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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시원하고 구수한 배추된장국은 감기예방에 그만이다
ⓒ 이종찬
"내 니를 처음 만난 초가을
연초록 떡잎 두 장 내던지고
초록빛 앞섶 슬슬 풀 때부터 눈치챘다
니 가슴에 나를 담고 싶어한다는 것을

내 니를 몇 번 더 만난 늦가을
초록빛 앞섶 훌훌 벗어던지고
노오란 속옷 돌돌 말아 올릴 때부터 알아차렸다
니 몸에 나를 꼼짝없이 가두고 싶어한다는 것을

하늘빛 그리움 초록빛 앞섶에 끌어안고
땅빛 기다림 노오란 속옷에 돌돌돌 말아
우리들의 춥고 배 고픈 밥상 위에 오르는 니
쌈이 되었다가 된장국이 되었다가 김치가 되는 니

용서해다오
니 보드라운 몸을 마구 핥고 씹으며 웃고 있는 나
니 매끈한 몸을 먹으며 목숨을 이어가고 있는 나
니가 죽어야 이루어지는 우리들의 슬픈 사랑

올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춥단다
니는 또 내게 얼마나 많이 죽어야
나는 또 니를 얼마나 많이 죽여야
서로 하나가 될 수 있겠느냐"

- 이소리, '내 사랑 김장배추' 모두


▲ 내가 살고 있는 집 바로 앞에 있는 텃밭에선 김장배추가 싱싱하게 자라고 있다
ⓒ 이종찬

▲ 노오란 속잎을 돌돌 말고 있는 김장배추
ⓒ 이종찬
나는 비타민C, 철분, 칼슘 풍부한 김장배추다

나는 배추다. 비닐하우스에서 자라는 연약한 배추가 아니라 지난 초가을 텃밭에 씨를 묻어 서늘한 가을바람을 마시며 연초록 떡잎 두 장 피워올린 가을배추다. 나는 짙푸른 가을하늘을 바라보며 초록빛 잎사귀를 벌렸다. 풀과 나무들이 알찬 씨앗을 매달고 따가운 가을햇살에 제 잎사귀 울긋불긋 물들일 때 나는 몸을 돌돌 말기 시작했다.

낙엽이 하나둘 떨어질 무렵, 사람들은 내 몸을 짚으로 동그랗게 묶었다. 어떤 이는 나를 뽑아 물에 깨끗이 씻어 내 몸 위에 뜨거운 쌀밥과 고소한 멸치육젓을 올려 쌈으로 싸먹기도 했다. 또 어떤 이는 나를 냄비에 넣어 살짝 데친 뒤 손으로 쭉쭉 찢어 된장에 버무려 구수하고 시원한 된장국을 끓여먹기도 했다.

사람들은 나 때문에 늦가을 밥상을 푸짐하게 차렸다. 사람들은 진초록빛 내 겉살을 먹으며 제 몸에 부족한 비타민C와 철분, 칼슘, 엽록소를 채웠다. 사람들은 노오란 내 속살을 먹으며 비타민A와 식이섬유를 채웠다. 사람들은 나를 잘근잘근 씹으며 외롭고 쓸쓸한 늦가을을 행복하게 보냈다.

이윽고 무서리가 내리고 찬바람이 부는 겨울이 되자 사람들은 나를 뿌리째 뽑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내가 똥값이라며 아예 밭에 버려두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 몸을 네 토막으로 잘라 소금에 절였다가 시뻘건 양녑장에 마구 비볐다. 그리하여 나를 엄청나게 크고 깊숙한 장독에 넣었다가 틈틈이 나를 꺼내 먹으며 긴 겨울을 보냈다.

▲ 배추는 다이어트와 대장암, 치질에 아주 좋다
ⓒ 이종찬

▲ 배춧잎을 떼내 물에 깨끗하게 씻는다
ⓒ 이종찬
백 가지 채소가 배추만 못하다

내 고향은 중국 북부지방이다. 내 조상이 한반도에 처음 발을 내디딘 것이 언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여튼 내 조상이 책에 기록된 것은 고려 고종 23년, 서기 1236년에 나온 <향약 구급방>이다. 그 책 속에 내 조상의 생김새와 쓰임새를 자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아 아마 그 앞부터 한반도에 뿌리내린 것 같다.

사람들은 나를 가리켜 '백가지 채소가 하얀 배추만 못하다'(百菜不如白菜, 백채불여백채)라 했다. 이는 그만큼 내가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채소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들이 김치와 국, 찌개, 쌈 등으로 먹는 내 몸은 96%가 물이다. 하지만 내 몸에 4% 들어 있는 여러 가지 영양소는 김치를 담그거나 국을 끓여도 잘 사라지지 않는다.

요즈음에야 사시사철 먹을거리가 하도 많아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별로지만 예전의 나는 여러 가지 채소나 과일이 부족한 겨울철에 사람들에게 부족하기 쉬운 비타민을 챙겨주었다. 내 잎사귀 하나에 사람들이 하루에 필요한 비타민C가 다 들어 있다는 것만 보아도 내 몸이 얼마나 비타민의 보고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칼슘도 갖고 있다. 특히 내 몸에 들어 있는 칼슘은 일칼리성이어서 쌀밥과 국수, 고기 등의 산성식품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나는 열량이 낮고, 단백질과 지방, 당질도 아주 낮아서 사람들의 다이어트에도 아주 좋다. 또한 내 몸에는 식이섬유가 많이 들어 있어 변비나 대장암, 치질 치료에도 큰 도움을 준다.

▲ 배추된장국을 끓이기 위해서는 배춧잎을 끓는 물에 살짝 데친다
ⓒ 이종찬

▲ 살짝 데친 배춧잎을 세로로 잘게 찢는다
ⓒ 이종찬
묵직한 느낌이 들고 손으로 눌렀을 때 단단해야 싱싱한 배추

이제 사람들이 나를 가장 많이 찾는 계절이 돌아왔다. 겨울을 나기 위한 김장김치용으로 나를 고를 때는 너무 크거나 너무 작은 것보다는 중간 크기가 가장 좋다. 나를 들어보았을 때 일단 묵직한 느낌이 들고 손으로 눌렀을 때 단단해야 내 몸이 싱싱한 것이다. 그리고 내 겉잎의 흰빛과 초록빛이 또렷하고 속이 노르스름한 것이 좋다.

내 초록빛 겉잎을 많이 떼어낸 것은 내 몸에 병이 들었거나 나를 잘못 보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초록빛 겉잎이 조금 시들었다 하더라도 겉잎이 다 붙어 있는 것이 좋다. 하지만 내 초록빛 겉잎에 검은 반점 같은 것이 보이면 내 속잎까지 그럴 때가 흔하니, 그런 나는 가차없이 따돌리는 것이 좋다.

요즈음 같은 초겨울, 그러니까 11월 끝자락에서 12월 중순까지의 내가 가장 맛이 좋다. 지금쯤 나를 뽑아 물에 씻어 멸치육젓이나 갈치속젓과 함께 쌈으로 싸먹으면 달고 고소한 감칠맛이 난다. 감기기운이 있는 사람들은 나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세로로 주욱주욱 찢어 구수한 된장국을 끓여먹으면 감기가 뚝 떨어진다.

나를 재료로 삼아 된장국을 끓이는 법은 손쉽다. 나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찢어놓았다면 냄비에 멸치맛국물을 붓고 된장과 고추장을 3:1의 비율로 푼 뒤 센불에서 끓여야 한다. 냄비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오르면 나와 다진마늘, 채 썬 양파, 송송 썬 대파와 매운 고추, 붉은 고추를 넣고 한소끔 끓이면 그만이다.

▲ 멸치맛국물에 된장, 고추장, 마늘, 대파, 양파, 매운고추 등을 넣어 한소끔 끓인다
ⓒ 이종찬

▲ 배추의 속잎은 물에 깨끗히 씻어 쌈으로 싸먹으면 달착지근하고 고소한 맛이 끝내준다
ⓒ 이종찬
나는 맛난 된장국이 되고 고소한 쌈이 되었다

지난 초가을, 나는 창원의 한 텃밭에 씨를 묻었다. 며칠이 지난 뒤 내가 노오란 떡잎 두 장을 내밀자 나를 심은 주인이 아침저녁으로 물을 주며 나를 돌보았다. 나는 주인의 사랑과 가을햇살을 듬뿍 받으며 무럭무럭 자랐다. 밤이면 가끔 달팽이가 기어나와 내 잎사귀를 갉아먹으며 괴롭히기도 했지만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이윽고 무서리가 내리고, 제법 쌀쌀한 바람이 내 몸을 휘감기 시작할 때 나는 너무도 추워 노오란 속잎을 돌돌 말며 온몸을 마구 웅크렸다. 그때 주인이 내게 다가와 짚으로 내 몸을 동그랗게 감싸주었다. 고마웠다. 그때 나는 주인을 바라보며 속으로 다짐했다. 내가 온몸을 던져 올겨울 주인의 밥상과 건강을 지키겠다고.

지난 7일(화) 저녁. 나는 주인의 부름을 받았다. 그날 주인은 한동안 나를 바라보고 있더니 나를 감싸쥐었다. 나는 얼른 주인의 품에 안기기 위해 온몸을 마구 흔들었다. 주인은 그런 나를 부드럽게 돌려 뽑더니 내 겉잎과 속잎을 하나하나 떼내 물에 씻었다. 시원했다. 어서 주인의 밥상 위에 올라 주인의 입을 즐겁게 해주며 한몸이 되고 싶었다.

주인은 내 초록빛 겉잎은 끓는 물에 살짝 데쳐 구수하고 시원한 된장국을 끓였고, 내 노오란 속잎은 밥상 위에 그대로 올렸다. 즐거웠다. 나는 비로소 나를 사랑으로 키워준 주인의 은혜를 갚을 수 있다는 생각에 그 어느 때보다 더 맛난 된장국이 되었다. 그리고 주인이 내 노오란 속잎에 올리는 하얀 쌀밥과 갈치속젓을 가슴에 품고 주인의 고소한 쌈이 되었다.

▲ 배춧잎쌈은 멸치육젓에 싸먹어도 맛이 좋지만 갈치속젓에 싸먹으면 더욱 맛이 좋다
ⓒ 이종찬

덧붙이는 글 | ※ 그동안 애독자 여러분의 수많은 사랑을 받았던 <음식사냥 맛사냥>은 지난 16일(목) 100번째 기사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으로 끝이 났습니다. 이어 20일(월)부터 새로운 음식연재 <맛이 있는 풍경>을 선보입니다. 애독자 여러분의 더 큰 사랑과 따가운 채찍질 기다립니다

※이 기사는 '시골아이', '시민의신문', '유포터', '씨앤비'에도 보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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