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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두거리에 있는 <그날이 오면>.
녹두거리에 있는 <그날이 오면>. ⓒ 이승호
서울대 부근 '녹두거리'(서울시 관악구 신림9동)에는 <그날이 오면>(아래 <그날>)이라는 서점이 있다. <그날>은 평범한 서점이 아니라 '인문사회과학전문 서점'이다.

이곳저곳에서 사회 변혁 운동이 펼쳐지고 대학생들이 사회를 바꾸기 위해 고민하던 1980년대 중반, 대학가 주변에는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절정기에는 전국에 약 150여 곳이 있었다. 서울에도 많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연세대와 고려대 앞에 2~3곳이 있었고 서울대 인근에는 무려 5곳이나 됐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은 하나둘씩 문을 닫아 현재 명맥을 유지하는 곳은 전국적으로 많지 않다. 이 와중에도 <그날>은 꿋꿋이 녹두거리를 지키고 있다. 그러던 <그날>에 위기가 닥쳤다.

이제는 전단지만 가득한 <그날> 메모판. 예전엔 학회 세미나, 동아리와 과 모임을 알리는 메모로 가득했다.
이제는 전단지만 가득한 <그날> 메모판. 예전엔 학회 세미나, 동아리와 과 모임을 알리는 메모로 가득했다. ⓒ 이승호
언제나 서점 그 '이상'이던 <그날>

서울대생들에게 <그날>은 서점 이상의 공간이었다. 서울대 졸업생 박동휘(동양사학과 93학번)씨는 <그날>을 다음과 같이 기억한다.

"수업이 끝나면 자연스레 발길이 <그날>로 향했다. 어떤 신간이 나왔는지 살펴본 뒤, 의자에 앉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었다.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그날> 2층에 있던 북 카페 <미네르바>에서 친구들과 함께 열띤 토론을 펼쳤다.

그뿐 아니라 예전엔 휴대전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날> 문 앞에 있는 메모판을 활용해 친구들과 연락했다. 메모판에는 연일 '어느 학과 사람들이 어디서 놀고 있으니 같이 노실 분은 오라'는 메모가 붙어있었다. <그날>은 단순한 서점이 아니라 사람들이 오가는 문화 공간이었다."


1980년대 말~1990년대 서울대 주변에서는 연일 시위가 계속됐다. 시위대가 경찰에게 밀릴 때 몇몇 학생들이 <그날>로 도망쳐오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김동운 <그날> 대표는 셔터를 내리고 문을 닫은 척하며 학생들을 지켜줬다.

1997년, 인문과학서적 대표들이 무더기로 구속된 적이 있었다. 죄명은 국가보안법 위반이었다. 비판적 인문사회과학 서적을 다루던 <그날>의 김동운 대표도 이때 구속됐다.

이때 <그날>을 이용하던 학생 수백 명은 김동운 대표를 석방하라며 항의 시위를 했다. 서울대생들에게 <그날>은 언제든 쉬었다 갈 수 있는 '사랑방'이자, 동고동락한 '동지'였다.

김동운 <그날이 오면> 대표.
김동운 <그날이 오면> 대표. ⓒ 이승호
1997년, IMF 구제금융 사태가 터지기 전만 해도 <그날>은 흑자경영을 했다. 다른 인문사회과학 서점들이 1990년대 초중반 하나둘씩 문을 닫은 것과 대조적으로, <그날>은 IMF 사태 직전까지 매일 400여명이 서점에 들렀고 하루 매출 150~200만원 정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IMF 사태 후 서점을 찾는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줄어들었다. 요즘엔 하루 방문자가 150명 정도며, 하루 매출이 40만원도 채 안 된다고 한다.

적자가 아니었던 1990년대에 <그날> 운영진은 <그날에서 책읽기>(1998년)라는 무료잡지를 만들고 <그날> 2층에 북 카페 <미네르바>(1999년)를 여는 등 의욕적인 기획을 선보였다.

하지만 재정난 때문에 <그날에서 책읽기>는 2000년에 폐간되었고 <미네르바>는 2004년 문을 닫았다.

<그날>과 함께하는 사람들

이처럼 <그날>은 경영난에 처했지만, 외롭진 않다. <그날>과 함께하고자 하는 이들이 후원회를 결성했기 때문이다. 후원회원은 26일 현재 40~50명 정도며,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후원회원들은 26일 저녁 7시 <그날>에서 발족식도 연다.

<그날> 후원회원은 10여년 전 학교를 졸업한 사업가부터 이제 막 서울대에 들어온 새내기까지 연령층이 다양하다. 그만큼 <그날>이 서울대생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들어와 있다는 뜻일 것이다. 후원회원들은 매달 일정한 금액의 회비를 모은다. 그 돈으로 <그날>의 부채를 조금씩 줄여나갈 것이다.

<그날> 경영상태가 나아지면 1~2달에 한 번 정도 <그날> 이용자들을 위한 강연회도 열 계획이다. 홈페이지를 개편해 <그날에서 책읽기>를 웹진 형태로 부활시키기 위한 준비도 하고 있다.

후원회원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인문사회과학도서를 권하는 한편, 회원들끼리 종종 세미나 형식으로 만날 계획이다. 법대 04학번 박종하씨는 "사회과학도서에 대한 관심이 학내에 부족하다"며 "<그날> 후원회원으로서 책읽기 문화 확산을 위한 실천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김동운 대표는 24일 오전 만남에서 "<그날>은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김동운 대표의 목소리에는 희망이 담겨 있었다. 분명히 <그날>은 새롭게 태어날 것이다. 지금까지 함께 걸어온 수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한층 더 나아질 <그날>을 기대해본다.

<그날> 후원회 발족을 알리는 펼침막.
<그날> 후원회 발족을 알리는 펼침막. ⓒ 이승호

덧붙이는 글 | SBS U포터 뉴스에도 송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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