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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북천 가는 길
하동 북천 가는 길 ⓒ 이명주
코스모스 꽃길
코스모스 꽃길 ⓒ 이명주
사계절, 저마다 그 멋이 있고 자연만물이 소생함에 제 역할을 충실 한다지만 그래도 그 중에 가을이 가장 좋은 것은 그 기운이 참으로 온화하고 여유롭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그것을 시작케 하는 것인지 가늠할 길 없으나 괜스레 동요하는 마음이 가장 먼저 가을을 알립니다. 그리고는 모든 것이 순식간이지요!

제 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마음이 끝내 몸을 일으켜 길 위에 나섰습니다. 이미 시작된 사랑을 두고 수줍고 두려워 피하려는 마음처럼 한동안 망설이던 길을 나서고 보니 괜한 자책마저 듭니다.

'이리 아름다운 것을….'

술 취한 외삼촌의 넋두리 속에, 강가 작은 흙집에 노모를 모시며 산다 했던 순한 시인의 고향인 하동 섬진강가를 지나고 있습니다. 그가 바로 시골 작은 분교의 선생이자 자연과 어울려 사는 삶을 노래하고 있는 시인 김용택입니다. 수채화 화첩 속을 걷는 듯 황홀한 가을길 위에서 시인이 로댕의 말을 빌려 자신을 사랑하고, 감동하고, 희구하고, 전율케 한 시를 모아 엮은 시집 <시가 내게로 왔다>를 읽고 또 읽습니다.

나무에 깃들어

시인 정현종

'나무들은
난 대로가 그냥 집 한 채.
새들이나 벌레들만이 거기
깃들인다고 사람들은 생각하면서
까맣게 모른다 자기들이 실은
얼마나 나무에 깃들여 사는지를!'


자연 닮은 것을 우습게 여기며 업신여기는 세상이라지만 이 세상 어디서 나무 한 그루와 닮은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 한 생애 순종의 미학과 넉넉한 인품을 배워보려 한들 한평생이 부족하지 싶습니다. 이제 막 고별을 앞두고 성대한 잔치를 벌이려는, 고운 색 물들어가는 나무를 바라보며 '저도 목(木)님처럼 이 세상 고이 살다 고이 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빌어봅니다.

어머니 품과 같은 시골 마을
어머니 품과 같은 시골 마을 ⓒ 이명주
하동 토지문학제 허수아비 길목
하동 토지문학제 허수아비 길목 ⓒ 이명주
궁금한 일 - 박수근의 그림에서
시인 장석남

'그가 가지고 갔을 가난이며 그리움 같은 것은 다 무엇이 되어 오는지…… 저녁이 되어 오는지…… 가을이 되어 오는지…… 궁금한 일들은 다 슬픈 일들입니다.'


머리에 하얀 서리 내리고 등이 굽은 외할머니는 몇 해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 살아생전 홀로이 시골집을 지키던 할머니는 지금은 어디서 어떻게 지내실 런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 없는 삶과 죽음의 이치 앞에서 궁금한 일들은 정말이지 다 슬픈 일들입니다. 가을 저녁 무렵 세상이 이리 아름다운 것은 조용히 살다간 모든 숭고한 생명의 징표인가요?

수선화에게
시인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외로워마라가 아니라 울지마라고 합니다. 외롭다 한들 너무 서글퍼말라는 것인 듯합니다. 나오는 울음을 참으면 급기야 터지고 맙니다. 사람 사는 일이 눈물 흐르고 마르는 일의 연속이니 중요한 것은 무엇을 위해 울고 누구의 눈물을 닦아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자화상
시인 신현림

'울음 끝에서 슬픔은 무너지고 길이 보인다
울음은 사람이 만드는 아주 작은 창문인 것'


그러니 울고 싶거든 실컷 울게 놓아두면 될 것입니다.

자식들 오기만을 기다리는 노모
자식들 오기만을 기다리는 노모 ⓒ 이명주
그림 같은 풍경
그림 같은 풍경 ⓒ 이명주
엄마
시인 정채봉

'꽃은 피었다
말없이 지는데
솔바람은 불었다가
간간이 끊어지는데

맨발로 살며시
운주사 산등성이에 누워 계시는
와불님의 팔을 베고
겨드랑이에 누어
푸른 하늘을 바라본다

엄마…'


내 엄마는 내게 '니는 엄마 있어 좋겠다. 나는 울엄마 보고 싶어죽겠는데' 하시면 철없는 나를 보셨습니다. 엄마 있는 게 세상 가장 큰 유세라 사는 게 서럽다한들 엄마 품에 안겨 있으면 나 때린 못된 것들 다 혼내준 듯 든든하고 뿌듯해졌습니다. 이 시를 읽고 있으니 집에 가면 반겨줄 엄마가 있는데도 눈물이 납니다. 내게도 이리 그리운 엄마를 시인은 오죽 그리웠으면 운주사 와불님 팔을 베고 '엄마…' 했겠습니까!

책 한권 동무 삼아 외로운 길 걷고 걷다보면 이만한 벗이 또 있겠나 싶어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그리고 절절한 심경으로 나 대신 노래해준 모든 글 쓴 이에게도 고맙고 또 고맙습니다.

시인 김용택의 저서

시집으로 <섬진강>, <맑은 날>, <누이야 날이 저문다>, <그리운 꽃편지>, <강같은 세월>, <그 여자네 집>, <그대, 거침없는 사랑> 등산문집 <작은 마을>, <그리운 것들은 산 뒤에 있다>, <섬진강 이야기>,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등.

장편동화 <옥이야 진메야>, 동시집 <콩, 너는 죽었다> 1986년 <맑은날>로 제6회 김수영문학상을, 1997년 제12회 소월시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운암초등학교 마암분교 교사로 재직 중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필진네트워크와 시골아이에도 송고합니다.


시가 내게로 왔다 세트 - 전2권 - MBC 느낌표 선정도서

김용택 지음, 마음산책(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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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보니 삶은 정말 여행과 같네요. 신비롭고 멋진 고양이 친구와 세 계절에 걸쳐 여행을 하고 지금은 다시 일상에서 여정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바닷가 작은 집을 얻어 게스트하우스를 열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멋진 '영감'과 여행자들을 반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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