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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11월 25일 한라산 백록담의 모습.
2006년 11월 25일 한라산 백록담의 모습. ⓒ 김남희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모르겠다. 술 때문은 아니었다. 그날 난 한 잔도 안 마셨으니까. 내 기억이 맞다면 장소는 삼청동의 밥집이었고, 대화는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곧 제주도에 가서 일주일간 자전거 일주를 할 예정이에요."
"와, 좋으시겠어요."
"시간 되시면 오세요."
"여름휴가 안 쓴 거 일주일 남았는데, 그럼 같이 갈까요?"
"(잠시 침묵) 아, 네…, 그럼 그럴까요?"


어이가 없었다. 우린 그 날 두 번째 식사를 같이 한 상태였다. 낭만적인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일 때문에 알게 된 사이였다.

시간 되면 오라는 인사는 그저 예의상 던진 말이었다. 직장인이, 그것도 분초를 다투는 인터넷매체의 기자가, 한 여름도 아닌 11월에 일주일이나 휴가를 낼 수 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미안한데, 그냥 해본 말이었어요"라고 무르기조차 어려운, 어색한 사이였다.

게다가 이 남자, 여행 경력이라고는 평양행 비행기 타본 게 고작인 이상한 경력의 소유자인데다 자타가 인정하는 '열렬한 팬'이라는 부담까지 덤으로 따라왔다.

어쩌다가 일이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된 걸까. 제주도에, 자전거를 타고, 잘 모르는 남자와 동행이라니! 이름난 관광지를 좋아하지 않는다던 내가, 시속 4km의 속도를 사랑하던 내가, "좋은 여행은 혼자 하는 여행이에요"라고 떠들고 다니던 내가 말이다. 뭐에 홀리지 않고서야 이런 어이없는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자전거를 못 타는 나, 220km를 완주할 수 있을까?

솔직해지자. 나는 자전거를 못 탄다. 어쩌다 한 번씩 고심 끝에 자전거를 빌려타고 나면 결과는 처참했다. 넘어져 무릎이 까지고 옷이 찢어지는 일은 기본이고, 자전거를 타기보다는 끌고 다니며 하루를 다 보내곤 했다. 결국 40km를 걷고난 날보다 더 극심한 피로에 앓아눕는 일이 다반사였다.

시속 4km의 여행을 더 사랑해서가 아니라, 자전거를 못 타기 때문에 시속 4km를 감수하게 된 게 맞다고 할 정도로 나는 자전거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 자전거뿐이 아니다. 인라인이나 스키처럼 속도감이 따르는 운동을 내 몸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달리기나 수영은 물론이고 춤에 이르기까지, 걷는 일을 제외한 그 어떤 운동도 내 몸은 거부했다. 모계쪽 유전에 원인을 돌려온 세월이었다.

그런 내가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돌겠다는 발칙한 꿈을 꾸게 된 건 책 때문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미국을 횡단한 남자의 이야기. "자전거를 타고 미국을 횡단하는 것은 우주에서 티끌 같은 존재인 인간의 조건에 대한 은유"라는 표현이 심장을 흔들었다. '라이더'라는 단어가 '우주비행사'만큼이나 쌉쌀하게 꽂혀왔다. 그 때만 해도 제주도 자전거 일주여행은 '언젠가 펭귄을 보러 남극에 갈 거예요'라는 말만큼이나 실현가능성이 고려되지 않은 무책임한 발언에 지나지 않았다.

어쨌든 나는 한라산 산행을 위해 제주에 내려갈 예정이었다. 혼자였다면, '자전거 일주는 다음에 하지 뭐.' 이렇게 체념하고, 산행 후 일행과 함께 얌전히 서울에 올라왔을 가능성이 더 컸다.

그런데 잘 알지도 못하는 이 남자, 무모한 결단력만큼이나 추진력이 있었다. 전화와 문자를 주고받으며 점점 제주도 여행의 일정이 구체화되었다. 그 사이 점봉산 산행을 같이 하며 탐색전을 펼쳤다. 마침내 주말을 낀 일주일의 휴가를 낸 이 남자가 오늘 제주로 날아왔다.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낯선 남자'와 함께 하는 7박 8일의 자전거 여행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둘이 시작한 이 여행을 둘이서 마칠 수 있을까. 자전거를 타고 시작한 여행이 걸어서 끝나게 되는 건 아닐까. 자전거로 220km의 일주도로를 완주하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을까.

일렁이는 질문을 품은 채 나는 지금 제주의 남서쪽 바닷가, 모슬포에 서 있다. 날은 흐리고 바다는 비에 젖고 있다. 비는 모레 오후까지 계속 내릴 거라고 한다. 빗속 주행이라. 초보 라이더에게는 과하지만 어쩌겠는가. 주사위는 던져졌고 게임은 시작됐다. 한 판 잘 놀아보고 싶다.


[그 남자 박상규] "제주도보다 궁금한 '나의 미래' 김남희"

2006년 11월 25일 한라산 백록담 오르는 길에 눈꽃이 피어 등산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2006년 11월 25일 한라산 백록담 오르는 길에 눈꽃이 피어 등산객들이 사진을 찍고 있다 ⓒ 김남희
태어나 처음으로 제주도에 왔다. 오늘(26일)부터 7박8일 동안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한다. 이번 동반자는 도보여행가 김남희. 4년째 시속 4km의 걸음으로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김남희와 함께 자전거 여행을 할 줄이야.

어색하고 낯선 여자와의 여행. 기간은 하루 이틀도 아닌 7박8일. 사실 김남희는 여전히 내게 낯선 여자다. 지금까지 얼굴을 마주한 건 다섯 번 남짓이다. 물론 인간관계가 만남의 횟수와 비례해 발전하는 건 아니다. 그러면 우린 짧은 기간에 엄청 친해진 것일까? 그건 잘 모르겠다. 지금까지 김남희와 맺어온 관계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처음 본 건 지난 3월이다. 김남희가 <소심하고 겁 많고 까탈스런 여자 걷기 여행> 두번째 책 출판기념회를 열었을 때였다. 세월이 흘러 지난 10월 중순 김남희를 세 번째 만났다. 그동안 김남희는 중동과 아프리카를 여행하고 돌아왔다. 그 때 그녀에게 "킬리만자로에서 표범 봤냐"고 물었다가 "킬리만자로에 표범 없거든요!"라는 대답을 들었던 다소 무안한 기억이 있다.

그 때 나는 김남희 사진전의 추천사를 쓰기로 약속했다. 며칠 후 나름대로 어렵게 작성한 추천사를 김남희에게 보냈다. 그 추천사의 제목은 이랬다. '김남희는 나의 미래다' 제목이 너무 선정적이었나? 그 날부터 김남희는 다소 과하게 나를 다그쳤다.

"듣자하니 당신, 나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김빠'라면서요?"
"아닌데요. 누가 그런 헛소리를…."


내가 '김빠'냐 아니냐라는 여부를 떠나 김남희는 사진전 내내 당황스런 질문에 시달렸다. 문제의 발단은 내 추천사였다. 사진전을 찾은 많은 사람들은 "박상규와 도대체 무슨 관계냐"부터 시작해 "김남희도 박상규를 미래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퍼부었다고 한다. 물론 김남희의 주장이다.

제주도불평등조약 "모든 식사는 '김남희식'으로"

어쨌든 우린 네 번째 만났을 때 제주도 자전거 여행을 약속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자전거 여행은 김남희가 먼저 제안했다. 제주도에 오기 전 김남희는 내게 여행 원칙으로 몇 가지 '불평등 조약'을 제시했다.

그 중 하나가 "모든 식사는 '김남희식'으로 한다"였다. 김남희는 육식을 하지 않고 생선회를 먹지 않는다. 제주도에서 생선회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없다니. 엄청난 굴욕이었지만 난 그녀의 원칙을 받아들였다.

물론 김남희가 제시한 엽기적인 불평등 조약은 몇 가지 더 있다. 그러나 그동안 그녀가 <오마이뉴스>에 '까탈이의 세계여행'을 연재하며 쌓아온 이미지를 고려해 여기까지만 공개한다.

우린 제주도 해안 도로를 일주하며 용눈이오름과 다랑쉬오름에 오르고 비양도와 우도에 가기로 했다. 그리고 김영갑 갤러리에 들르는 건 물론이고, 비자림 숲길을 달리기로 했다. 또 눈이 내리면 시속 20km의 자전거에서 과감히 내려 한라산으로 향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는 김남희가 자전거를 못 탄다는 사실. 그녀는 계속 "자전거 여행이 아닌, 자전거를 끌고간 여행으로 이름을 바꾸면 안 될까?"라며 나를 불안케 한다. 내가 속으로 '그래도 걸어서 세계여행하는 천하의 김남희가 아닌가'하고 억지로 안심하려 노력할 때마다 그녀는 "나는 뒤에서 차만 오면 무조건 넘어진다"는 말로 나를 혼란케 한다.

어쨌든 '어색한 남녀의 제주도 자전거 여행'은 시작됐다. 제주도가 보여주는 풍경과 바람의 느낌이 몹시 기대된다. 그러나 가장 흥미로운 건 역시 김남희와 함께 보내게 될 7박 8일의 일상이다.

어색하고 별로 친하지도 않은 여자와의 여행을 깔끔하게 마무리할 수 있을까. 그리고 타인과 자유롭게 소통하고 대화하는 또다른 방식을 배울 수 있을까. 시험대에 올라선 느낌이다.

지금 제주도 모슬포에는 보슬비가 내리고 있다. 언젠가 김남희는 이런 말을 했다. 비가 내리면 마음이 먼저 젖는다고. 이거 인용했다고 김남희는 또 강변할 것이다.

"이봐, 당신 김빠 맞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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