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올라갔다. 가을비가 지나간 뒤라 조금은 쌀쌀했지만 그래도 아늑하고 좋았다. 무엇보다도 산성 꼭대기를 향해 올라가는 길목이 가파르지 않고 완만해서 더욱 좋았다. 우리 일행들은 마치 포근한 어머니의 넓은 품에 안기듯 무척이나 신난 얼굴이었다.
남한산성은 본래 북한산성과 함께 서울 도성을 지키던 남쪽의 방어성이었다. 그 옛날 백제의 왕도(王都)였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고, 신라 문무왕을 거쳐 고려시대에 몽고군을 막아선 곳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역사의 터전으로 일찌감치 우뚝 서 있던 곳이다.
남한산성의 축조시점을 보통 신라시대 문무왕 때로 잡고 있다. 그 때는 이른바 흙과 볏짚과 낙엽 등을 짓이겨 토성(土城)을 쌓았다. 그 뒤 조선시대 인조 4년에 들어서야 돌을 다듬어 성벽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시대적인 필요에 의해 개축한 것이겠지만 흙에 비해 반석으로 세운 석성(石城)은 그만큼 큰물과 비바람에도 끄덕하지 않는 법이다.
물론 지금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보수공사를 했을 것이다. 지난 세월 동안 뜯었다가 쌓아 올리기를 수차례 동안 되풀이 했을 것이다. 성벽의 둘레 총 길이가 7,545m에 달하고, 성벽의 위아래 높이만 해도 낮은 곳이 3m, 높은 곳이 7m에 달한다고 하니 그것을 여러 차례 뜯어 고치는 것도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성 싶다.
인생의 성을 쌓아 올리는 것도 쉽지 않기는 마찬가지이다. 더군다나 인생은 되풀이가 없지 않는가. 한 번 주춧돌을 잘못 놓으면 얼마 못가 허물어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잘못 놓은 채 아무리 견고한 듯 쌓고 또 쌓아 올린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옛 어른들은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던가.
혼인이라는 성벽 또한 마찬가지일 성 싶다. 쌍춘년이라 하여 정말로 많은 젊은이들이 부부의 연을 새로 맺었다. 하지만 혼인이라는 게 세상의 흐름을 따르는 게 결코 아니다. 이 세상의 흐름은 꾸밈과 빠름에 끌려 다닌다. 그러나 혼인이라는 성벽은 겉만 그럴듯하게 지은다고 하여 되는 것도 아니요, 빨리 쌓아 올린다고 해서 완공되는 것도 아니다.
뭐든 그것이 세워지기까지는 숱한 나날이 깃들어야 한다. 건물을 짓거나 성벽을 쌓을 때 첫 주춧돌을 잘 놓는 이유, 그리고 위와 아래 오른쪽과 왼쪽을 잘 맞추어 쌓아 올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 때문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법이요, 그때의 꾸밈은 물 흐르듯 세월 속에 자연스레 나타나는 법이다. 결코 헐레벌떡 치장하는 것과는 다른 참된 숙성을 통한 꾸밈인 것이다.
남한산성을 올라가는 길목은 크게 다섯 가지 코스가 있는데, 우리 일행들은 멋도 모르고 여러 길목들을 무질러 갔다. 이른바 산성종로(로터리)에서 침괘정으로 갔다가 영월정에서 숭열정으로, 그리고 약수터에 올라 몰을 한 모금 축이고, 곧장 수어장대를 향해 올라가, 그곳에서 사진 몇 컷을 찍고, 서문을 거쳐 국청사를 지나 다시금 산성종로에 다다랐다.
인생은 그처럼 그 자체가 남한산성을 향해 올라가는 산행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산성 꼭대기인 수어장대를 향해 올라갔다면, 시간이 지남과 함께 반드시 맨 밑바닥을 향해 내려와야 한다. 도착점을 향해 올라갔으면 언젠가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법이다.
우리의 인생길은 때로는 오르막길 최정상을 향해 올라가지만 때론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때 한 눈을 팔게 되면 자칫 발목이 다칠 수 있고, 헛발을 디뎌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 있다. 그만큼 오르막길 인생 때에는 남을 짓밟고 올라가서는 안 될 일이요, 내리막길 인생에서도 자식들에게 한 밑천 재산과 유산을 남겨 주기보다 긴 안목을 갖고 그들 스스로 분별력을 갖추며 살도록 이끌어 주는 게 필요치 않나 싶다.
우리 일행들은 침괘정에서 영월정 그리고 숭열정으로 올라가는 길목에서 숨이 많이 찼다.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되풀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약수터에서 물을 받아 한 모금 마시는 시간만큼은 세상의 온갖 씨름들을 다 잊은 듯 시원했다. 인생의 중턱무대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은 그만큼 시원하고 따뜻한 역할을 건넸을 것이다. 물을 한 모금 마시는 동안 내게 은혜를 베풀었던 사람들의 얼굴이 물에 비추어 지나가는 듯 했다.
맨 위 꼭대기 지점인 수어장대(守禦將臺)는 남한산성 중에서 가장 화려하고 웅장한 누각이다. 이 누각은 남한산성의 지휘와 관리를 목적으로 지은 것이다. 물론 성 안에는 병사들이 묶을 수 있고 또 먹고 마실 수 있는 터들이 있었다. 그 중 우물 2곳은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다.
그처럼 수어장대는 남한산성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남한산성 내에는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연못이 있고, 논밭만 해도 124결이나 있었다. 성벽 둘레에는 30여개에 달하는 물구멍을 뚫어서 성안과 밖을 잇기도 했다. 생명의 물줄기를 온 사방으로 연결해 놓았던 것이다.
더욱이 남한산성에는 동문인 좌익문, 서문인 우익문, 남문인 지화문, 북문인 전승문 등 4개의 큰 대문이 있다. 그리고 일반 사람들은 모르는 비밀문인 암문이 16개나 있었다. 그리고 임금의 숙소인 행궁도 있었고, 성 안에는 그 옛날 장터가 5곳이나 서기도 했다.
그만큼 남한산성은 임금과 병사들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까지도 먹고 자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야말로 우리네 어머니의 포근하고 넉넉한 가슴과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공간들은 그런 넉넉함을 빼앗아 가고 있다. 그저 부드러운 곡선과는 다른 날카로운 직선만 가득하고, 조화와는 다른 배척만 난무하고, 성안과 성 밖을 잇는 수로 같은 것은 좀체 생각할 수 없는 형국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는 가슴 답답한 일을 만나기가 쉽다. 이러한 때에 가슴이 뻥 뚫리고 속이 따뜻해지는 남한산성에 올라보라. 이곳에 오르면 성벽 속에 빼곡히 들어차 있는 꾸밈과 빠름의 깊은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 오르면 성 안팎 사방으로 뻗어 있는 생명의 물줄기를 고이 길어 올릴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어머니의 따뜻하고 포근한 가슴처럼 생명의 온기를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