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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장에서의 모습. 1970년 10월쯤이었을 것 같다. '도깨비 10호 작전'이었던가. 치누크를 타고 정글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진을 찍으면서 어쩌면 내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베트남 전장에서의 모습. 1970년 10월쯤이었을 것 같다. '도깨비 10호 작전'이었던가. 치누크를 타고 정글 지역으로 들어가기 전에 사진을 찍으면서 어쩌면 내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 지요하

고엽제 전우회는 당연히 냉전·수구?

매월 25일은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 태안군지회'의 월례 모임이 있는 날이다. 그 단체에 참여하는 이들이 대부분 나보다 연장인 데다가 묘한 '연민' 같은 것의 작용으로 나는 매번 빠지지 않고 월례 모임에 참석한다.

그런데 월례 모임에 참석할 때마다 묘한 불편함을 감내하곤 한다. 모임 자리에 팽배해 있는 냉전적 수구적 기류 때문이다. 그것을 내가 일찍이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다. 구성원들의 연령으로 보나 무슨 행사 때마다 기꺼이 착용하는 '군복' 관련 속성으로 보나, 그것은 내가 진작부터 훤히 예상하고 또 각오했던 일이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하다. 고엽제전우회는 당연히(!) 냉전적 수구적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식의 분위기마저 감지된다. 고엽제전우회는 아예 처음부터 한국 보수단체들 가운데에 확고하게 자리해 있는 것 같은 인상도 받는다.

반공과 친미, '퍼주기'로 표현되는 대북 지원 반대, 평화통일에 대한 회의와 부정, 노무현 정권 타도 등이 모임 자리에서 쉽게 접하게 되는 주요 갈래다.

나는 그런 기류에 더러 반발을 하지만 별 소용이 없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를 않는 상황에서 요령 부득을 절감하며 그저 한숨만 삼킨다. 때로는 울울창창한 정글 속을 헤매는 기분이기도 하고, 견고한 장벽 앞에 고립 무원으로 앉아 있는 기분이 들기도 한다.

변화한 현실에도 고엽제 전우들은 친미와 숭미뿐

왜 고엽제전우회는 수구냉전, 보수숭미라는 정체성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왜 고엽제전우회는 수구냉전, 보수숭미라는 정체성을 당연히 받아들여야 하는가? ⓒ 오마이뉴스 남소연
고엽제전우회는 현재 미국의 고엽제 제조회사를 상대로 힘겹게 보상 투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노무현 정부는 과거 정부들보다 좀 더 확대된 보훈 정책을 펴고 있다. 보훈처장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시킨 것도 노무현 정부가 한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의 고엽제전우들은 '친미'와 '숭미'를 신주단지로 여기고, '노무현 정권 타도'를 지상 과제로 여기는 듯한 태도다.

지난 8월 서울의 모처에서는 보수단체들의 '전시작전권 환수반대' 집회가 열렸던 모양이다. 그 집회에 '대한민국고엽제전우회'도 참가하면서 산하 지부와 지회들에 인원 할당과 함께 참가 지시를 한 모양이다.

태안군지회에서도 지회장과 사무국장이 그 집회에 참석을 하고 왔다. 그 집회에서 한 보따리 받아온 갖가지 유인물들을 8월 모임에 나온 20여 명 회원들에게 나누어주면서 지회장이 '집회참가 보고'를 소상하게 했다.

나는 여러 가지로 할 말이 많았지만 그 날은 자제 쪽을 선택했다. 다른 적당한 기회에 문제 제기를 하기로 마음먹고, 말없이 지회장의 보고를 다 듣고, 유인물도 받아서 집으로 가져왔다. 충분히 '참고용'은 될 수 있겠다 싶어서였다.

지만원씨와 나는 충주 지씨 종친

지만원씨와 나는 충주 지씨 종친이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충주 지씨 중 한 명이지만 난 그가 맘에 들지 않는다.
지만원씨와 나는 충주 지씨 종친이다. 그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충주 지씨 중 한 명이지만 난 그가 맘에 들지 않는다. ⓒ 3.1사진공동취재단
집에 가져온 유인물들 중에는 제목이 <존경하는 조지 부시 미합중국 대통령 귀하>로 되어 있는 지만원씨의 '호소문'도 있었다. A4 용지 한 장에 양면으로 10포인트 크기의 글자들이 거의 가득 채워져 있는 인쇄물이었다.

나는 평소 지만원씨에 대해 적잖이 관심을 가져왔다. 무엇보다도 서로 '종친'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같은 '충주 지씨'이고, 충주 지씨는 모두 한 본(本)이니 일가지정을 가지게 마련이었다. 인구 비율이 높은 다른 성씨들에 비해 아직 희성(稀姓) 축에 드는 충주 지씨(현재 26만 명쯤 되나?) 일족으로서는 같은 성씨에게 우선 친밀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지만원씨는 현재 충주 지씨 일문 중에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크게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충주 지씨 성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제일 유명한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그는 프로필이 매우 화려한 사람이다. 육사 출신으로 공부도 많이 했고 저서도 많이 가지고 있다. 군대 시절에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무공도 세웠다. 그의 베트남 전쟁 참전은 내게 좀더 각별한 느낌을 준다.

그의 사회활동은 참으로 왕성하고도 치열하다. 왕성함과 치열함이 지나쳐서 '엽기적'이라는 말도 듣지만, 노년기에 접어든 나이에도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정열은 내게 경이감마저 안겨주고 찬탄을 금할 수 없게 한다.

왕성하고 치열한 활동력, 어쨌든 놀라운 지만원

그는 오늘날 한국 사회의 보수 진영에서 가장 찬사를 많이 받는 사람으로 우뚝 서 있다. 대표적 보수 논객이라는 평가도 듣고 있다. 그의 보수 논리라는 것은 모두 '선동 논리'이며, 선동적 논리 쪽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보적인 존재라는 평도 듣고 있다.

아무튼 지만원씨가 매우 특별한 지식인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 '특별함'이 한국과 같은 특수 사회에서나 가능한 것이겠지만, 지만원이라는 이름 석자가 한국의 보수 사회에 떨치고 있는 위력, 그 존재의 약여함에 대해서는 나도 인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사회에서 두드러지게 활동하고 있는 인물이 충주 지씨 일문에서는 별로 없는 현실에서 나는 지만원씨에 대해 일말의 다행스러움을 느껴왔다. 그에게 묘한 고마움과 함께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어느 면 인지상정일 법도 하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에게서 이상한 불안을 느껴왔다. 그는 좌충우돌하는 습성을 가진 듯하면서도, 전후좌우 살피지 않고 오로지 앞으로만 돌진하는 사람 같기도 했다. 팽이처럼 오직 한쪽으로만 쉬지 않고 계속 돌아서 그가 어지럼증에 걸려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내게 묘한 아쉬움을 주기 때문이었다. 충주 지씨 일문에서는 가장 유명한 사람이 되어 있는 그가 비록 보수 진영의 중심적 수구적 인물이기는 하되 정상적 지식인의 범주에서는 벗어나지 않기를 꾸준히 소망해 왔던 것이다.

노무현은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는 빨치산?

나는 이제 지만원씨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나는 이제 지만원씨에 대한 기대를 접기로 했다. ⓒ 오마이뉴스 권우성
그러나 나는 이제 지만원씨에게서 그 기대를 접기로 했다. 나는 그것을 그가 '존경하는 조지 부시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보낸 호소문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그가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문을 보낸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닌 것 같다. 지난해 11월에도 그는 "∼노무현 정권이 어째서 반미-친북적이며 적화통일을 획책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인지에 대해 귀하께 편지를 드린 일이 있습니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지난번 편지에도 적은 말임을 밝히면서 "노무현 정부는 매우 감정적인 매너로 한미연합사를 해체하려 합니다. 노무현이 이를 감정적으로 몰고 나가는 이유는 미국의 감정을 상하게 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계획된 의도로 해석됩니다. 미합중국은 여기에 맞대응하지 말고 노무현의 불순한 의도를 이성적으로 물리쳐 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는 자신이 어떤 이력을 가진 사람인가를 상세히 소개한 다음 "대한민국 4800만 국민의 생명은 오직 한미동맹에 의해 안전하게 유지돼 왔음을 한국 국민들은 잘 알고 있으며, 미국에 대해 늘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고는, "그러나 매우 슬프게도 지난 57년 간 유지돼온 이 귀중한 동맹관계를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어 허물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이는 대통령 직분에 어긋나는 국가파괴행위"라고 못박고 있다.

"노무현은 한국 사회를 증오하는 이단아이며, 북한을 조국으로 여기는 빨치산입니다. 한미연합사령부 해체는 대한민국을 북한에 흡수통일 시키려는 빨치산의 음모일 뿐, 절대로 한국국민의 뜻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주시기 간절히 바랍니다."

미군 철수하면 베트남처럼 적화통일된다!?

그러면서 그는 한미동맹의 소멸과 주한미군 철수를 우려하고 "그렇게 되면 한국은 곧바로 1975년의 베트남처럼 적화통일이 될 것"이라고 단언한다. "재래식 무기만을 가지고 있는 한국군에 비해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는 북한은 남한에게 '항복을 할래, 아니면 불바다가 될래?'라고 협박할 것"이라는 말도 한다.

"한국군에는 이에 대응할 아무런 수단이 없어서 한국의 대통령은 곧바로 전쟁보다 통일이 낫지 않느냐며 한국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한국을 김정일에게 넘길 것"이며 "노무현 정부가 연합사 해체를 서두르는 것은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 가려는 데 있다"고 흥분한다.

김정일이 어떤 위인인지에 대한 설명과 함께(이 부분은 나도 인정을 한다) "세계의 모든 지도자가 외면하는 김정일을 유독 한국 대통령 노무현만이 옹호하고 지원해주고 있다"며 "이 역시 대다수 국민의 뜻이 아님을 인식해 주시기 간절히 바란다"고 호소한다.

"노무현 정권에는 북한의 공작금에 의해 길러진 사람들이 들어차 있다"는 말과 함께 "이들은 대학생 시절에 미국을 증오하고 김일성을 존경하는 것을 종교적 신념으로 다져온 사람들"이라는 말에 이어 "특히 노무현은 어려서부터 그가 속한 사회를 증오하고 국가 질서에 반항하면서 자랐다"는 말을 했다.

그리고 청와대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는 노무현 대통령의 자서전 안에 들어 있는 내용이라며, 친구의 예쁜 가방을 면도칼로 찢었다는 노 대통령의 어린 시절의 한가지 삽화를 소개하고, 노 대통령의 조부와 부친과 장인에 관한 이야기들을 제시한다. 그러고는 이런 단정을 내린다.

"사회로부터 멸시를 받아온 사람은 그 사회를 증오하게 됩니다. 노무현이 하는 일은 한국 사회에 대한 앙갚음입니다. 그래서 그는 한국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를 없애려 하고, 부자들을 증오하고, 기업을 증오하고, 수도 서울을 반으로 쪼개려 합니다. 한미연합사 해체 역시 대한민국 사회에 대한 노무현의 증오와, 그의 마음속에 감추어져 있는 그의 조국인 북한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는 것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면 관계상 나머지 부분은 소개를 생략한다. 한마디로 점입가경이다. 이 글은 지만원씨가 '존경하는 조지 부시 미합중국 대통령'에게 개인적으로 보낸 호소문이 아니다. 어떤 방식을 취했는지는 모르지만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보냈을 뿐 아니라, 보수 단체들의 집회에서 낭독을 하고 또 대량으로 인쇄하여 배포를 한 공개 호소문이다.

지만원씨, 지금이 부시에게 편지 보낼 때요?

나는 지만원씨의 이 글을 읽으면서 큰 슬픔과 함께 몸이 떨리는 공포를 느꼈다. 다시금 인간에 대한 회의와 연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평소 지만원 '종친'의 명성을 잘 듣고 그 특유의 행태들에 흥미를 느껴왔지만, 이렇게까지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증오심'을 가슴 가득 품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에게도 어느 정도 선(線)을 지키는 분별력과 지성적 고뇌의 편린들은 있을 줄 알았다.

아무리 노무현 대통령이 밉고, 현 정권에 대한 생리적 적대감이 크다고 하더라도, 미국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차용하는 식의 과격한 언사는 너무도 유치하다. 어딘가 모르게 유아적인 모습도 엿보인다.

나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 실망을 많이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를 '개혁세력'으로 오해했다는 생각도 한다. 집권 초기 자신의 둥지였던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드는 것을 보면서 이건 아닌데 하는 심정으로 글을 쓴 적도 있다. 그때부터의 이런저런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는 상황을 보는 심정은 매우 씁쓸하고도 안타깝다.

그래도 현직 대통령을 마구 모욕하고 능멸하는 사람들, 지만원씨처럼 남의 나라 대통령에게 자기 나라 대통령을 다분히 패악적인 언사로 고발(?)하는 따위 사대주의 습성의 표발을 보면 더욱 슬프고 안타깝다.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아무리 바닥을 기는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대통령이다.

국민 지지율이 바닥을 기는 대통령, 임기가 고작 1년 남짓 남아 있는 대통령을 두고도 지만원씨는 왜 그렇게 불안해하는지 모르겠다. 그의 말대로라면 노무현 대통령은 남아 있는 짧은 임기 안에 '한국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한국을 김정일에게 넘길' 판이다. 한반도의 적화통일은 바로 코앞에 다가왔다. 이거, 보통 큰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지만원씨는 왜 저리 태평한지 모르겠다. 하루빨리 미국으로 미리 몸을 피하든지, 다시 군복을 입든지 무슨 수를 써야 한다. 그런데 왜 그럴 생각은 하지 않고 왜 저렇게 만날 보수단체 집회나 쫓아다니면서 한가롭게 '존경하는 조지 부시 미합중국대통령'에게 호소문으로 보내는지(그게 과연 저 태평양 건너에서 무슨 효력이라도 가져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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