

"생긴 대로 나왔어."
"왜 생긴 대로 밖에 못 찍어? 난 늘 생긴 거 이상으로 선배 찍어주잖아."

2. 오르막길에서 이 남자는 앞서가다가 다시 뒤를 돌아내려와 내 뒤로 온다. 그런 그의 젊음과 힘이 부러운 내가 한 마디 한다.

"힘이 남아도네."

이 남자, 어깨에 기운을 잔뜩 실은 채 대답한다.

"그럼! 내가 먹은 개가 몇 마린데! 내가 힘을 못 쓰면 그건 개에 대한 모욕이지."

어이가 없어 웃는 나를 보며 이 남자, 가슴에 손을 얹고 은근한 목소리로 말한다.

"내 안에 개 있다."

3. 오르막에서 헉헉대는 내게 이 남자가 외친다.

"자, 김남희 선수. 힘차게!"
"죽 먹고 힘이 나겠냐?"
"어머, 어머니. 아까 전복 다 골라 드시더니 왜 그러세요?"

4. 지나가던 개와 마주칠 때마다 이 남자 자전거를 세우고, 개들과 논다. 그리고 "야, 너 참 예쁘다"를 연발한다.

"그렇게 예쁜 개를 어떻게 먹냐?"
"닭 먹는 사람들도 병아리 예쁘다고 해요."
"닭하고 한 이불 덮으면서 한 방에서 뒹구냐?"
"그럼, 얘들이 나를 좋아하는 건, 내 몸 안의 개를 보고 그러는 건가?"

5. 이 남자, 노트북을 켜며 음악을 튼다. 김광석이다.

"상규야, 김광석 너무 우울해."
"선배, 선배 글도 우울하거든. 왜 다들 자기와 닮은 사람은 싫어하는 거지?" / 김남희

오름에 올라 누운채 바람을 즐기고 있는 박상규.
오름에 올라 누운채 바람을 즐기고 있는 박상규. ⓒ 김남희
[그 남자 박상규] '육지 것' 제주도에서 울다

"엄마는 아까 많이 먹었어. 그리고 엄마는 이런 거 별로 안 좋아해. 우리 상규 많이 먹어."

김남희는 자신의 전복죽을 내게 주며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내 것은 이미 바닥을 드러냈고, 빈 그릇엔 김남희의 죽이 채워졌다. 숟가락으로 다시 채워진 전복죽을 휘휘 저어봤다. 그 많던 전복은 없었다. 김남희가 다 먹은 것이다. 감사하는 마음도 잠시 내가 한 마디 했다.

"무슨 엄마가 전복은 다 골라먹고 나머지 것만 주냐!"

30일 성산포에서 점심으로 먹은 전복죽은 우리가 제주도에 내려온 지 5일만에 돈 내고 사먹은 최초의 음식이다. 자전거를 타는 우리에게 제주도 사람들은 따뜻한 밥 한 끼를 기꺼이 내주곤 했다.

처음 제주도에 내려온 26일에는 모슬포의 한 청년이 방을 내어주고 두 끼의 식사를 직접 해줬다. 자전거 여행을 시작한 첫날에 들린 민박집 아주머니도 마찬가지. 아주머니는 캄캄한 밤에 도착한 우리에게 생태찌개와 고봉밥을 줬고, 당신이 보기엔 그것도 부족해 보였는지 라면도 하나 덤으로 얹어주었다.

우리는 매일 이런 사람들을 만났고, 하루 한 끼는 꼭 이들 제주도 사람들이 우리 두 '육지 것'에게 차려주는 밥상으로 배를 채웠다. 이들의 밥상은 특별하지 않다. 그저 자신들이 먹는 것에 숟가락 하나 더 얹고 국 한 그릇 보태는 것뿐이었다. 아무런 조건없는 공짜밥에 그저 하는 말은 "자전거 타고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뿐이다.

생선구이 하나쯤은 빠지지 않고 올라온 섬사람의 밥상은 우리 '육지 것'의 몸에 힘을 줬고, 두 '육지 것'은 그 힘으로 바람 가득한 그들의 섬을 달리고 있다.

5일 만에 돈내고 밥을 사먹었다

자전거로 1시간이면 다 돌 만큼 작은 섬 우도에서 보낸 하루. 우도는 밤새도록 몰아친 바람에도, 안도현의 시처럼 섬을 지우려고 달려드는 파도를 잘 견뎌냈다. 그 덕에 김남희와 나는 작은 섬에서 아침을 맞이할 수 있었고, 바다로 나아가는 해녀들의 작은 행렬을 볼 수 있었다.

평균 나이 오십은 훌쩍 넘겼을 것 같은 우도의 해녀들. 그들은 '육지 것'의 눈에 거대해 보이는 파도에 몸을 싣고 시리도록 차가워 보이는 바다로 몸을 넣었다. 그리고 아주 가끔 바다 밖으로 몸을 드러냈다. 물고기가 물을 거부하지 않듯, 해녀들은 바다와 하나인 듯 했고, '수영'이라는 단어가 포괄할 수 없는 그들의 물질은 더 없이 부드러웠다.

해질녘 다랑쉬오름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해질녘 다랑쉬오름과 바람에 흔들리는 억새. ⓒ 김남희
그 부드러움은 제주도에 아무렇지 않게 널려 있는 오름에서도 느낄 수 있다. 4일 동안 달린 12번 제주도 해안 일주도로를 벗어나 16번 중산간 도로로 들어왔다. 해안 일주도로가 매끈하게 뻗은 직선이라면, 중산간 도로는 오르막과 내리막 그리고 굴곡이 주거니받거니 이어진 곡선이다.

이 도로의 오르막에 오르면 고봉밥처럼 부드럽게 솟은 오름을 볼 수 있고, 내리막이 바닥을 치는 곳에는 돌담을 두른 집들이 모여있는 마을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또 바람은 해안도로만큼 가득하고, 바람을 거부하지 않는 도로변의 억새는 제주 해안의 파도처럼 일렁인다. 이런 풍경을 몇 번 만나고 보냈더니 용눈이오름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용눈이오름에 오르니 우리 달려온 길과, 파도소리에 물컹하게 젖어 있던 우도가 보인다. 바람이 강하다. 몸을 휘청하게 한다. 바람은 용눈이오름을 때리지 않고 부드러운 곡선을 타고올라 가속도를 내 나의 몸을 쳤다.

용눈이오름은 제주도 사람들이 김남희와 내게 푹푹 퍼준 고봉밥을 닮았다. 그리고 그 부드러움은 거친 파도를 타고 넘으며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우도 해녀의 물질과도 비슷하다.

고봉밥, 용눈이오름, 그리고 해녀들의 물질. 너무도 닮은 이들의 모습은 제주도 바람에 깎인 결과일까, 아니면 그 부드러움이야말로 강한 제주의 바람을 견뎌낼 수 있는 근원의 힘일까. 답을 알지 못하는 '육지 것'은 그들의 닮음 앞에서 코가 시큰해졌다. 용눈이오름의 강한 바람 탓만은 아니었다.

내 힘의 원천, 사실 보신탕보다 그 여자의 죽

제주도 중산간 도로를 달리는 길. 오름 너머로 하루 해가 사라지고 있다.
제주도 중산간 도로를 달리는 길. 오름 너머로 하루 해가 사라지고 있다. ⓒ 김남희
다시 숙소를 찾아 떠나는 길. 김남희의 페달질이 힘차다. "용눈이오름에서 정기를 받았다는 게 그녀의 말이다.

내가 김남희를 앞서가고 다시 뒤로 돌아오기를 몇 차례 반복했다. 김남희는 나를 보고 "힘이 남아도네"라고 말했다. 나는 "그 동안 내가 먹은 개가 몇 마리인데"라고 농담으로 받았다(참고로, 어릴 적 우리집은 보신탕 가게였다). 그러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아까 선배가 전복죽 나한테 덜어줬잖아"였다.

해가 떨어져 송당의 작은 여관에 들어서니 이번에도 아주머니가 공짜밥을 차려 주신다. 역시 용눈이오름을 닮은, 해녀들의 물질과 비슷한 부드러운 고봉밥이다. 제주에서의 다섯번째 밤이 부드럽게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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