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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희
ⓒ 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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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엔 집 앞에 종이 칠판을 걸고 아이들과 영어를 공부했다. 두 개 반으로 나눠 지니는 어린 꼬마들에게 알파벳을 가르치고, 나는 소년, 소녀들에게 쉬운 회화를 가르쳤다.

무케시는 D를 언제나 뒤집어서 쓰고, 라다는 알파벳을 외울 때 H를 꼭 빼먹었다. 이 단순한 공부에도 아이들은 열심이었다. 알파벳 반 맨 뒷줄에는 제일 열심인 노인 하나가 앉아 있었다. 비틀비틀 알파벳을 따라 그리며.

그 노인은 까까 할아버지. 둘째 아들 집에서 정신적으로 모자란 막내 '작은 까까'와 살고 있었다. 까까 할아버지는 그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 왕소희
영어하면 떠오르는 할아버지가 또 있다. 그 할아버지는 길가 옆에 있는 집에서 살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늘 집 앞의 그물 침대에서 내리꽂는 땡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무셨다.

그 집에는 무서운 개가 한 마리 있었다. 이 녀석은 우리가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쫓아와서 으르렁거렸다. 그래서 우리는 늘 양손에 돌을 쥐고 다녔다. 역시나 개에게 쫓기고 있던 어느 날, 여느 때와 달리 그물 침대는 비어 있었다.

"저리 가! 저리 가!"

평소처럼 무서운 개는 닿을 듯 말 듯 우리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연극처럼 나무 뒤에서 할아버지가 등장했다. 늘 누워 지내던 할아버지는 우리가 자주 이곳을 지나가는 외국인이라는 것을 실눈을 뜨고 체크하고 있었나 보다. 할아버지는 밤새 연습한 듯한 영어로 물었다.

"후이즈 컨츄리?(Who is country?)"
"예?"


우리가 못 알아듣는 눈치를 보이자 할아버지는 인심을 쓴다는 듯 천천히 다시 말했다.

"후.이.즈. 컨.츄.리."

'천천히 말해도 똑같잖아요!'

"후이즈!!! 컨츄리!!!"

할아버지는 즉각 호통을 치듯 소리를 질렀다.

'아이고……. 소리친다고 알아듣는 게 아니잖아요!'

할아버지는 우리의 멍한 얼굴을 보곤 포기했다는 듯 다음 대사를 읊으셨다.

"아 윌 핼 퓨!(I will help you)"

'내가 너를 도울 것이다'라는 이 말을 할 때 할아버지의 얼굴이 어찌나 진지했던지 우리는 웃을 수도 없었다. 대사를 끝낸 할아버지는 준비해둔 티가 역력히 나는 장대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자기네 개인 검둥이를 정말 무섭게 혼내서 쫓아버리셨다.

그리고 굳이 우리를 마을 어귀까지 바래다주셨다. 왠지 모르게 개보다 할아버지가 더 무섭긴 했지만 마음만은 고마웠다.



정신없는 하루가 지나고 밤이 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한밤중에 일어났다. 배가 아파 잠을 깬 나는 들판 화장실로 갔다. 조금 무서워서 옆에 있는 아이를 깨울까 하다가 미안해서 혼자 들판으로 갔다.

들판에 거의 다다랐을 때 갑자기 기분이 으스스 해졌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 등 뒤로 스쳐가나 싶은 찰나 들개들이 마구 짖으며 달려들었다. 깜짝 놀라 도망치려는데, 이미 때는 늦어 개들은 내가 있는 곳을 덮쳤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개들은 나를 그냥 지나쳐 갔다. 텅 빈 허공만 바라보며 짖어댔다. 그들은 내 눈에는 보이지 않는 뭔가를 쫓아가는 듯했다. 내가 보기엔 분명 아무것도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심장이 쿵쿵거려 잠이 오질 않았다.

"메이, 이 소리 들리니?" 잠을 깬 누군가 물었다.

"으아! 또 뭐!"

조심스레 벽을 향해 귀를 기울였다. 그것은 강물 소리였다.

밤마다 강은 내 집 곁으로 왔다. 강은 원래 집에서 두 시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낮에는 강물 소리가 들리지 않았지만, 밤에는 내 집까지 왔다. '솨아' 하는 물소리를 듣고 있자니 강이 바로 옆에서 흐르는 듯 느껴졌다.

잠이 달아난 나는 양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갑작스런 나의 등장에 내 집에 바짝 귀 기울이고 있던 강물과 나무들, 별들은 성큼 제자리로 돌아가 아닌 척 서 있었다.

나는 진흙 벽에 기대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은하수에서 이름 없는 별까지 모두 고개를 내민 하늘은 하얗게 보일 정도였다. 밤의 적막함 속에 들려오는 강물 소리, 하늘에서 들려오는 별의 숨소리, 우리는 깜박이며 함께 숨을 쉬었다.

나는 쉽사리 밤의 숨소리를 뒤로하지 못하고 별빛 속에 앉아 사람이 아닌 척했다. 인도의 밤은 싱싱했다.

ⓒ 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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