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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산업스파이 전쟁, 21세기 전쟁의 완결판

최근 국정감사에서 한나라당 일부 의원들은 고정간첩 혐의로 구속돼 수사를 받고 있는 장민호씨가 국가기관의 핵심 보안기술을 북한으로 빼돌렸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장씨가 '간첩' 외에 일종의 '산업스파이' 역할을 수행했다는 주장이다.

이 사건의 진위 여부는 검찰 수사 이후 밝혀지겠지만 우리 기업들의 허술한 보안 체계를 다시 한 번 드러내 보였다는 점에서 적잖은 충격을 주고 있다.

이같은 보안상의 허점은 산업스파이에게 고스란히 노출돼 기술 유출을 부른다. 특히 해외로의 기술 유출은 곧 국가 경쟁력의 저하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이 크다.

최근 열린우리당 노현송 의원이 공개한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3년부터 올해 9월 말 현재 기술 유출을 시도하다 적발된 건은 81건. 2003년 6건에 불과한 적발 건수는 2004년 26건, 2005년 29건, 올해는 9월까지 20건으로 지속적인 증가 추세에 있다.

이 기간 동안 추정 손실액만 91조8000억원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산업스파이 전쟁에서의 상처가 얼마만큼 큰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산업스파이 전쟁. 총칼을 앞세운 전투병은 없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 구석구석에서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 총성 없는 전쟁이야말로 21세기 새로운 전쟁 유형의 완결판이다.

<오마이뉴스>는 산업스파이 활동을 하다 적발된 전직 대기업 연구원과 총성 없는 전쟁에 투입돼 산업스파이 색출에 나서는 국가정보원 관계자를 만나봤다. 그들을 통해 국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산업스파이 전쟁의 단면을 들여다봤다.

K씨를 포함한 3명은 금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회사가 100억원을 들여 개발한 PDP 기술도면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진은 산업스파이의 기술유출 유형.
K씨를 포함한 3명은 금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회사가 100억원을 들여 개발한 PDP 기술도면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사진은 산업스파이의 기술유출 유형. ⓒ 국가정보원 제공

어느날 갑자기 날아온 경쟁사의 스카우트 제의

지난달 30일 밤 10시 서울 지하철 2호선 낙성대역 부근의 한 입시학원 앞. 대입수학능력시험을 앞두고 밤늦게까지 강의를 듣고 쏟아져 나오는 수험생들 틈바구니로 K씨(41)가 어깨를 잔뜩 웅크린 채 나타났다. 3년 전까지 대기업 전자회사 연구원이었던 K씨는 지금 후배가 운영하는 소형 입시학원의 강사로 일하고 있다.

K씨는 몇년 전 같은 회사 후배 2명과 함께 추정 손실 수조원대의 첨단 기술을 대만 기업에 유출하려다 적발돼 1년간 감옥생활을 했다. 이날 밤 K씨의 후배 나모(37)씨와 함께 학원 앞 포장마차에서 그를 만났다.

K씨는 술잔을 기울이며 당시의 절망과 회한의 기억들을 담담하게 더듬어 나갔다.

"중국이나 대만으로 가면 연봉 2억원은 거뜬히 받는다. 또 그곳에서 실력을 발휘하면 미국의 일류 기업으로도 갈 수 있다."

모 대기업 전자회사의 7년차 연구원이었던 K씨에게 어느날 브로커가 접근했다. 2003년 가을 무렵이었다. 당시는 IT(정보기술) 부분에서 국내 연구원들의 기술력이 세계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하던 때. 이 분야의 웬만한 연구원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브로커의 접근을 직간접적으로 받았다.

K씨의 당시 연봉은 4000만원 남짓이었다. 이왕 똑같이 고생하는 거 좀 더 많은 돈을 주는 곳에서 일하는 게 낫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K씨의 마음이 움직였다. K씨는 평소 친하게 알고 지내던 후배 2명도 끌어들였다. 그들은 대만으로 가서 구체적인 입사조건을 알아봤고, 결국 회사를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산업스파이가 될 줄 꿈에도 몰랐어요"

"처음에는 제가 산업스파이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입사할 당시 경쟁업체로의 전직을 금지하는 약정을 회사와 맺긴 했지만, 특별히 기술을 훔쳐 가져가지 않는 이상 이직을 해도 법적으로는 문제될 게 없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브로커의 이 같은 제안에는 으레 조건이 붙게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K씨를 대만의 T회사에 소개해 준 브로커는 그에게 "빈 손으로 와서는 안 된다"며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연봉을 많이 주는 대신 '기술' 하나쯤을 손에 들고 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전 직장에서 얻은 기술을 바탕으로 사실상 산업스파이 역할을 하라는 제안이었다.

"무엇에 씌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넉넉하지는 못했어도 당시 월급으로 남들 못지않게 살았었는데 왜 그랬나 모르겠어요. 한 번 옮기겠다고 맘을 먹고 나니까 모든 게 그쪽으로만 움직여졌어요. 돌이켜보면 사람 욕망이란 게 참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요."

결국 K씨를 포함한 3명은 금전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회사가 100억원을 들여 개발한 첨단 PDP 제조공법 기술도면을 제공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이들이 옮기기로 한 대만의 T사는 이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PDP제품 생산 공장 건설을 추진할 계획이었다.

검거 후 약혼 파경... 후배 운영 사설 학원 등 전전

3년 전까지 대기업 전자회사 연구원이었던 K씨는 지금 후배가 운영하는 소형 입시학원의 강사로 일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강남의 학원가.
3년 전까지 대기업 전자회사 연구원이었던 K씨는 지금 후배가 운영하는 소형 입시학원의 강사로 일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 강남의 학원가. ⓒ 연합뉴스 한상균
하지만 K씨의 기술 유출 기도는 그가 회사를 그만두고 불과 며칠 만에 들통이 났다. 기술도면이 담긴 가방을 들고 K씨가 인천공항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출국장에서 덜미를 잡힌 것. K씨는 검거 이후 '부정경쟁 방지 및 영업비밀 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았다.

이 일로 인해 K씨는 결혼을 약속한 약혼자와도 파경에 이르렀다. 무엇보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이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다는 점이다.

"사건이 터지고 1년 정도는 약혼자도 제 편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이라면 몰라도 그녀만큼은 저를 용서하고 이해해 줬으니까요. 1년 쯤 지나자 그 마음도 차츰 시들더군요. 그렇다고 그녀를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아요. 그래도 가장 힘들었을 1년 동안은 제 옆에서 저를 보살펴 줬으니까요. 전부 제 탓이죠."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집행유예로 풀려나오기 까지 피고인 신분인 K씨는 어느 곳에도 취직하지 못했다. 물론 앞으로도 관련 업계에 종사하지 못한다. 대학 1학년부터 박사과정까지 10년 넘게 몰두해온 연구도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어졌다.

현재 K씨는 후배가 운영하는 입시학원에서 과학 과목을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 K씨와 함께 사건에 연루됐던 후배 2명은 K씨보다 먼저 풀려났지만 관련 업계에 발을 들여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기술유출사범으로 낙인 찍힌다는 것은 사실상 관련 업계에서의 사형선고와 다름없다. K씨는 자신 때문에 후배 인생까지 망치게 한 것 같아 더 마음이 무겁다.

"이공계 홀대 풍토 사라져야 산업스파이 근절될 것"

ⓒ 오마이뉴스 성주영
그렇다면 K씨가 위험을 무릅쓰고 '범죄의 늪'으로 빠져들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K씨는 자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면서도 그 배경에 대해서는 거침없이 의견을 쏟아냈다.

K씨는 명문대 전자공학과 출신이었다. 관련 학과 석·박사를 마치고 97년 대기업 전자회사 연구원으로 입사했다. 당시 K씨가 받은 연봉은 3000만원이었다. 당시가 외환위기 시절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그리 적은 액수는 아니지만 K씨가 투자한 시간을 고려할 경우 그에 걸맞은 보상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는 게 K씨의 주장이다.

"당시 금융권을 비롯한 인문계 출신 대학졸업자의 연봉도 3000만원 남짓이었어요. 저희는 그들보다 짧게는 3년, 길게는 7년을 더 공부했는데 그들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고 하니 상대적 박탈감이 들었던 게 사실이죠."

실제 대부분의 산업스파이는 금전적 동기에 의해 범행을 저지른다. 국정원이 지난 2003년부터 올해 9월 말까지 총 81건의 해외 기술유출 사건을 적발 분석한 결과, 유출 동기 가운데 70%(57건)가 금전유혹·개인영리 등 돈과 관련됐다. 이는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못마땅하게 여긴 연구원들이 쉽게 한눈을 팔 수 있었음을 엿보게 해주는 대목이다.

K씨는 돈도 돈이었지만 무엇보다 이공계 출신을 홀대하는 회사 풍토가 더 맘에 들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주로 비이공계 출신 인력에 의해 조직 내 의사결정권이 독점되다보니 이공계 출신은 늘 뒷전이었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평생직장 개념도 사라진 상황에서 연구원들에 대한 대우가 계속 열악해진다면 회사의 핵심기술을 빼돌려 이직을 하거나 일확천금을 얻으려는 이들이 더 늘 것입니다. 산업스파이 운운하기 전에 연구원들 의식 속에 깔려 있는 상대적 박탈감부터 없애는 방법을 연구해야 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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