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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가을에 꽃몽우리를 맺은 후 기다리고 또 기다리다 한겨울 맹추위가 기승을 떨칠 때면 피어나는 꽃이 있다. 열매는 꽃이 지고 초여름이 되어야 노랗게 익으니 사계절 내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일에 매진하는 꽃이다.

제주에는 한 겨울에도 가을꽃들이 피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기습적으로 내린 눈에 코스모스가 눈을 이고 있을 때도 있으니 육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12월부터 꽃몽우리를 올리고 피어나는 수선화의 향기는 겨울꽃의 백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요, 동백은 붉은 꽃을 뚝뚝 떨어뜨리면서도 이듬해 봄까지 계속 붉은꽃망울을 피워낸다. 그들의 행렬 가운데 끼어 조금은 투박하고 작은 꽃, 추위를 이기려고 꽃이파리에 솜털옷을 입고 피어나는 꽃이 있으니 이름하여 '비파'다.

비파라는 이름은 이파리가 비파라는 현악기를 닮아서 붙여졌다는 얘기도 있고, 열매가 비파를 닮았다는 얘기도 있는데 필자가 보기에는 열매의 모양새가 비파를 닮아서 붙여진 이름인 듯하다.

ⓒ 김민수
비파나무의 목재는 치밀하고도 끈기가 있어서 목도, 빗, 도장의 재료 등으로 사용된다. 이웃집에 커다란 비파나무가 있었는데 비파열매가 익어갈 무렵 몇 번이나 침을 삼키면서 맛을 볼 기회를 잡으려 했지만 결국에는 눈요기만하고 맛을 보질 못했다.

비파나무는 정원수로도 심었지만 제주 돌밭의 돌담 근처에도 많이 심었더란다. 밭일을 하다 목이 마를 때 비파열매를 따서 갈증을 다스리기도 했다는데 씨앗을 땅에 묻어놓으면 어김없이 싹을 틔운다고 한다. 무슨 맛일까? 달콤한 맛도 나고 새콤한 맛도 난다고 하는데 먹어보질 못했으니 그저 상상할 뿐이다. 씨앗에는 가래를 삭이는 성분이 들었으며 옛 속담에 '비파나무가 자라고 있는 가정에는 아픈 사람이 없다'는 속담이 있으니 비파나무가 약재로도 사용되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겨울추위를 나기 위해 솜털을 잔뜩 잎은 것이나 옹기종기 모여 있는 꽃몽우리는 앙증스럽기도 하고, 추위를 어떻게 견딜까 안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게 한겨울 추위를 벗 삼아 피어나는 꽃이니 그 우정을 어쩌랴.

ⓒ 김민수
봄에 피는 꽃은 봄에 펴야 행복하고
여름에 피는 꽃은 여름에 펴야 행복하다.
가을에 피는 꽃은 가을에 펴야 행복하고
겨울에 피는 꽃은 겨울에 펴야 행복하다.

사막에 사는 낙타는 사막에 살아야 행복하고
산에 사는 호랑이는 산에 살아야 행복하다.
물에 사는 물고기는 물에 살아야 행복하고
하늘을 나는 새는 하늘을 날 때 행복하다.

<자작시-행복>


비파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한 겨울 추위에 피어나야 제 세상인 것이니 그를 보면서 안타가워하고, 안쓰러워하기보다는 그냥 대견하게 바라보자. 꽃이 귀한 계절에 피어난 꽃에 감사하자. 그들은 그저 자기들의 삶, 충실하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니, 우리는 우리의 삶을 그렇게 살아가자.

ⓒ 김민수
겨울 양지바른 곳에 종종 바보꽃이 피어날 때가 있다. 오늘 산책길에 푸릇한 새이파리를 내는 나무들을 보았다. 이제 막 초겨울로 접어들었는데 철모르고 피어났으니 머지않아 얼어터지고, 시커멓게 타들어갈 것이다. 맹추위가 기습을 하면 얼어터질 가녀린 꽃들, 마치 오늘 아니면 내일이면 얼어터질지라도 오늘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살에 맘껏 피어나는 그들을 보면 우리의 삶이 오늘 혹은 내일 끝난다고 하더라도 지금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하는 것이리라.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인생이다.

제주의 겨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추울 때가 많다. 습기를 품은 겨울바람이 파고들면 살을 에는 추위가 무엇인지 실감이 난다. 햇살 가득하고 바람이 잔잔한 날은 봄날처럼 따스하다가도 바람이 불면 아무리 영상의 기온이라고 해도 견디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영하로 내려가 얼음이 얼지 않으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피어나는 동백, 된서리에 주춤하다가도 이내 화들짝 피어나는 수선화, 아무리 추워도 넉넉하게 피어나는 비파, 사나흘 이어진 따스한 날씨에 피어난 바보꽃, 가을에 피어 이른 봄까지 내내 피어 있는 가을꽃, 제주의 꽃들을 보면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돌아보게 된다.

ⓒ 김민수
제주도에 몇 년을 살면서도 사실 비파꽃의 존재를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어느 해 겨울 모신문사기자가 겨울에 피는 제주꽃을 소개해 달라며 전화를 했다. 동백, 수선화, 갯쑥부쟁이, 감국과 텃밭에 옹기종기 피어나는 잡초들이 피어내는 꽃들을 소개하는데 느닷없이 '비파'를 아냐고 묻는다. 무슨 악기이름인가 하였는데 식물도감을 보니 분포지가 제주도다. 이파리의 모양을 가만히 살펴보니 어디선가 보았던 것이다.

그런데 비파나무가 생각보다 많았다.
가만히 살펴보니 정말, 꽃이 피었다. 그 추운 겨울에도 솜털옷을 입고 꽃을 피웠다. 얼핏 보면 꽃이 있는지도 모를 만큼 소박한 꽃, 그 꽃이 겨울을 보내고 봄을 보내고 노랗게 열매를 익혀간다. 열매가 익어가면서 영락없이 현악기 비파를 닮아간다. 한겨울 추위를 벗 삼아 피어난 꽃이 들려주는 노래, 비파와 어우러지면 참 아름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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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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