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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7월 6일, 미군기지 철조망 옆에서 콩밭 매던 노영희 할머니
ⓒ 노순택

할머니는 다짜고짜 정치 얘기를 꺼냈다. 그것도 남의 나라 정치 얘기를.

"노을이 아빠!"
"네?"
"노을이 아빠는 어떻게 생각혀? 이번에 미국 선거에서 민주당이 이기고, 공화당이 졌잖여. 이게 우리 마을 일에 무슨 영향이 있을까? 내 생각에는 어떤 영향이라도 있을 것 같단 말여. 공화당 놈들은 부시 편이고, 민주당은 쪼깨라도 낫담서? 그 놈들도 이 일이 을매나 엉터리로 사람 말려죽이고 있는지 다 보고를 받을 거란 말이지. 거기도 양심이 있는 놈들이 있으면, 이것이 잘못된 일이다, 그러니 다시 검토를 해 봐야 한다, 그러는 사람도 있지 않겄어?"

말문이 막혔다. 예상치 못한 질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농사밖에 모르고 살아온 농부 할머니의 입을 통해 미국의 정치변동에 따른 '진단'과 '전망'을 듣는 게 낯설었다.

할머니는 알타리 무김치를 막 담그고, 쌀쌀한 가을마당에서 이웃들과 노닥거리던 참이었다. 입에서 엷은 막걸리 냄새가 났다. 응답보다는 궁금증이 일었다.

"아니, 할머니 그런 걸 어떻게 다 알고 계세요?"
"지금 날 무시하는겨? 우리 마을이 이렇게 된 뒤로 나도 뉴스를 매일 본다고. 혹시나 우리 마을 얘기가 나오지는 않는지, 미국놈들이 대체 뭔 짓거리를 할라고 염병을 떠는지, 우리도 뭘 알아야 싸움을 할 것 아녀. 이번 선거에 공화당이 져뿌려서 남스팰트라나 뭐라나 국방부 장관 하던 놈도 모가지가 잘렸담서? 그니까, 우리나라에도 뭔 변화가 있지 않겄냐 하는 것이제. 내가 볼 때는 아무래도 영향이 있을 것만 같애. 우리 동네도 숨통이 트이는 것 아녀?"
"글쎄요, 그러니까 그게…."

어차피 속시원한 대답을 원하셨던 건 아니었다. (내게 그런 해답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만은…) 할머니는 자신의 소박한 정세분석과 소망이 그저 헛된 바람만은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싶은 것이었다. 대충 맞장구를 쳐줄 수밖에….

마음이 무거웠다. 전쟁 광신도들이 중간선거에서 패배하고, 럼스펠드가 국방장관에서 물러났다고 한들 평택미군기지확장 사업이 '없던 일'이 될 수 있을까? 저 멀리 아메리카의 힘가진 자가, 이 땅의 힘가진 자가, 할머니의 소망에 귀기울일 줄 알았더라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지는 않았으리라.

예순아홉살 노영희 할머니는 뉴스에서 지푸라기를 잡은 셈이었다. 할머니는 당신이 움켜쥔 지푸라기가 헛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두고 보라구, 내 말이 맞나 틀리나. 지들도 사람이라면 이리 할 수는 없는 거여. 하늘이 알구 땅이 아는데, 지들 맘대로만 할 수가 있어? 두고 봐, 내 말이 맞나, 틀리나…."

'38년생 호랭이띠' 할머니는 마을에 친구가 많았다. 민병대 할아버지, 송재국 할아버지, 이상순 할머니, 이호순 할머니가 모두 호랭이띠 갑장이었다. 호랭이들끼리 아웅다웅 다툴 적도 있었지만, 늙어가는 처지에 서로를 의지하고 보듬어안을 일은 더 많았다. 말로 못다할 고생을 함께 나눈, 생존의 동지들이기에 정이 더 깊었다.

칠순잔치 같은 거야 미련도 없고 어찌 되어도 그만이지만, 그 칠순을 평생 살아온 대추리에서 맞을 수나 있을지, 노영희 할머니는 그 생각만 하면 가슴이 답답해 오고, 큰 돌덩어리가 머리 위에 똬리를 튼 것 마냥 지끈지끈 골이 아팠다.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국제정세를 바라보는 눈을 떴지만, 세상은 오히려 캄캄했다. 그 피눈물 나는 고생으로 갯벌을 메워 만든 옥토였다. 그 너른 들녘이 이제는 온통 파헤쳐졌어도, 할머니는 이 땅에 살고만 싶었다.

저들이 이제라도 그만둔다면, 모든 걸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모진 시련마저도 잊어야 한다면, 잊어 주리라. 이 땅에 살 수만 있다면....

"고마워, 고마워, 이렇게 잊지 않고 찾아오니 고마워…."

38년생 호랭이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호랭이도 눈물을 흘린다.

나는 사진기를 들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 대추리는 800일이 넘도록 촛불을 들고 있다. 고향을 지키려 한 죄로, 김지태 이장은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차가운 감옥에 갇혀 있다. 대추리의 늙은 농부들을 죽이고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평화와 안보가 대체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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