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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진짜 베트남 쌀국수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값이 비싸요?"
"우리나라에선 쌀국수도 수입 식품이니까 그렇지"
"베트남에서 파는 쌀국수는 기껏해야 500원도 안하는데 맛은 더 좋았잖아? 난 우리 아줌마(우리 집에서 일해주던 메이드)가 해주던 게 제일 맛있었는데…."


갑자기 나도, 딸아이도 한 식구처럼 정들었던 베트남 아줌마가 보고 싶어졌다.

나라 전체가 빚더미에 올라앉아 금방이라도 망할 것만 같아 우울했던 IMF금융대란 이듬해인 1999년, 대기업에 다니던 남편은 먼저 손들고 베트남 파견근무를 나갔다. 나라가 어려우니 서민들의 허리는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이들 영어라도 확실히 익히게 하고 부채도 청산하고 돌아오자는 비장한 결단으로 나간 베트남에서 5년이란 세월을 보내고 왔다.

베트남을 떠올리게 한 쌀국수

베트남에서 인터내셔널 스쿨(International School)다니며 영어를 국어보다 더 친밀하게 접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아이들과 어울리며 건강하고 편견없이 자라던 우리 아이들도 어느새 입시지옥이라 불리는 한국교육 현실에 끌려 다니며 살고 있다. 중1인 딸아이는 자기 자신이 '공부벌레'처럼 사는 인생이 너무나 싫다고 절규하곤 했다.

누군가 요즘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중학생'이라고 답했다는 말을 듣고 쓴웃음이 나왔다. 그나마 자유로웠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직은 수능에만 매달려 기계적인 삶을 살아가는 고등학교 선배들처럼 되기 싫어 반항을 거듭하는 때가 바로 중학생 아이들이다. 실로 내 아이나, 남의 아이 할 것 없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용수철 달린 시한폭탄을 바라보고 사는 기분이랄까?

부모의 간섭과 잔소리에 진절머리를 내면서 친구보다도 못한 존재로 부모를 대할 때, 어엿한 인격체라고 주장하면서 도덕 시간에 배운 단어들을 주워섬길 때, 유행은 다 따라가야 하고 자존심 상하는 짓은 죽어도 못하겠다고 버티며 속을 뒤집어 놓을 때는 차라리 기숙사 딸린 학교에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우리도 사춘기를 겪으며 부모의 속을 썩였겠지만, 순종이든 굴종이든 기본적으로 낮은 자세는 취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요즘 10대들의 사고는 맹목적인 순종이나 인정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이라는데 의견일치를 보는 듯 하다. 그 대상이 부모든, 선생님이든 예외는 없다. 일명 그들의 은어로 '찌질이'들이나 하는 짓이 바로 자기 생각이나 주장도 펴지 못하고 질질 끌려 다니는 것이라니, 자식을 잘못 키웠다고 내 발등을 찍어야 하는지 사회의 모순과 잘못된 교육현실을 탓해야 하는지 답답하기만 할 뿐이다.

우리 모녀는 특히 서로 닮은 점이 많아 한번씩 논쟁이 붙고 나면 둘다 거의 탈진에 이른다. 윽박지르거나 권위로 눌러서 아이들을 키우는 데 동의하지 않는 나로서는 끝까지 말로 아이를 설득시키려 애쓴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언성이 높아지고 서로의 약점과 자존심까지 건드리는 치졸한 싸움으로 파국을 맞곤 한다. 이 애증의 세월이 언제쯤이나 평화의 시간으로 바뀔 수 있을까.

인간적이고 따뜻한 교우관계와 사제관계를 기대할 수 없는 학교 생활과 또다시 이어지는 학원에서의 지루한 반복학습이 아이를 신경질적이고 부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는지도 모른다. 자아를 느끼는 감수성은 더욱 예민해지고 인격에 대한 주관이 점점 견고해지는 나이에 강요된 삶만 반복될 뿐 숨통을 틔우고 개성을 발산할 공간과 시간은 거의 없는 그들의 삶이 안쓰럽고 측은한 것이 사실이다.

외국까지 나가 살면서 익혀 온 영어실력이 아까워 영어뮤지컬 극단에 딸아이를 가입시킨 지 2년이 다 되간다. 자기 표현에 강하고 성취욕도 강한 아이여서 동기부여를 하기에는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문법위주의 한국식 영어교육은 나도 염증이 난다. 다행히 학업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매주 주말을 이용해서 연습을 하고 방학 때만 합숙훈련을 해서 아이의 꿈도 키워주고 학업에도 정진할 수 있는 담보(?)도 확보해 놓은 일석이조라고 생각했다.

딸 아이의 소중한 추억

쌀국수가 먹고 싶다는 딸아이의 말에 일요일 연습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 대학로에 있는 베트남 쌀국수집에 갔다. 어쩌겠는가? 주체할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변화에 속수무책으로 날카로워진 아이의 비위를 맞춰가며 자식과의 소통과 끈을 놓지 않으려면 내가 노력할 수밖에 없다. 중학교에 들어가면 아이로부터 좀더 자유로워지려 했던 나의 오산을 인정하고 아직은 따뜻한 엄마의 품을 무기로 관계를 견고히 하는 쪽으로 작전을 변경한 것이다.

쌀국수 한 그릇에 7000원이나 한다며 타박을 놓던 딸아이는 맛도 베트남에서 먹던 맛이 아니란다. 나는 오히려 한국인 식성에 맞춘 국물맛이 더 좋기만 하던데. 딸아이는 우리 집에서 5년 내내 함께 지낸 메이드 아줌마가 해준 정통 쌀국수가 그리웠던가 보다.

직접 시장에서 잡아온 닭고기를 쪽쪽 찢어서 그만의 노하우로 국물을 우려내고 특유의 향내가 코를 찌르는 야채는 뺀 채 우리 입맛에 딱 맞는 쌀국수를 자주 만들어 주었던 베트남 아줌마의 손맛이 그리웠던 것이다. 유난히 아이들을 좋아하고 정도 많았던 그 아줌마를 딸아이는 남처럼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일주일에 세 시간씩이나 체육을 하고 1시간이나 되는 점심 시간 동안 느긋하게 밥을 먹고 친구들과 뛰어놀던 기억, 좋아하는 그림도 그리고 수영도 하고 친구들 생일파티에 가서 밤을 새워 수다를 떨던 그 시절이 딸아이의 소중한 추억속에 살아 있는 것이다.

공부 잘하는 것보다 운동 잘하고 사교성이 뛰어나야 '짱'이 될 수 있었던 그곳에서 딸아이는 마음껏 꿈을 키워나가는 건강하고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아이였다.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했으면 하는 바람과 아쉬움, 미안함이 가슴 속을 먹먹하게 한다. 그날 나는 필요 이상 과식하며 딸아이가 남긴 쌀국수까지 먹느라 밤늦도록 소화가 안 된 위를 끌어안고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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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이모작을 솔향 가득한 강릉에서 펼치고 있는 자유기고가이자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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