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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하진의 소설집 <요트>.
ⓒ 문학동네
사람마다 크거나 작거나 간에 꿈이라는 것을 가지고 산다. 때에 따라서는 목표랄 수도 있고 일탈이랄 수도 있고 희망이랄 수도 있고 여유랄 수도 있는 것 바로 그런 것들 말이다. 아니 꿈이 예전에는 있었지만 어떤 계기나 사건, 여건이나 상황 때문에 아예 꿈 따위는 접어버리고 사는 사람이 어쩌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서하진의 다섯 번째 단편집 <요트>의 표제작 '요트'는 꿈과 일상이 분리된 삶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때는 작가를 꿈꿨지만 현재는 "작은 출판사"에서 "고작 교정작업을 하는" 주인공 영희가 바로 그런 인물이다.

그러다 사는 곳이 재개발 되어 집값이 뛰어오르고 그곳에 지어질 고층아파트 대형 평수 입주권을 가진, 아들 민수의 대학 진학 문제 외에는 별다른 문제 없이 사는 중산층 소시민이다. 더욱이 민수는 미국 시민권자로 군대도 면탈된 상태이며 "상위권에서 밀려나본 적이 없는" "성실하고 착하고 공부 잘하는 모범생으로 통하고 있"는 아이이다. 말하자면 영희 가족의 사는 모습은 바람도 없고 파도도 없는 무풍지대이다.

이렇게 안정되어 보이는 삶의 무풍지대는 사실 불안불안한 지대이다. 이 불안지대로 남편의 제안 하나-강북으로 이사해서 여윳돈으로는 '요트'를 사자는-가 떨어지고 영희는 이를 부추긴 남편의 친구를 찾아가 그럴 계획이 없다는 의사를 전달한다. 그러나 문제는 돌아오는 길 영 개운치가 않다는 점이다.

텁텁한 바람이 불고 가슴은 답답했습니다. 전철 안의 사람들은 굳은 얼굴로 앞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28쪽)

아마도 '자기 삶의 무감각'이 불현듯 감지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꿈에 사로잡힌 한때가 제게도 있었습니다"하고 돌이키는 장면이 목격되는 데서 이러한 추리는 가능하다. 영희의 꿈이 좌초/포기된 것이라면 남편의 꿈은 간헐적인 것이고 민수의 꿈은 잠재된 것이다.

요트 여행, 그 오랜 꿈이 좌절된다면 남편도 허무해지겠지요. 그렇지만 곧 잊고 살아갈 것입니다. 꿈이란 본래 그런 것이니까요. (29쪽)

이렇게 가정의 무풍지대에서 남편의 꿈은 아내에게 무난히 수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되지 못한다. "회사는 어쩔 거냐, 다들 잘릴까 전전긍긍하는 마당에 6개월을 쉬는 일이 가능하겠느냐, 고3인 애를 두고 무슨 투정이냐, 애 생각도 좀 해라"라는 식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고3인 애가 문제를 일으킨다. 가출을 해버린 것이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엄마가 되어 아이가 집을 나가기에 이르도록, 그 고통을 까맣게 몰랐다는 사실에 목이 메었어요. 그 착한 아이가, 내게 무슨 신호를 주지 않았을까. 나는 왜 몰랐을까. 대체 왜 그랬을까. 왜 아이를 보지 않았을까. 그 모든 일이 요트 때문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습니다. 그 하잘것없는 것에 정신이 팔렸던 며칠, 남편이 미워서, 너무 미워서 저는 있는 힘껏 고함을 질렀습니다. 그대로 돌아버릴 것 같았지요. (35~36쪽)

물론 그 전에 암시나 조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순탄함에 취해 아들 민수가 받는 스트레스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것이다.

잠깐 스트레스 해소한 거예요, 너무 심각해하지 마세요, 아이의 대답은 지극히 차분했어요. (20쪽) / 그애가 안겨준 고민거리라면 의대를 보낼까, 한의대는 좀 어려울까, 복제 전문의 수의사는 어떨까, 하는 정도였으니까요. (33쪽)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오히려 문제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안정적으로 사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정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로 그런 생각에 문제의 근원이 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꿈을 운운하고 일탈을 시도하는 일체의 행위들을 비정상이라 생각하고 이상하다 여기는 그런 태도에 불안의 요소가 있는지 모른다.

때문에 조금만 가정적 테두리에서 벗어나려고만 해도 두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은 물론 자기 주변의 사람들까지도 그 일탈적 자유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의당 그렇게 살아야 하고 살아야만 한다고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테두리친 자기 감옥이다. 남편의 '요트'는 "하잘것없는 것"이 아니며 민수의 '스트레스' 또한 지나칠 것이 아닌 것이다.

남편의 친구가 전하여 주는 '무풍지대 이야기'는 일상과 꿈의 긴장 관계를 암시한다. 꿈이 완전히 소멸된 일상이야말로 제 감각을 느낄 수 없는 고사 상태가 아닐까? '바람'이나 '파도'에 부대끼는 것보다 더 두려운 것은 바로 이러한 '무풍'의 상태가 아니냐는 것이다.

무풍지대라고 알아요? 바람이, 파도가 전혀 없는 지역이지요. (중략) 숨을 쉬는가, 내가 살아 있는가 싶어질 만큼 사방은 적막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거예요. 그럴 때 가장 두려워요. 영영 바람이 불지 않고, 닻을 올릴 수 없고 그곳에 갇혀 말라갈 것 같은 두려움이지요. 파도가, 바람이 두려운 게 아니에요. (28쪽)

영희가 지니고 있는 두려움은 오히려 가정과 직장이라는 무풍지대에 안주하며 바람과 파도가 없는 것을 오히려 다행으로 생각하는 데 그 본질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남편은 남편대로 아들은 아들대로 이러한 테두리 안에서 정해진/무난한 코스대로 살아가 주기를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동시에 아이가 어찌될까 조마조마해하는, 늘 불안한, 실은 결코 안정되지 못한 삶이기도 한 것이다.

어느 순간 횃불인가 싶던 벽에 걸린 불덩이가 갑자기 휙, 날아왔습니다. 깜짝 놀란 제가 엉겁결에 컴퓨터의 전원을 꺼버렸어요. (중략) 자칫 아이의 캐릭터에 상처를 입힐까 겁이 나서 그랬노라 (37쪽)

"흔하고 평범"한 이름, "아우라가 없는" 이름이 암시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상에 갇혀 있는 존재, 자기가/꿈이 없는 존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필집을 준비하고 있는 어떤 여자의 남편의 이름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토마스'라는 것과 주인공의 이름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영희'라는 것은 닮은 면이 있으며 일탈을 꿈꾼다는 면에서는 남편의 친구나 이 어떤 여자 또한 닮은 면이 있다. 한편 남편과 자식은 이들의 중간쯤에 위치시켜도 좋을 것이다.

"토마스가 내(수필집을 준비하는 어떤 여자) 어깨를 감싸 안았다"(22쪽)는 것과 "아이가 남편의 어깨를 안았어요."(49쪽)라는 동떨어진 이 두 문장 사이에 어떤 상관성/어떤 차별성이 있든 없든 나의 읽는 시선은 양쪽 문장을 번갈아보게 되는데 도대체 왜일까 스스로 궁금해지기도 한다.

덧붙이는 글 | * 지은이: 서하진 / 펴낸날: 2006년 11월 11일 / 펴낸곳: 문학동네 / 책값: 9800원


요트

서하진 지음, 문학동네(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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