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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는 독립유공자와 그 후손의 삶에 얼마나 관심을 보이고 있을까요? 우리는 그들의 모습을 3·1절이나 광복절 때 스쳐가는 TV화면으로만 접할 뿐입니다. 그들의 삶은 우리의 무관심 속에 방치돼 있습니다. 

11월 17일은 국권회복에 헌신한 분들의 독립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순국선열의 날'입니다. 독립유공 가족을 대하는 우리의 모습을 깊이 생각해 볼 때입니다. <오마이뉴스>는 '순국선열의 날'을 앞두고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어려운 삶과 보훈행정의 문제점을 짚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주>
"공적심사위원회의 심사가 다 잘됐다고 생각합니까?"
"공적심사위원들이 한 것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시 잘못된 걸 발견한 적이 있습니까?"
"근데, 그건 공적심사위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에..."


10월 23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 때 차명진 의원이 박유철 국가보훈처장에게 질의를 하고 있다.
10월 23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 때 차명진 의원이 박유철 국가보훈처장에게 질의를 하고 있다. ⓒ 국회영상회의록
10월 23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서 차명진 의원과 박유철 국가보훈처장이 주고받은 문답이다. 차명진 의원은 "3·1운동과 관련 건국훈장 애족장 및 건국포상 수여자 1526명 중 178명이 공적심사 기준보다 높이 서훈됐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박유철 처장은 "공적심사위에서 결정하는 일"이라고 답했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03년 이후 지금까지 훈격 재심사를 요청한 독립유공자 유족은 모두 27명. 하지만 국가보훈처는 모두 "재심사 불가"라고 통보했을 뿐이다. 이유는 하나 같이 "공적심사위에서 결정한 사안"이라는 것이다.

유족들 "심사에 불만"- 보훈처 "공적심사위에서 공정하게 심사"

독립유공자의 서훈 등급을 결정하는 곳은 '공적심사위원회(이하 공적심사위)'다. 전문가 49명으로 이루어진 공적심사위는 제1공적심사위와 제2공적심사위로 나뉘어진다. 각 공적심사위 간에 이견이 있을 때는 합동심에서 최종적으로 공적을 심사한다.

포상 훈격은 3·1운동, 광복군, 의병 등 12개 분야로 나뉘어 보통 수형기간에 따라 결정된다. 예를 들어 3·1운동을 하다가 4년 이상의 형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이, 8년 이상이면 독립장(3등급)이 추서되는 식이다.(훈격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1등급), 대통령장(2등급), 독립장(3등급), 애국장(4등급), 애족장(5등급)과 건국포장, 대통령표창으로 나뉜다.)

여기에는 수형기간뿐만 아니라 종합평가라고 할 수 있는 공적 심사 준칙이 포상 훈격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중에서 문제가 되는 준칙은 '독립운동의 공헌과 희생정도'와 '공적의 역사적 의의' 등 개량할 수 없는 2개 항목. 여기다 "객관적이고 공적한 심사를 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심사위원의 명단과 회의록이 공개되지 않는 것도 문제다.

때문에 유족들은 "심사위원의 주관적이고 자의적 판단이 개입되거나 비전문가가 참여해 부실한 평가가 이뤄진다"며 공적심사위원들의 심사에 불만을 터트리고 있다. 김자동 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은 "자격 없는 사람들이 심사하고 있다"며 "5년 전에 보니까 심사위원 중 광산 연구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주장했다.

반면 국가보훈처는 "심사위원들이 공정한 심사를 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정관회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사무관은 "공훈심사위에 사학 전공자뿐 아니라 정치, 사회 쪽 인사들이 참여해서 각 공적에 대해 종합적으로 공정한 심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밝혔다.

[잘못된 포상 ①] "심사기준 오락가락, 원칙도 없다"

방병건씨는 "심사 기준이 오락가락하고 (공적심사위에서) 원칙이 없이 심사를 한다"고 주장한다.
방병건씨는 "심사 기준이 오락가락하고 (공적심사위에서) 원칙이 없이 심사를 한다"고 주장한다. ⓒ 선대식
독립운동가 후손인 방병건(60·서울 방화동)씨는 "공적심사위의 심사가 제 입맛대로"라고 주장했다. 방병건씨는 1920년 <조선일보> 창간기자였던 방한민 선생의 손자다. 방한민 선생은 1923년 7월 북간도 용정에서 조선 총독 암살을 기도하다 사전에 발각돼 징역 10년을 언도 받고 4년 6개월을 복역했다. 출옥 후에도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29년 체포돼 7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방한민 선생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이 추서됐다. 하지만 방씨는 "할아버지의 서훈 등급이 잘못됐다"며 지난 1999년 훈장을 국가보훈처에 반납했다. 방씨는 "조부의 훈격은 독립장(3등급)"이라고 주장한다.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일반기준에 따르면 일제 관헌 등을 제거하다가 8년 이상의 형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건국훈장 독립장(3등급)에 해당한다. 실제 방한민 선생은 모두 17년 형을 받아 실제 11년 6개월을 복역했기 때문에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이 아니라 독립장 추서 대상이다.

방병건씨는 "심사 기준이 오락가락하고 원칙이 없다"고 주장했다. 방씨는 조부의 훈격이 어떻게 결정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회의록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했지만 국가보훈처는 방씨에게 "객관적이고 공정한 심사를 위해 회의록을 공개할 수 없다"는 답변서를 보내왔다. 이에 방씨는 "(국가보훈처에서) 민원인의 말을 듣지도 않고 해결할 노력도 하지 않는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조박용 선생의 후손인 조길석(52·대구 두류동)씨 역시 방씨와 마찬가지로 조부의 훈격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조씨의 조부 조박용 선생은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유시연 영남의병대장과 함께 경북 지역에서 의병활동을 한 공로로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이 추서됐다.

조씨는 "조부는 1913년 8월 체포돼 15년 형을 언도받고 1923년 1월까지 9년 5개월 감옥살이를 했다"며 "이에 따라 할아버지는 독립장(3등급)을 받아야 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독립유공자 포상심사 일반기준에 따르면 의병 관련 8년 이상의 형을 받은 분은 독립장 추서대상이다.

조씨는 재심 요청을 했지만 상처만 얻고 말았다. 국가보훈처가 재심요청 한 조씨에게 보낸 답변서에서 "신규 발굴에 힘 쏟아야 하는 상황이라 재심할 겨를이 없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조씨는 "이게 말이 되느냐, 보훈행정이 뒤죽박죽 중구난방"이라면서 "조부가 높은 훈격을 받으려고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지만 원칙은 지켜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덧붙였다.

[잘못된 포상 ②] 감형돼 출소된 사람이 옥사한 것으로...

강○○ 선생은 실제 1920년(대정9년) 4월 20일 출옥하였다.
강○○ 선생은 실제 1920년(대정9년) 4월 20일 출옥하였다. ⓒ 선대식
반면 과대 포상된 경우도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강○○ 선생의 경우다. 1991년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에서 작성한 공적조서에 따르면 강○○ 선생은 1919년 3월 강원도 화천 독립만세 운동의 주동자로 일본 헌병에 체포됐다. 이후 9월 고등법원에서 징역 8월을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 중 1920년 2월 순국했다. 이에 따라 1991년 강○○ 선생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4등급)이 추서됐다.

하지만 <오마이뉴스> 취재 결과 공훈심사과에서 작성한 공적조서는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다. 서대문 형무소 수형자 기록에는 강○○ 선생이 1920년 4월 28일 감형돼 출소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던 것.

그렇다면 강○○ 선생의 실제 옥고 기간은 약 1년 1개월로 '3·1운동에 참여하여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건국훈장 애족장'이라는 포상에 기준에 따라 애국장이 아닌 애족장(5등급) 수여 대상이다.

강 선생 활동에 대한 기술이 잘못된 것은 국가보훈처에서도 인정하는 대목이다. 정관회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사무관은 "확인결과 강 선생은 출감 후 여독으로 순국했으며 이에 따라 (공적조서를) 수정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정 사무관은 "출감후 바로 숨졌기 때문에 옥중사한 것과 훈격상의 차이는 없다"고 말했다.

[잘못된 포상 ③] 잘못된 훈격이라도 재심사는 없다

허춘근(47·경기 용인시)씨는 지난 달 23일 국가보훈처 국정감사에 증인으로 출석했다. "훈격이 잘못돼도 재심사가 없다"는 증언을 하기 위해서였다.

허씨의 조부 허원용 선생은 1919년 3월 함북 성진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8월을 받고 실제 1년 1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3·1운동과 관련 1년 이상의 형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건국훈장 애족장(5등급)이라는 심사기준에도 불구하고 지난 2월 허원용 선생의 훈격은 건국포장으로 결정됐다. 국가보훈처는 "공적심사위가 종합적으로 판단한 결과"라는 입장만 되풀이 하고 있다.

허씨는 조부의 포상 훈격에 불복해 국가보훈처에 재심사를 요청했지만 허사였다. 재심사를 규정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정관회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사무관은 "공적심사위원들의 공정하고 정확한 심사를 믿어 의심치 않는다"며 "재심사 관련 규정이 없기 때문에 재심사는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허씨는 또한 지난 5월 국무총리 행정심판위원회에 '독립유공자 훈격 변경'을 청구했지만 10월 20일 청구가 각하됐다는 통지서를 받았다. 행정심판위 역시 "재심사를 규정하는 조항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밝혔다.

현재 차명진 의원은 재심사와 관련해, 상훈법 개정을 준비하고 있다. 상훈법 제7조 2항에 '서훈 확정 후 불복절차'를 신설한다는 것이다. 차명진 의원은 "독립유공자 포상 및 훈격과 관련해 국가보훈처나 공적심사위의 서훈 오류가 발생해도 이를 재평가 하는 규정이 없다"며 "서훈법을 개정해 재평가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밝혔다.

전공자 심사의원으로 위촉하고 명단 공개해야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국가보훈처 전경.
서울 여의도에 위치한 국가보훈처 전경. ⓒ 선대식
독립유공자 훈격 결정과 관련한 보훈행정이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재심사 이전에 공적심사위의 공정하고 정확한 심사가 전제돼야 한다. 하지만 공적심사위의 부실한 심사에 대한 문제제기는 비단 유족들의 입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1980년 대 초부터 1995년까지 공적심사위원을 역임했던 이현희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 역시 부실한 심사를 지적했다.

이현희 명예교수는 "심사 때 부실한 평가가 이뤄진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심사의원 중 독립운동사나 근현대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닌 조선시대, 고려시대를 연구한 사람이 들어와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며 "주전공자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이 교수는 "현재 심사위원 중에 정실인사로 들어온 사람들이 많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이 심사위원을 역임하던 시절에도 "아는 사람은 더 해주고 모르는 사람은 깎아내리려고 했다. 그래서 다른 심사위원들이 불만을 가지는 경우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심사 논란을 해결하기 위해 이 교수는 "지벌, 문벌, 학벌 친분 관계를 배제하고 소신있는 전공자를 위촉해야 한다"면서 "심사위원들의 명단을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료 수집에 발을 동동 구르는 유족들의 현실
자료가 소실됐거나 북한에 있는 경우 많아

▲ 국가보훈처에서 발행하는 <나라사랑>(11월 20일자)에서 지난 17일에 있었던 순국선열의 날 기념식을 보도하고 있다.
ⓒ<나라사랑>

독립운동가 김봉조 선생의 외손자인 신동욱(46·서울 충정로)씨는 얼마 전 외조부의 독립유공자 신청을 포기했다. 신씨는 어머니와 함께 5년 동안 일본어로 되어 있는 자료들을 조사해 외조부의 흔적을 찾아냈지만 결정적인 자료인 판결문이나 수형증명서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김봉조 선생은 1919년 평북 비현에서 3·1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어 9개월의 형을 언도받고 평양구치소, 신의주형무소 등에서 옥고를 치렀다. 김봉조 선생이 재판을 받은 곳이나 옥고를 치른 곳 모두 지금의 북한 지역이다. 신동욱씨는 "수형증명서를 찾기 위해서는 북한으로 가야하는데 현재로서는 어려운 일"이라고 말했다.

신씨처럼 독립유공자 신청을 위한 자료를 찾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유족들이 적지 않다. 유족들은 "수십 년이 지난 상황에서 개인이 판결문, 수형증명서 등의 자료를 찾기란 힘든 일"이라고 주장한다. 독립유공자 포상을 위해 유족들이 직접 공적자료를 찾아 국가보훈처에 신청해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국가보훈처에 따르면 2003년 이후 현재까지 독립유공자 심사대상자 2902명 중 포상을 받은 대상자는 전체의 44.6%인 1295명에 불과했다.나머지 대상자는 자료 불충분 등의 이유로 포상을 받지 못했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류제창(60·부산 안락동)씨 역시 "자료 찾기가 매우 힘들다"고 말했다. 류씨의 조부는 류재찬 선생으로 1919년부터 1944년 순국할 때까지 조선 독립 후원 의용단, 상해 임시정부 등에서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류제창씨는 2005년 4월부터 10월까지 생업을 포기한 채 서울, 대구, 대전, 경기 광명, 충북 영동 등 전국을 다닌 끝에 겨우 조부의 자료를 찾아 독립유공자 신청을 할 수 있었다. 류제창씨는 "많은 자료들이 한국 전쟁 때 소실돼 기록을 찾기가 매우 어려웠다"고 밝혔다.

"자료 찾기가 힘들다"는 주장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입장이다. 정관회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사무관은 "유족들이 어느 정도의 공적개요사항만 제출하면 보훈처에서도 자료 수집에 나선다"고 말했다. 정 사무관은 "모든 자료가 소실된 경우 국가보훈처도 어쩔 수 없다"고 덧붙였다.

국가보훈처에서는 정부차원에서 독립유공자를 발굴하기 위해 2005년 1월 전문사료발굴단을 발족했다. 정 사무관은 "1962년 이후 전체 포상자 1만640명 중에서 전문사료발굴단에서 2년 동안 발굴한 것만 1094건"이라고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선대식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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