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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랜덤하우스
일본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의 한 사람인 히가시노 게이고가 펴낸 장편소설 <환야> 역시 이 팜므파탈을 주 소재로 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신카이 미후유'라는 인물은 자신의 욕망과 탐욕을 위해 자신 주변에 있는 남성들을 철저히 이용하고 농락하고 그 뒤에는 헌신짝처럼 내버리는 여성이다.

작품의 배경은 1995년에 발생한 일본의 고베 대지진. 전날 부친상을 당했던 '마사야'는 죽은 아버지의 생명보험금을 노리고 빚독촉을 하러 온 외삼촌이 지진의 폐허 더미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을 발견하고는 옆에 있던 벽돌로 쳐죽인다.

우발적이고 충동적인 범행이었다. 그리고 이날 이 사건을 우연히 목도한 미후유는 그의 범행을 덮어주고 은폐해줌으로써 마사야를 그녀의 첫 번째 파트너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그 후 도쿄의 보석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던 미후유는 도쿄 제일의 미장원을 운영하는 사장이 되고, 급기야 나중에는 보석가게 사장의 부인의 자리에 앉기까지 이른다. 단 5년 동안 이루어진 그녀의 놀라운 급성장의 배경에는 오직 마사야만이 알고 있는 그녀의 두 얼굴이 존재한다.

그녀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 마사야를 이용할 때마다 그에게 주문을 걸듯이 다음과 같은 말을 반복한다. '이것은 모두 다 우리의 행복한 미래를 위해서야'라고.

그 사건으로부터 혼란은 시작되고

진심으로 미후유를 사랑했던 마사야는 미후유의 꼭두각시가 되어 살아가던 중 우연히 그녀의 과거에 의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그것을 밝혀냈을 때 마사야는 공포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단순히 배신감이나 실연 따위의 감정이 아니었다. 바로 마사야 자신의 지난 5년 동안의 모습이 한순간에 부정되는 것이기도 했다.

두 얼굴의 미후유를 내심 불안한 마음으로 지켜보던 마사야를 그래도 지켜준 것은 미래에 미후유와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란 막연한 꿈이었다. 마사야는 그 꿈이 모두 헛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자신이 보았던 것은 모두 환영(幻影)이었던 것이다. 이 불행한 결말은 미후유가 미사야에게 자주 했던 말 속에 이미 내포되어 있었다.

"우리는 밤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설사 주변이 낮처럼 밝더라도 그건 가짜야. 그런 건 이제 포기할 수밖에 없어." (<환야>2권, 234쪽)

미후유에게 당한 배신감과 절망감으로 미사야는 그녀의 진짜 모습을 추적하기에 이른다. 그녀가 목숨을 지키며 감추려 했던 그녀의 과거를 추적하던 마사야는 모든 어긋남의 시작이 바로 5년 전 고베 대지진 현장에서 비롯된 것임을 깨닫게 된다. 수천명의 사상자와 이재민을 낳고 천문학적인 숫자에 가까운 피해를 낳았던 사건. 그것은 가난했지만 평범하고 소박했던 마사야 인생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어버린 순간이기도 했다.

고베 대지진으로 인해 그들은 모든 가치와 체제, 사고, 가치관이 잿더미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뒤엉켜버리는 것을 목도했다. 그것은 곧 혼란 그 자체였다. 누가 죽었는지 신원을 확인할 길 없는 그 엄청난 대 참사 앞에서 미후유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음을 알게 된 마사야는 몸서리를 치게 된다. 고베 지진은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위기였으나 미후유에게는 '기회'였던 것이다.

욕망의 다른 이름... '가짜'

작가가 이 작품의 배경을 고베 대지진으로 설정한 것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 지진과 비슷한 수해라든지 폭설로 인한 피해 등 천재지변 앞에 인간의 존재는 얼마나 무기력하고 허망한 것일까. 어젯밤까지 우리 삶을 지탱해주었던 모든 체제와 질서, 가치관, 이념이 하루아침에 무너졌을 때 그 앞에서 무너지지 않을 사람은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자 절정을 이루는 장면은 바로 작품의 첫머리, 마사야가 자신의 외삼촌의 이마를 벽돌로 쳐죽이는 장면이 아닐까 싶다.

이 작품은 한 권당 400쪽가량으로 두 권짜리다. 결코 적은 분량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일단 책을 잡기 시작하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사건들과 세밀하고 치밀한 플롯(구성), 여기에 작가의 유려하고 속도감 있는 필력이 더해져 책 읽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900여 쪽에 달하는 분량이 결코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다.

특히 이 작품에서 지은이는 미후유뿐 아니라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의 추잡하고 모순적인 욕망과 이기심을 보여주고 있다. 지은이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은 비단 미후유라는 한 여성의 욕망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아마도, '욕망'이라는 채워지지않는 꿈을 위해, 한 손으로는 웃으며 악수하며 나머지 한 손으로는 칼을 갈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향해 이야기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욕망은 한낮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덧붙이는 글 | <환야> 1,2/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도서출판 랜덤하우스/ 각권 9800원


환야 1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일영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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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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