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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란 쿤데라의 <느림>
밀란 쿤데라의 <느림> ⓒ 민음사
어느 날 뜬금없이 국가의 정보를 총책임지는 수장이 수사 중인 사건에 자신의 소신(?)을 덧붙혀 ‘간첩단 사건’이라 예단하면서 온 나라가 불신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다. 옳고 그름이야 공정한 수사를 하면 밝혀지겠지만 이미 가이드라인을 수장이 제시한 이 시점에 과연 공정성이란 게 담보가 될 수 있을지 매우 의문이 든다.

그렇게 확신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벗기면 벗길수록 더 의문만 증폭되고 논란만 가중되고 있으니 말이다. 명확하지도 않고 실체가 모호한 사건을 일단 터뜨리고 보자는 식으로 섣불리 발표했다면 이 사회적 불신과 논란의 소모전은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래서일까? 오래전에 읽은 책 밀란 쿤데라의 <느림>이 스쳐지나갔다. 쿤데라는 <느림>에서 정치가를 춤꾼에 비유한다. 그런데 춤꾼과 정치가가 같으면서도 확연히 다른 부분은 무대를 통해서 정치가는 권력을 갈구하지만 춤꾼은 명예를 갈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춤꾼은 조작과 음모, 그리고 폭로가 만연한 정치판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승규 국정원장을 선비같이 곧은 사람이라고 평들을 많이 하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명예를 소중히 여길 터인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서둘러 설익은 것을 터뜨린 것일까?

아마도 현대문명의 질을 평가하는 바로미터인 ‘속도’에 무의식적으로 동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 IT산업은 분초를 놓고 싸운다. ‘좀 더 빨리’라는 광고카피는 이젠 고전이다. ‘스피드’에서 ‘초고속’, 그것도 성에 차지 않는지 이젠 ‘초 광속’이란다.

여기에 우리의 감정과 촉감까지도 이 ‘속도’에 몸을 실고 있다. 물론, 느림보다야 빠름이 여러모로 실용성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빠름, 속도를 통해 만족을 얻으려면 한 가지 망각해서는 안 되는 게 있다. 하나마나 한 얘기이지만 ‘과정의 충실’이다.

목적을 얻기 위한 그 과정에서 ‘속도’에만 집착하게 되면 ‘과정’을 무시하고 결과에만 급급해 조작이나 부실한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부실’이나 ‘조작’이 과거에 비해 더 많이 나타나는 것도 다름 아닌 ‘속도’의 지배를 받는 현대문명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느림’에 대한 성찰 또는 그것을 예찬하는 ‘느림의 미학’이 광적인 속도의 안티로서 등장하기도 했지만 광속에 몸을 맡긴 현대인들을 붙잡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 같다.

밀란 쿤데라의 <느림> 또한 10여년 전에 번역 출판되었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 홍역을 치른 탓도 있겠지만 아직 속도의 지배를 논하기에는 우리사회가 너무 느렸는지, 화제가 되지는 못했다.

그런데 지금 새삼스럽게 다시 꺼낸 것은 비로소 지금 이 책의 효용성이 절실하지 않을까 해서다. 쿤데라는 <느림>의 제목처럼 ‘속도’에 맹목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질주하는 현대인들을 향해 때론 진지하게 때론 농담처럼, 냉온탕을 오고가며 비판을 하고 있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서 거북이가 승리한 것이 토끼의 게으름 때문만은 아니다. 토끼는 ‘느림’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느림’은 절대 ‘속도’를 이길 수 없다는 자만, 이게 토끼의 패배의 원인이다.

토끼의 진단은 정확했다. 맞다. 느림은 절대 빠름을 이길 수 없다. 그런데도 ‘속도’가 느림에 패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과정에 불성실’했기 때문이다. 무조건 광속으로 달린다고 ‘삐른’결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빨리 달리면서도 전후좌우를 면밀히 살피면서 달려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리 광속의 빠름이라도 바이러스와 시스템의 에러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것이다. 그래서 느린 거북이가 그 틈새를 이용, 승리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속도’에 몸을 맡기는 것은 다름 아닌 ‘빨리’ 쾌락을 맛보기 위함이라는 게 쿤데라의 지적이다.

그는 미국여인의 입을 빌려, 그녀에게 성교의 목적은 오직 오르가슴의 충족이며, 그 과정의 즐거움보다는 오직 그것만을 얻기 위해 ‘빨리’ 목적지에 당도하고자 한다며 그것이 미국의 실용적인 사고방식의 단면이라고 비꼰다.

그런 점에서 쿤데라에게 ‘속도’는 형벌인 것 같다. 왜나면 “두려움은 미래의 원천”인데 속도에 자신을 거는 사람은 두려움이 없으니, 그에게 미래 또한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속도’의 숭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그것은 ‘느림’이다. 어떤? 쿤데라는 진지함과 여유, 그리고 유머에서 그 대안을 찾는다. 그는 에피쿠르스의 제자라고 소개하는 퐁트벵과 그의 제자 벵상의 입을 통해서 ‘느림’의 즐거움을 보여준다.

퐁트벵과 벵상은 카페에서 ‘소말리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있었다. 그 때 그들의 자리에 한 여인이 합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여인이 합석을 했음에도 벵상은 진지한 토론을 계속 이어가려고 한다.

그때 퐁트벵은 벵상과 그 여인을 바라보며 엉뚱하게 이런 얘기를 한다.

“나의 여자 친구는 언제나 내가 거칠게 대해 주길 원한다오... 하지만 난 그럴수가 없다오! 난 거칠지 않으니까! 난 너무 섬세하니까!... 가끔씩 젊은 여자 타자수가 내 집으로 옵니다. 어느 날 타자를 하는 동안, 별안간, 선의에서, 나는 그녀의 머리채를 잡아채어 의자에서 일으켜 세우고는 침대 쪽으로 그녀를 이끌었다오. 그러다 도중에 나는 폭소를 터뜨리며 그녀를 놓아줍니다. 오, 이런 대 실수를. 내가 거칠게 대해 주길 원한 사람은 당신이 아닌데. 오, 날 용서하시오 아가씨!”

그 카페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박장대소를 한다. 어느 누구도 퐁트벵 같은 지성인이 그런 삼류유머를 얘기 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거기다가 국제정세와 세계를 놓고 진지하게 토론을 하고 자리에서 말이다. 이게 느림의 여유이다.

북핵으로 국외는 물론 국내가 온통 무거움과 진지함으로 숨이 막혀 있는 시점에 퐁트벵 같은 농담이 필요했었다. 그것은 미래를 생각하는 사람만이 성찰할 수 있는 지혜이며, 진정한 춤꾼만이 그런 춤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런데 뜬금없이 ‘간첩단 사건’을 들고 나온 춤꾼, 정보기관의 수장이 무대에서 명예를 걸고 춤을 추고 있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진정성마저 의심이 들게 한다. 정말, 미래를 생각하고 춤을 추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는 두려울 게 없다, 두려움의 원천은 미래에 있고 미래로부터 해방된 자는 아무것도 겁날 게 없는 까닭이다.”

느림

밀란 쿤데라 지음, 김병욱 옮김, 민음사(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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