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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김민수
겨울바람이 불어오는 길목에 한라산 1100고지를 오른 적이 있다. 한라산 1100고지의 습지에는 가을꽃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는데, 갈색의 비쩍 마른 단아한 줄기들이 삐죽삐죽 올라와 있었다. 꽃이 시든 후의 모습도 장엄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몇 차례 눈이 내리고 녹기를 반복하다가 보면, 이른 봄이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들. 자기가 왔던 흙으로 돌아갈 존재이지만 그렇게 왔다가 사라진다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후에 그것이 개수염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 이름을 듣자 삐죽삐죽 듬성듬성 개수염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닮은꼴, 무엇인가를 닮았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으니 기왕이면 그 이름을 나눠갖는 것도 좋은 일이다.

ⓒ 김민수
강원도 산골의 습지에서 흰개수염군락지를 만났다. 두어 주 전만 해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었는데, 하룻밤 사이 자라난 수염처럼 자라버렸다. 긴 줄기에 피어난 수수한 꽃, 단순함의 미를 간직하고 있는 꽃이다.

꽃들을 보면 마디도 있고, 꽃의 모양도 아기자기하고, 줄기마다 이파리도 달고 있다. 그 모든 것이 자신을 치장하는 것이리라. 그런 면에서 보면 흰개수염은 자신을 치장하는 모든 것들을 생략하고 피어난 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이다.

길죽한 줄기를 보면서 꽃을 피우는 마음의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든 간절한 마음 없이 어떻게 꽃을 피울 수 있을 것인가? 간절한 마음, 소망은 그 어떤 것이든 꽃을 피울 수 있다. 그리고 피어야 한다. 간절한 소망이 이뤄지지 않아 절망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의 삶은 단순함을 추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가진 것들로 인해 우리의 삶이 거추장스러워진다. 더 편안하게 살기 위해 가지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삶을 더 옭아매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혹은 내가 별로 필요하지 않음에도 가지고 있는 것들, 그래서 일 년에 눈길 한 번 주지도 않는 것들이 그 누군가에게는 이루어질 수 없는 평생소원일 수도 있는 것이다.

ⓒ 김민수
단순함과 비움은 통한다. 비움으로 인해 충만해질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처럼 단순한 삶을 살아감으로 인해 이 세상의 온갖 복잡한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첨단과학시대를 살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생활에 들어와 있는 기계들 역시도 그 첨단과학의 모든 기술들을 담고 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그 기계 속에 들어 있는 첨단기술들을 얼마나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일까?

사용하기 나름이겠지만, 익히고 나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르겠지만 신형제품으로 쏟아져나오는 제품들 속에 들어 있는 기능들을 완벽하게 사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결국 사용하지도 않는 것들에 대한 부대비용을 감수하면서도 신제품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습지에 사는 것들은 습지에 사는 것들 끼리 모이게 마련이다. 작은 사마귀풀이 오히려 화사하게 보일 정도로 흰개수염은 수수하다 못해 촌스럽다. 그럼에도 그들이 어우러져 살아갈 수 있는 이유, 다른 것들과 자신들을 비교하며 살아가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 김민수
습한 땅에 삐죽거리고 싹을 틔우더니 어느 날 갑자기 어른이 되었다.
하룻밤 사이 까칠하게 자란 수염마냥 긴 줄기를 올리고는 꽃 한송이 피웠다.
긴 줄기 개수염같아 그 이름도 개수염이 되었다.
엉성하게 어우러져 피어난 모습이 개수염 같아 개수염이 되었다.
뿌리와 이파리와 줄기와 꽃받침과 꽃술…
그러면 다 갖춘 것 아니냐고 활짝 웃으며 피어난 개수염의 꼿꼿한 줄기가 맘에 든다.
기죽지 않음이 맘에 든다.
이것도 꽃이냐고 하지 말아라.
개수염이 들으면 서운할라.

<자작시-개수염>


ⓒ 김민수
하늘에서 바라보면 별처럼 보일까? 뷰파인더에 비친 그들의 모습은 별들의 잔치판이었다. 따가운 가을햇볕에 은빛 물결이 빛나고, 그 위에 흰개수염의 꽃이 별처럼 빛난다. 화사하지 않아 오래 보아도 질리지 않고, 단아해서 뭔가 그를 위해 해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들게 하는 꽃이다.

살아가면서 주는 것만 좋아할 일도 아니다. 때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받아서 주고 또 주어도 받은 것보다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차고 넘치게 주면서 살아간다고 생각하며 살아간다. 때론 받는 것이 주는 것이기도 하다.

자연은 우리에게 수많은 것들을 주려는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마다한다. 복잡한 현대문명의 맛에 길들어 단순하고, 단아한 자연의 맛을 잃어버린 탓이다. 자연이 주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을 때, 그때 좀 더 자연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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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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