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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민수
어릴 적 마당에는 어머님이 가꾸시는 화단이 있었다. 화단에는 철따라 깨꽃, 채송화, 봉숭화, 백일홍, 다알리아, 백합이 자기만의 색을 가지고 피어났다. 꽃들이 피어나면 어디에 이런 고운 색깔을 간직하고 있다 내어놓은 것일까, 저 땅 속에 이렇게도 고운 물감이 들어 있는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화단 한 켠에는 수세미가 자리를 잡고 나무를 부여잡고 올라가 노란꽃을 피우고 가을이면 수세미를 주렁주렁 매달았다. 잘 익은 수세미를 물에 담가 잘 썩힌 후에 씨를 빼내고 방망이로 두드리면 섬유질만 남았고, 그것이 설겆이를 할 때 사용하는 수세미가 되었다.

요즘 사용하는 수세미가 귀할 때에는 볏짚을 수세미로 사용하기도 했으니, 수세미야말로 제대로 된 수세미였던 셈이다. 사용하다 보면 닳아 없어지고,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때가 되면 또 다른 수세미를 물에 불려서 방망이로 두드려 새 수세미를 만들었다. 그렇게 다음해 가을 수세미가 익을 때까지 천연 수세미는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 김민수
수세미의 열매는 식용한다고 하는데 내 기억에는 수세미 열매를 먹어본 기억은 없다. 아마 어린 열매들을 가지처럼 쪄서 식용을 하든지, 오이처럼 생으로 식용을 했을 것이다. 그런 기억이 없는 것은 그래도 덜 배고픈 시절을 보냈기 때문일 것이다.

수세미는 열매가 달리고 나면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데 상당히 커서 혹시라도 줄기가 끊어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되었는데 잘 익은 열매들을 들어보면 아주 가벼웠다. 커지면서 몸 안에 있는 수분이 빠지면서 가벼워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기를 비움으로 자기를 내어준 줄기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는 마음의 행간을 읽어본다. 자기를 비운다는 것, 그것은 사람에게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자연에게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어서 병들지 않으면 그 순리를 따라 살아간다. 비우고 채우는 순환고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한 해를 살고 마감하는 삶일지라도 해마다 피어나는 것이 자연이다.

ⓒ 김민수
가을이 깊어지면 나무들은 더 이상 물을 저장하지 않는다. 광합성작용을 하면 물이 계속 필요하기 때문에 이파리들을 하나둘 떨궈내고 몸 안에 물을 겨울이 오기 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만 남겨두고 배출을 한다. 그래야 겨울에 얼어 죽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여름 날 비온 뒤 숲을 걸어보면 일맥현상으로 풀잎 가장자리에 이슬처럼 영롱한 물방울이 맺힌 것을 종종 보게 된다. 필요 이상의 것들을 축적하지 않고, 내일 아니 오후에 목이 마르다고 할지라도 다 내어놓는 것이 자연이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 이상을 갖지 않는 자연의 마음, 그래서 자연은 깨끗하고 세속에 물든 이들의 마음을 순화시켜주는 것이리라.

수세미를 보면서 내 마음 속에 있는 찌든 때까지도 말끔히 씻어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도 욕심이다. 자기의 마음은 누가 씻어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씻겠다는 용기와 실천이 필요한 것이니까 말이다.

하늘을 향하는 덩굴손들과 이파리들은 때론 부여잡을 것이 없으면 허공을 부여잡기도 한다. 그 허공을 부여잡은 덩굴손들을 보면 오선지가 떠오른다. 그들이 어떤 노래를 부르고 싶어 그렇게 바람에 흔들리면서 하늘을 부여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김민수
암꽃은 열매를 맺으면 이내 시들어버리고, 수꽃은 피어난 후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암꽃이 열매를 맺은 후에도 수꽃은 계속 떨어진 꽃들의 흔적은 남기고 꽃을 피운다. 그래서인지 수세미꽃은 매일매일 새롭다. 하루 이상을 피어 있지 못하는 꽃, 그것은 바꿔 말하면 늘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꽃이라는 의미와도 통할 것이다. 단 하루도 수세미꽃이 피기 시작한 이후 그 곳에 꽃이 피지 않은 날이 없었으니까.

날마다 새 꽃으로 단장하고 하늘을 향해 피는 꽃
날마다 새 꽃이라 마음까지 비우고 피는 예쁜 꽃
주렁주렁 무거울까 속내를 비우고 또 비우는 마음
텅 빈 마음 닮아 닳고 또 닳기까지 그릇을 닦고
헤어지고 닳아져도 저적거리지 않고 자기의 길을 간다. <자작시-수세미>


작은 수세미열매를 보고 도리깨침을 삼키는 사람은 없겠지만 아침나절 막 떠오른 햇살을 맞이하고 있는 수세미꽃을 한 번이라도 진지하게 바라본 사람이라면 꼭 한번 자기의 뜰에 심고 싶은 꽃 중 하나가 될 것이다.

ⓒ 김민수
그 언젠가 마당이 있는 내 집을 갖게 된다면 나는 그 한켠에 수세미를 심을 것이다. 가을에 잘 익은 열매들을 따서 수세미를 만들어 쟁여놓고 친구들에게 천연수세미 선물을 할 것이다.

수세미꽃을 바라보면서 "내 마음도 깨끗하게 씻어줄 수 있겠니?" 물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다.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질문에 대한 답 역시도 내가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씻을 수 없을 정도로 때가 가득한 마음, 씻을 의지조차도 없이 내 안에 낀 때를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가는 나를 본다.

이제 세상을 향해서 날을 갈지 말고, 세상을 향해서 깨끗해지라고 하지 말고 나를 향해서 날을 갈고, 나를 향해서 깨끗해지라고 해야겠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보다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내가 변하는 것이 더 큰 혁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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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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