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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사이의 틈은 '이해'를 위한 것이다
사람 사이의 틈은 '이해'를 위한 것이다 ⓒ 박명순
'띵' 하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언제나 이 시간엔 등교하는 아이들과 뒤늦게 출근하는 어른들로 엘리베이터 안은 발 디딜 틈이 없게 마련이다. 인원초과를 알리는 부저가 울릴 때까지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드는 일은 사실 흔하지 않다.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본능 때문이다. 그래서 그 복잡한 속에서도 최대한 몸을 긴장시켜 다른 사람과 닿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생각해보니, 버스를 타도 사람들의 드나듦이 훨씬 적은 맨 뒷자리에 앉고 지하철 긴 의자에서도 언제나 가장자리에 앉았던 일이 떠올랐다. 이처럼 가능한 한 다른 사람들과 적정한 거리를 확보하려 애쓰는 본능은 모든 사람이 비슷하다. 또한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이 제일 선호하는 위치가 창가나 구석자리라는 점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정한 거리를 확보하려는 인간의 본능을 엿볼 수 있다.

'호저'라는 동물은 뻣뻣한 가시로 온몸이 덮여 있다. 이들은 날씨가 추우면 두 마리가 서로 몸을 가까이 밀착해 추위를 이겨낸다. 그런데 문제는 서로 몸을 가까이 밀착하면 가시가 상대방을 찌르게 된다는 것.

그렇다고 떨어지면 추위를 이길 수 없다. 그래서 호저들은 추위를 이기기 위해 서로 간격을 좁혀 나가다가 다시 가시에 찔리면 조금 떨어지는 행위를 거듭하면서, 상대의 가시에 찔리지 않고도 추위를 이길 수 있는 적당한 거리를 찾아낸다고 한다. 이처럼 가까이 하기도 멀리 하기도 어려운 상태를 쇼펜하우어는 '호저의 딜레마'라고 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회사까지 오는 시간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나 역시 시어머니와의 관계에서 '호저의 딜레마'를 느끼기 때문이다. 숱한 소중한 시간을 시어머니와 틈새를 좁히는 데 허비했다. 처음엔 웃어른을 모시는 일이 자식의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해, 혼자 편하게 사시는 시어머니를 자청해서 내 집으로 모셔왔다.

그런데 멀리서 바라볼 때와 달리 한 지붕 밑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단점들 때문에 서로 몹시 불편해졌다. 그 불편함을 없애려 호저처럼 너무 가까워지려고 해서였을까. 결국 할 말, 못할 말이 나오고 그게 호저의 가시가 되어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말았다. 마음에 난 상처는 쉽게 아물지 못하고 다시 곪아터지기 십상이란 것을 뒤늦게 깨닫고 말을 아끼기 시작했다.

'호저의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은 상처 또한 크다고 한다. 그 이유는 상대방에 대한 기대나 바람 때문에 더 깊은 딜레마에 빠져들기 때문이란다. 우리 고부간 역시 상대방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던 것은 아닐까.

하루 빨리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 행복해지려면 우선 서로 고유영역을 인정해줘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내가 먼저, 시어머니의 오래된 습관이나 고정관념에서 자유로워져야 한다. 나도 몸에 배어버린 작은 습관 하나 고치기 힘든 일이거늘, 나에 비해 두 배의 세월을 사신 시어머니의 굳은 습관이 쉽게 고쳐지겠는가.

사람 사이에서 필요한 틈새란 상대방을 무시해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는 '불편한 틈새'가 아니라 차이를 인정하면서 얻는 '행복한 틈새'여야 한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는 좁혀져야 할 것이 아닌, 두 사람을 위해 유지해야 할 '최선의 거리'다. 그간의 다툼들은 호저처럼 서로 편할 수 있는 적정거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서 피할 수 없는 상처였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 틈은 얼핏 시어머니와 나 사이에 선을 긋고 단절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제로는 그와 달리 소통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호저처럼 현명하게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찾아내리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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