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코스모스
코스모스 ⓒ 안준철
핑계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어느 날 보니 밭 한 가운데 제법 몸통이 커 보이는 뱀 한 마리가 죽은 채 널부러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막대기로 집어다가 밭두렁에 묻고 말았으면 될 일인데 그 사실을 아내에게 고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아내는 밭두렁 어디쯤에 묻었냐고 자꾸만 나를 채근했고, 내가 어디어디쯤에 묻었다고 말하자 그 후로는 밭에 가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밭두렁에서 자라는 키가 큰 풀들을 낫으로 싹둑싹둑 베어내는 것은 내 몫이었다. 부추나 고추가 자라는 남새밭에 다닥다닥 달라붙어 있는 귀찮은 녀석들을 손으로 일일이 뽑아내는 것은 아내 몫이었다. 두어 달 가량이나 그 두 가지 일을 혼자서 하자니 짜증도 났고, 그러다 보니 그랬을 테지만 작고 예쁘고 앙증한 꽃들이 달려 있기도 한 우북한 풀들을 그냥 싹둑 베어내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성경에 나오는 아담과 하와처럼 아내는 뱀을 핑계로, 나는 아내를 핑계로 게으름을 피운 셈이었다. 그 결과는 생각보다 심각했다. 한 주를 걸렀다가 밭에 나가보니 그렇지 않아도 손바닥만한 밭이 잡초가 창궐하고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꽃밭이 되고 난 뒤였던 것이다. 애호박이나 하나 열렸을까 싶어 밭에 갔다가 끝내는 가끔씩 눈인사를 나누는 진짜 농군에게서 한 소리를 듣고 말았다.

“허허, 남새밭이 꽃밭이 돼부렀네!”

고마리
고마리 ⓒ 안준철
악의는 없었지만 비아냥거림이 분명했는데 그렇다고 그분에게 뱀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해서, 나는 무성한 잡풀 속에 숨어 있다가 용케도 내 눈에 띈 애호박 하나를 손에 들고 밭을 나설 생각이었다. 머지않아 찬 서리가 내리면 굳이 손을 대지 않아도 다 스러지고 말리라. 그런 게으른 농부다운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거기에 한 술 더 떠서 내 입에서는 이런 말이 흘러나왔다.

“에라, 이럴 바엔 꽃구경이나 제대로 하고 가자.”

집에서 나와 낮은 산길을 따라 밭을 향하던 길에도 눈부신 가을꽃들이 내 발길을 붙잡았었다. 내려가는 길은 걸음이 더욱 느려터지고 말았는데 어쩌면 그것은 일종의 연중행사 같은 것이기도 했다. 나는 정작 염불에는 뜻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뿌린 대로 거두는 농사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을 뿐. 한껏 땀을 흘리고 나면 망태에 가득 채워지곤 하던 푸성귀들이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식의 나의 성급함을 치유하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쑥부쟁이
쑥부쟁이 ⓒ 안준철
산자락에 자리한 남새밭을 다녀온 날은 시가 한 편씩 써지기도 했었다. 물론 쓰다가 잘 되지 않아 버린 시들이 더 많지만 말이다. 그래도 내 가슴인지 머리인지 시가 스쳐지나간 그 순간은 또한 나를 돌아보는 시간이었으니, 나에게 귀찮은 존재일 뿐이었던 모기와도 화해를 도모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손바닥만한 산자락 밭에 가서
호박 덩굴 조심스레 휘저으며
저녁상에 오를 애호박을 탐하다가
먼저 두어 방 물리다.

약이 오른 풋고추 따서
비닐봉지에 담다가 서너 방 물리고
풀이 절반인 부추 밭에 쪼그려 앉아
부추를 베다가 대여섯 방 더 물리다.

욕실에서 몸을 씻다가 보니
손목 발목 팔꿈치 정강이며
심지어는 엉덩이에 뺨따귀까지
성한 곳이 하나도 없다.

덕분에 저녁상이 푸짐했는데
녀석들도
오늘 저녁상이 꽤나 화려했겠다.

- 자작시, ‘모기에게 물리다’


도라지꽃
도라지꽃 ⓒ 안준철
밭에서 뱀을 발견했던 그날도 나는 뱀을 묻어주기 위해 밭두렁까지 걸어가며 뱀과 화해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었다. 언젠가 내 발등을 스치고 지나간 뱀을 저주했던 기억들도 뱀과 함께 땅에 묻었다. 생시에 본 뱀이 꿈에 수십 배 수백 배로 나타나 나를 괴롭혔으니 뱀을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탓할 일만은 아니지만 그것이 뱀이 작정하여 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요즘은 벌레들이 다 파먹고 구멍이 숭숭 난 이파리들을 보면 서운한 마음보다는 왠지 마음이 뿌듯하다. 가끔은 그 벌레들의 안부가 그립기도 하다.

농약을 치지 않을 바에야
케일 농사는 벌레들과의 싸움이다.
벌레 잡는 일을 하루만 걸러도
숭숭 구멍이 뚫려 성한 데가 없으니
실컷 농사지어 벌레 좋은 일 하는 꼴이다.

처음엔 벌레들을 열심히 잡아 죽였다.
보호색을 띠고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을
엄지와 검지로 짓이겨 죽이기도 하고
돌 위에 놓고 돌로 눌러 죽이기도 하다가
나중엔 흙 속에 깊이 파묻기도 했다.

보드라운 흙 속에 파묻다 보면
더러는 살아나 다시 기어올라
성한 이파리를 죄다 갉아먹지 않을까
그런 걱정도 하면서
그러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하면서.

구멍을 내거나 갉아먹은 흔적도 없이
살찐 이파리가 성성하게 남아있는 날은
횡재한 기분에 마음이 들뜨다가도
입맛을 잃고 아침을 거른 것은 아닌지
가끔은 벌레들의 안부가 그립다.

- 자작시, ‘벌레들의 안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