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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읽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느림>(La Lenteur)의 시작 부분이다.

“초여름 늦은 밤 파리 근교의 고성(古城)을 향해 한적한 시골길을 부부가 한가롭게 자동차로 달린다. 뒤에 오는 자동차가 깜박이등을 켜면서 추월 신호를 보낸다. 뒤의 차에도 젊은 남녀가 타고 있다.

저 연인들은 어째서 이 아름다운 밤을 감상하며 아름답고 멋있는 사랑의 대화를 나눌 생각은 않은 채, 그저 달리고 싶은 충동에만 사로잡히는가.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옛날의 그 여유로운 사람들은. 느림이란 기억이고 빠름이란 망각이다.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구상할 때 발걸음은 느려진다.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할 때 발걸음은 빨라진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 것도 두려울 게 없이 무작정 달리기만 한다.”


이 소설은 빠름을 추구하면서 여유를 잃어버린 현대인들의 삶의 자세를 질타하고 있다. 이 작품이 주는 감동은 이전에는 솔직히 와 닿지 않았다. 그러다가 발목이 부러진 뒤부터 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 천천히 차를 몰면 볼 수 있는 것 하나 - 봄날의 산벚꽃
ⓒ 정판수
1년이 다 돼 가지만 아직 발목은 완전하지 못하다. 그래도 차 몰고 다니는 데는 불편함이 없다. 다만 급브레이크를 잡을 일만 만들지 않도록 조심하면 된다. 혹 급하게 정지하려 했다간 시원찮은 발목에 다시 무리가 가는 일이 생길까 염려되기에.

그러다보니 내 차는 느림보가 되었다. 전에는 추월하는 걸 즐겼는데, 요즘은 거의 추월당하고 있다. 솔직히 좀 어색했다. 습관이 되지 않은 느림 운전에 대한 어색함이었다. 그런데 느리게 운전하게 되면서 전에 잃어버렸던 걸 얻게 되었다. 차를 천천히 몰면서 주변을 돌아보게 된 여유에서 얻은 것이다.

▲ 천천히 차를 몰면 볼 수 있는 것 둘 - 여름날 태풍 뒤의 바다
ⓒ 정판수
우선 바다 물빛이다. 바다가 늘 푸른 건 아니다. 아니 오며가며 본 바에 따르면 푸른빛보다 황토빛이거나 뭐라고 규정지을 수 없는 빛깔이 더 많았다. 물빛만 아니라 파도가 거친가 잔잔한가도 알게 되었다.

오늘만 해도 동해가 이럴 때도 있을까 할 정도로 호수처럼 잔잔하다. 뭍으로 왔다 갔다 하는 물결이 끝에 와서야 하얀 포말을 살짝 만들어낼 뿐 그만이다. 그러나 퇴근할 무렵이면 또 어떻게 바뀔지.

▲ 천천히 차를 몰면 볼 수 있는 것 셋 - 가을 하서벌판의 황금물결
ⓒ 정판수
다음은 산의 풍경이다. 예전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변화는 느꼈다. 집 주위가 산이니 특별히 보지 않아도 다 알았다. 그러나 어디에 무슨 나무가 있고, 어떤 꽃이 피는가 하는 건 몰랐다.

꼼꼼하게 살필 여유가 생기면서 봄에는 진달래, 산벚꽃, 산도화가 많이 핀 곳과 여름에는 지나치는 마을마다 자리한 당산나무의 녹음과, 가을날 하서 벌판의 황금물결과 단풍이 유달리 아름다운 곳도 알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바다 안개와 계곡 안개의 차이도.

▲ 천천히 차를 몰면 볼 수 있는 것 넷 - 겨울 시골 마을 풍경(작년 사진)
ⓒ 정판수
자연 뿐이 아니라 사람들도 많이 본다. 빨리 달릴 때는 거의 볼 수 없던 사람들이 제법 눈에 띈다. 밭에서, 논에서, 심지어 산에서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어딜 바삐 가는지 잽싸게 발을 옮기는 이들로부터 마실 가는 사람들도 보인다. 그 덕에 사람들을 태워줄 일이 더 생겼지만 어떠랴. 빈 차로 가는 것보다 한 사람이라도 더 태워가는 게 가스비 아까운 걸 만회할 수 있으니.

이들은 만약 내가 느릿느릿 운전하지 않았으면 못 보았을 것들이다. 성격 상 내년 쯤 발이 완전해지면 속도가 빨라질 것이다. 그러면 다시 이들을 못 보게 될 런지 모른다. 그래서 지금부터 조급한 성격을 고치려고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

여유를 갖는다는 삶이 조급한 삶보다 훨씬 아름답다는 걸 잘 알면서도 실천을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게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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