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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차. 중국의 유용한 관광 수입원
전동차. 중국의 유용한 관광 수입원 ⓒ 오창학
7월 21일 금요일. 뤄양(洛陽)에서의 아침. 아니 이곳 만큼은 그냥 '낙양'이라 부르자.

자꾸 뤄양, 뤄양 그러니 그간 무수히 들어왔던 중국 고대도시의 냄새가 나질 않는다. <삼국지>의 무대라는 느낌도, 전국시대의 노자, 당의 두보, 이백, 백낙천 등 활동하던 예술도시의 이미지도, '낙양지귀(洛陽紙貴)' 고사의 배경지라는 친숙함도 '뤄양'이란 표현에 같이 날아가 버린다.

낙양…, 한국인에게 이름의 편견이 너무 강하게 남은 곳이다. 우리 뇌리엔 저우룬파가 아닌 주윤발이 있는 것처럼.

낙양의 아침도 부산을 떨며 시작했다. 오늘은 시안에 들어가야 하는데 낙양의 용문석굴과 백마사 두 곳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유적인 까닭이다. 차량 점검을 끝내고 현지 가이드를 섭외하여 용문석굴로 향했다.

기대하고 간 용문석굴

낙양의 거리는 광활하고 한적하다. 본시 지명 뒤에 ‘양(陽)’자가 붙는 것은 ‘산지남북지수(山南之北之水)’의 형세를 가진 지역을 의미하는데 낙수를 남에 둔 낙양이 과연 그러하다. 지금도 수십만이 넘는 대도시의 규모는 주나라의 수도가 된 이래 아홉 개 왕조의 도읍이었던 면모를 보여주나, 옛모습 찾을 길 없는 현대적인 건물과 단정한 거리는 어쩐지 낯설다. 달랑 요거 생각하는 사이 어느새 용문석굴이다. (겨우 13Km)

차를 주차장에 멀찍이 세워두고 전동차를 이용해 매표소까지 이동. 다시 매표소에서 석굴까지 걷는다. 이 기막힌 상술. 어느 관광지나 매표소와 주차장 사이가 지나치게 멀다. 매표소와 주차장 사이가 가까우면 매표소와 유적지 사이가 기가 막히게 멀다. 그 사이를 꼭 전동차가 오간다. 드넓은 땅을 현금화하는 절묘한 수다.

용문석굴 이하다리. 사얼 희부연 낙양의 대기. 다리 건너에 백거이 묘가 있다
용문석굴 이하다리. 사얼 희부연 낙양의 대기. 다리 건너에 백거이 묘가 있다 ⓒ 오창학
날씨. 운무가 낀 듯 황사가 깔린 듯 온천지가 부우연 가운데 한여름 훈기가 장난이 아니다. 흡사 저 부연 대기가 하우스막이나 한증막 수증기가 아닐까 싶다. 저마다 등줄기에 선명한 땀 자국을 남기며 걷는다. 덥고, 습하고, 탁하다. 모두가 울 것 같은 표정이다.

용문석굴(龍門石窟).

잉어가 용문을 넘으면 용이 된다던 고사의 그곳. 용문 협곡 동서 두 절벽 사이에 이수(伊水, 伊河)가 흐르고, 보기에 문턱과 같아서 옛사람은 이곳을 이수문턱이라고도 불렀다. 기어이 '등용문' 하지 못한 잉어가 강으로 되돌아 와 포획되면 용문을 오르느라 짓찧은 머리 뒤에 시커먼 멍자국이 선명하다 하였으니 이를 먹으면 그 운을 얻는다지.

헌데 자꾸만 멍자국을 남긴 채 용이 되지 못한 잉어의 한만 내 가슴에 남는다. '왜 있잖아, 드라마를 볼 때도 삼각관계에서 도태되는 남자 조연이 내 모습과 오버랩되는 그런 거.'

용문석굴. 북위 시대부터 당대까지 조성된 1300여개의 석굴이 있다.
용문석굴. 북위 시대부터 당대까지 조성된 1300여개의 석굴이 있다. ⓒ 오창학
더위가 미간으로 뭉치는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며 이하를 따라 걸으니 용문산 기슭에 벌집처럼 자리 잡은 석굴들이 나타난다. 인간 삶의 흔적에 어찌 순번을 매길까 싶으나 마는, 호사가들은 돈황의 막고굴, 대동의 운강석굴과 더불어 이곳을 중국의 3대 석굴로 꼽는다지.

개의치 않으려 해도 '3대', '10대' 운운하는 순위를 접할 때 은근한 기대가 이는 것은 인지상정. 거기에 'AAAA'(중국은 관광지 등급을 A1∼4로 매긴다)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이니 하는 선전을 보태면 용문석굴에 대한 기대는 자연 부풀어 오르게 된다.

용문석굴 안내도
용문석굴 안내도 ⓒ 오창학
이곳은 439년 북위(北魏)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한 이래 만들기 시작한 석굴이다. 이하(伊河) 양안의 용문산(龍門山)과 향산(香山) 암벽에 1352개의 석굴이 있고, 그 속에 약 10만 개에 이르는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2초씩 보며 뛰어도 이틀 반이 걸리는 일이니 애초에 다 볼 욕심이야 언감생심이고, 낙양 현지 안내원의 주도에 이끌려 한 바퀴를 휘이 돈다.

ⓒ 오창학
현재의 용문석굴은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불두(佛頭)를 소장하면 복이 온다는 민간의 속신, 이른바 탐험대로 명명한 서양의 도굴단, 그리고 희대의 헤프닝 '문화혁명'이 주범이다.

그나마 홍위병들이 훼손할 때에는 낙양 주둔 장군이 불심이 깊은 이라 도맡아 파괴할 것을 자청하고 석굴입구를 봉쇄한 덕에 이만큼이나 남았다지.

동위(東魏), 서위(西魏), 북제(北齊), 북주(北周), 수(隨), 당(唐)에 이르는 4세기에 걸쳐 완성된 것들이고, 지금까지 1500년 역사가 더해졌으니 하나하나가 소중한 문화유산이겠지만, 동네 최고의 미인들이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와 무더기로 있을 때는 다 고만고만해 보이는 것처럼 내겐 투박진 조형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옥석을 가리지 못하는 이 미천한 눈이 한스럽다.

봉선사. 용문석굴의 얼굴마담
봉선사. 용문석굴의 얼굴마담 ⓒ 오창학
그래도 보편적인 사람의 눈이란 게 있어서인지 당대에 조성한 봉선사(奉先寺)는 특별하게 다가온다. 크고 아름다운 거야 단박에 느끼는 감상이고, 여기에 만든 17m의 비로자나불은 중국 유일의 여황제 측천무후를 모델로 하였다는데, 벌써 사천왕상과 보살상의 시립 모양이 왕을 둘러싼 문무백관의 형상을 연상케 해 정치적인 냄새를 짙게 풍긴다.

하긴 북위 효문제가 이곳에 석굴을 파기 시작한 것도 통일 직후의 혼란 상황을 불교라는 통합 매개를 통해 극복해보고자 하는 의도였으니, 이곳에서 종교를 정치와 따로 생각하여 문화재를 보기는 어려운 일.

석굴암. 어쩌면 경주 석굴암의 석공은 이곳에 다녀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석굴암. 어쩌면 경주 석굴암의 석공은 이곳에 다녀갔을 지도 모를 일이다. ⓒ 오창학
에릭님은 경주 석굴암의 모태가 이곳이었을 거라 여긴다. 단순히 이런 문화의 막연한 영향이 아니라 석굴암 공사를 이끈 석공은 아마도 낙양땅을 밟은 사람이었을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석굴을 지키는 금강역사의 허리 꺾임 선마저 이토록 흡사할 순 없을 거라고 한다. 당시 석공의 신분으로 중국에 들어와 낙양에 머물다 들어갈 수 있었을까? 에릭님 의심에 이견을 내어 보았지만 내심 그런 일이 없었으리라 확언은 못 하겠다.

당시 중국 불교계엔 수많은 신라 유학승이 고승, 대덕, 역경승, 주지로 활동하고 있었고, 원축, 승장, 신방, 지인, 현범, 무저, 혜초, 혜일 등 8고승이 담당한 역경의 비중이 현장, 의정 때에 번역된 총수량의 60%에 이르던 때였다. 한 마디로 재당 승려들의 판이었던 이때에 이들과 더불어 불교 문화 관련 장인들이 함께하지 않았으리란 법이 없지 않은가.

더위에 지친 탐험대
더위에 지친 탐험대 ⓒ 박재익
그러면 결국 석굴암이 용문석굴 베껴간 것이니 별거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으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용문석굴의 불상들을 보며 석굴암의 본존불을 떠올려 보면 안다. 여기처럼 푹푹 석벽을 파지 못한 조국의 장인들이 어떻게 돌을 깎아 인공의 석굴을 형성하였는지를 생각해 보면 분명히 안다.

왜 우리는 우리의 문화에 감읍해야 하는지. 먼 길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간 문화가 어떻게 용해되어 있는지를. 그렇게 한반도는 '중화'라는 거대한 용광로를 육로로 맞대고도 고유한 문화와 역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당 신라인의 혼이 담긴 '신라상감'엔 통행금지 푯말만이

해동국에서 길을 떠나 실크로드를 더듬고 있는 우리가 용문석굴에 관심을 두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신라상감. 당 대에 재당 신라인들이 조성한 석굴. 황제가 세운 것만큼 화려하고 큰 규모는 아니더라도 지역유지들만큼의 세는 갖춘 굴이다. 낙양의 불수기사(佛授記寺)에 머물던 신라승 원측이 조성했을 것이라는 설도 있고, 여기서 60Km 떨어진 소림사의 혜초가 주도했을 거란 설이 있다.

하지만 당시 16세인 혜초가 금강지(金剛智)를 만나 사사 받을 무렵에 이런 큰 불사를 맡았다고 보기는 어렵고, 왕족인 원측스님의 역할이 크지 않았을까 싶다. 강 맞은편에 있는 향산사 뒤 곡에서 그의 사후 다비식을 했던 인연을 봐도 그렇고….

신라상감. 통행금지 푯말이 계단을 막고 있는 이곳은 잡초가 무성하다.
신라상감. 통행금지 푯말이 계단을 막고 있는 이곳은 잡초가 무성하다. ⓒ 오창학
교수님이 10년 전 행보의 기억을 더듬어 어렵사리 찾은 그곳은 '통행금지'였다. 석굴들이 밀집해 있는 곳에서 동편으로 200여 미터를 벗어나 언덕 10여 미터 위에 외따로 위치한 석굴.

예전에 보였다던 '신라상감(新羅象嵌)'이라는 판각은 보이지 않는다. 교수님은 성묘를 온 분처럼 굴 근처의 무성한 풀들을 잡아 뜯었다. 왜 중국 속의 우리 유적은 이렇게 방치되고 있는 것일까?

이 말을 들으면 중국 쪽에선 펄펄 뛸지 모르겠다. '우리유적'이라니? 중국땅에, 중국돌로, 중국풍의 석굴을, 중국장인을 통해 조성했는데, '우리 유적'이라니? 그럼 정정하겠다. 중국 속의 '우리 흔적'은 왜 이리 방치되고 있는 것일까?

'통행금지'.

외떨어진 신라상감으로 오르는 계단을 이 푯말이 막고 있었다. 급기야 관리인 하나가 뛰어와 굴 앞에 몰려 있는 우릴 내쫓는다. 이곳은 '통행금지'라며.

교수님은 이를 '역사를 관리'하겠다는 중국의 의지로 해석하셨다. 그럴까? 저들은 과연 역사를 '관리'하려는 차원에서 신라감실 앞에 저 푯말을 세웠을까? 어쩜 우연인지도 모른다. 이곳을 찾는 이가 많아 보호 차원에서 휴식년제를 시행해야 한다든지, 감실 뒤로 오르는 능선을 등산로로 사용하려는 이가 있어 굳이 길을 폐쇄하여야 한다든지 하는….

그런데 내게도 저 행위가 순수한 의도로 여겨지질 않는다.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에 편입시키려는 불순한 저의가 이미 드러난 상태여서일까? 티벳, 몽골, 동투르키스탄….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내 모든 소수민족 역사를 중국 역사에 편입하는 공작을 마친 이력이 있는 탓일까? 어찌보면 아무것도 아닐 저 푯말의 의미가 여간 껄끄러운 게 아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자동차여행 포털사이트 ‘알브이라이프(http://www.rvlife.co.kr)’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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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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