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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극단의 야심작 <태> 연습장면. 박팽년 며느리(김마리아)의 절규
ⓒ 김기
가을이면 누구나가 한번쯤은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한적한 공원벤치에 앉아 우수를 즐길 법도 하다. 그러나 직접적인 개인사적 반추는 단지 고통일 뿐 즐길 대상은 되지 못한다. 그럴 때 적절하게 동원되는 것이 비극의 간접체험이다. 가을이나 겨울이면 철새처럼 찾아오는 멜로영화가 바로 그것을 노리는 것이다.

국립극단이 오는 10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올리는 <태>(胎)는 멜로를 넘어 처절한 비극을 담고 있다. 극 속에 담긴 것은 죽임과 고통이 대부분이다. 고통과 분노의 절규 속에 담긴 것은 그러나 슬픔을 넘어선 인간 생명을 향한 진지한 천착이다.

길을 잘못 들어서면 자칫 비극보다는 잔혹극이 될 수도 있는 작품이다. 세조가 단종을 폐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 즉 쿠데타를 다루고 있으니 거기에 필연적으로 수많은 죽음의 비명이 담길 것은 뻔하기 때문이다.

▲ 세조를 속이기 위해 박팽년 며느리와 시할아버지는 종친살해의 길을 택한다.
ⓒ 김기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오태석표 단종이야기 <태>는 잔혹한 면도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없지 않지만 그것보다는 눈물 자아내는 비극의 형식에서 자세를 갖췄다. 비극은 무대와 객석의 은밀한 거래이다. 그 거래는 무대 속에 벌어지는 일들이 아무리 엄청나다 해도 절대로 무대 끝을 한 발짝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단지 '대리체험'의 약속을 전제로 배우와 관객은 극한의 정서를 향해 치닫게 된다. 그러나 걱정은 없다. 그것은 단지 연극이라는 보험에 가입된 것이다. 그 보험은 심리적으로 관객에게 자기 삶의 기회비용을 만족케 하는 기능을 보너스로 선사한다.

<태>가 갖추고 있는 비극의 요소는 얄미울 정도로 치밀하다. 화장실 줄서기를 하다가도 한 자리만 뒤로 밀려도 억울한 법인데, 만인지상의 자리인 왕권을 빼앗기는 더 이상 아까울 수 없는 큰 조건이 있다. 거기다가 작가 오태석의 역사적 상상력 혹은 역사인식을 통해서 소위 정사(正史)에 기록되지 않은 사건들이 조밀하게 엮인다.

▲ 손부의 출산 그리고 곧바로 이어지는 영아살해
ⓒ 김기
박팽년의 대를 잇기 위해 종의 아들과 바꿔치기를 계획하고, 그것을 성공키 위해 박팽년의 며느리는 시할아버지를 세조 눈 앞에서 살해한다. 얼핏 과거에 있을 법한 충직한 종의 이야기 같지만 기실 그 속에는 작가의 역사비판이 숨겨져 있다. 체제에 길들여진 종의 행위에는 보이지 않는 강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태> 속에서는 단종도 결코 동정 받아 마땅한 피해자로서가 아니라 세조나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그려지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단종의 극 중 대사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사육신 어른들께선 거사를 작정하였거든 행사할 일이지 대사를 지체하여 나를 이 꼴로 만들어?(사육신들을 칼로 벤다)"

어떤 부분에서는 세조보다 더 패륜적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오히려 세조가 단종에 비해 유약하고 우유부단하게 그려진다. 우리가 알고 있는 두 인물을 거의 바꾼 것이나 진배없다. 그런 세조를 부추기는 사람은 오히려 신숙주로 그려진다.

세조의 마지막 대사도 의미심장하다. "나를 죽은 자들의 군주이게 하소서!"

▲ 상전의 대를 잇기 위해 자진해서 자기 자식을 죽인 종 부부. 이로 인해 실성한 종의 처(남유선)가 박팽년의 손자에게 젖을 먹이고 이를 지켜보는 남편(김종구)은 웃음인지, 통곡인지 분간못하게 웃는다. 다른 색깔의 웃음이긴 하지만 영화25시의 엔딩이 떠오르는...
ⓒ 김기
이 작품이 초연된 때가 1974년인 것을 감안한다면 역사 속 왕권투쟁을 통해 독재권력에 대해 삿대질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오태석은 <태>를 통해 권력자들에 불신의 이유를 주장하는 것 같다. 그러나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진정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권력투쟁이 아니라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존엄한 인간의 생명에 대한 것이다.

국립극단의 연습실을 찾았다. 연극이 워낙 영화나 TV드라마보다 더 치열한 상상을 요구하는 것이지만, 연습실에서의 관람은 대사와 배우의 동작만으로 세트, 조명, 음향 등의 무대환경을 알아서 그려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연출과 배우들과의 주고받는 이야기들을 통해 극장에서는 모르고 지나갈 일들을 들을 수 있는 이점도 있다.

올해 국립극단의 <태>는 2000년 공연 때와 다르다. 그리고 개인적인 판단이지만 더 재미있어졌다. 특이할 점은 지난 국립극단 작품인 <우리읍내>에 이어 연구단원인 김마리아의 주역급 발탁이다.

▲ 우여곡절 끝에 종은 세조에게 자신이 왕명을 어기고 박팽년의 손자를 살렸음을 고백하고 자결한다. 세조는 이 아이는 살리기로 하면서 지난 모든 일에 진저리친다.
ⓒ 김기
김마리아는 극중 손부 즉 박팽년의 며느리로 나와 시할아버지를 죽이고, 자기 아들을 살리기 위해 종의 아들을 죽이고는 자살하는 역을 소화해낸다. 등장하는 시간을 따지자면 딱히 주역이라고 하기는 조금 여의치 않지만 주제를 끌어내는 핵심 모티브를 신인에게 말긴 것이 눈길을 끈다. 오태석 감독에게 김마리아의 연기에 만족하냐고 묻자 대답은 않고 부처님인 양 슬그머니 웃고만 만다. 관객이 평가할 문제일 듯.

전반적으로 극은 세조(수양대군)와 단종이 끌어가는 이야기와 손부와 종 부부의 이야기 두 흐름을 발견할 수 있다. 손부와 종부의 비상식적 대리죽음 문제는 관객으로 하여금 가장 큰 비애를 겪게 함으로써 권력투쟁의 비인간적 패륜을 간접적으로 비난한다.

종부의 아내(남유선 분)가 그로 인해 실성하게 되고, 손부의 아들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은 연습임에도 불구하고 짙은 아픔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특히 실성한 채 '창지야, 창지야'하며 자기 아들 이름을 부르며 헤매는 장면은 뇌리에 오래 남을 듯하다.

▲ 오태석. 국립극단 예술감독이자 <태>의 작가.연출
ⓒ 김기
오태석 감독의 연출현장은 섬세하고 친절해 보였다. 필요한 음향효과를 위해 직접 징을 치기도 하고, 연구단원이 깜빡 자기순서를 잊은 듯하자 잽싸게 몸을 날려 연습 흐름을 이어가게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맘에 들지 않은 장면에서는 몇 번씩 연습을 끊고 여러 차례 반복하기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전제는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다기보다는 관객에게 정확하게 전달해야 한다는 배우로서 외면할 수 없는 이유를 내세웠다.

공연을 열흘 남짓 남긴 국립극단 연습실 분위기는 매우 뜨거웠다. 수양대군보다 더 포악하게 등장하는 단종 역의 서상원, 자기 의지보다는 시류에 얹혀진 듯 우유부단한 세조 역의 김재건, 신숙주 역을 맡은 우리연극사의 산증인 장민호 선생, 자기 자식을 상전을 위해 죽음에 바치는 종 역의 김종구, 그로 인해 실성한 그의 처 역에 남유선 그리고 박팽년 며느리로 등장하는 김마리아 등을 눈여겨 보면 <태>를 잘 볼 수 있을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일  시 : 2006년 11월 10일(금) ~ 11월 19일(일)  
         평일 오후 7:30, 토 오후 4:00, 7:30, 공휴일/일 오후 4:00
           (월요일 공연 없음)
◈ 장  소 :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 관람료 : 으뜸 3만원, 버금 2만원   ♥사랑티켓 참가작
◈ 예매 및 문의 : 02-2280-4115~6 (국립극장 고객지원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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