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예루살렘 전경 이스라엘 1948년 독립 당시 텔아비브를 수도로 정했지만 독립전쟁 후 수도를 서쪽 예루살렘으로 수도를 옮겼다. 1967년 6일 전쟁때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후 합병했다. 국제법상으로는 아직도 점령지 지위여서 외국 대사관이 상주하지 못하고 있다.
ⓒ 이강근

지난 8월 중순,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상주하고 있던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가 자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에서 철수한다는 발표를 했다.

나라의 규모나 영향력으로 봐서 외교가에선 그리 큰 시선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소식을 접한 이스라엘 정부와 외교부는 사뭇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는 건국 직후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국제법상으론 아직도 점령지 지위) 그동안 외국 대사관을 유치하려는 이스라엘의 외교적 노력에 찬물을 끼얹은 것 뿐만 아니라, 소위 한 나라의 수도라는 곳이 외국 대사관 하나 없는 '텅 빈 수도'가 된 셈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야당은 때를 놓칠세라 실패한 외교정책이라 규정하고 정부와 외교부에 대해 비판을 가했다.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가 1982년과 1984년 자국 대사관들을 예루살렘에 상주시킨 것은 이스라엘에 대한 지지를 보이기 위한 것으로, 아랍국가와의 외교단절을 감수하면서 내린 정치적인 결정이었다. 그런데 이들 대사관이 다시 예루살렘을 떠나기로 한 이유 역시 이스라엘에 대한 강한 항의의 표시로 내린 정치적인 결단이었다.

80년대에 이들 두 국가가 대사관을 예루살렘에 상주시키면서 당시 이스라엘에 외교적 승리로 안겨주었던 기쁨의 크기 보다는, 이번 대사관 철수로 인해 이스라엘에 가한 타격이 더욱 강했다.

80년대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의 예루살렘 대사관 상주 결정은 여러 대사관들에 한두 개를 추가시키는 개념이었지만, 이번 철수는 명색이 한 국가의 수도라는 곳에 마지막 남아 있던 두 대사관이라는 점에서 이스라엘 정부와 외교부를 허탈하게 만든 것이었다.

양국의 이러한 결정의 이면에는 그간 친 이스라엘 성향이었던 이들 두 나라에 세월이 흐르면서 친 아랍 및 팔레스타인 성향 정권이 들어선 이유도 있다. 그간 이스라엘의 대 팔레스타인과 아랍 정책에 반대의사로 일어난 보복이었다. 그리고 그 시점이 이스라엘의 레바논 전쟁이었다.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의 대사관 전격 이전 결정

"이스라엘에 한방 먹이고 중동의 아랍국을 기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중동의 더 많은 아랍인들을 친구로 만들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대사관을 철수한다."


예루살렘에서 자국의 대사관을 철수시키면서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가 낸 성명서의 일부이다.

8월 16일, 코스타리카는 자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에서 철수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코스타리카가 대사관을 예루살렘에서 철수한다는 발표가 있은 직후만 해도 당황한 이스라엘 외무부는 "이제 남은 대사관은 엘살바도르 뿐"이라는 절박한 심정을 표출했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과 유대인들의 영원한 수도로 그 무엇도 우리의 입장을 변화시킬 수 없다"라는 강한 의지를 재 천명했다. 그러면서 예루살렘에 유일하게 대사관을 두고 있는 엘살바도르의 중요성을 한껏 부추기며 수도로서의 그 중요성을 부여했다.

그러나 최고의 주가를 올릴 수 있었던 엘살바도르 마저 일주일 뒤인 8월 26일 자국 대사관을 텔아비브로 옮긴다는 결정을 내렸다. "외국 대사관 하나 없는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이란 가상이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당황한 예루살렘 시장 루폴리안스키는 명색이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이 외국 공관 하나 없는 상황을 맞이했다며, 수상과 외무장관에게 진행 중인 미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이전 작업을 하루 속히 이룰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며 촉구했다. 이는 다른 나라들도 속속 예루살렘에 대사관에 둘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중요한 사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코스타리카 대사관 평범한 아파트인 건물 2충에 코스타리카 대사관이 상주해 있다. 코스타리카는 8월 16일 대사관을 예루살렘 밖으로 이전하다는 결정을 내렸다.(왼쪽) 코스타리카 대사관 푯말이 붙은 대사관 입구.(오른쪽)
ⓒ 이강근
이스라엘의 수도로 주장하는 예루살렘은 지정학적 위치 보다는 역사적으로 옛 이스라엘의 수도였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있다. 3천년 전 다윗 왕이 헤브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긴 이후 예루살렘은 유대인의 종교적인 정치적인 수도가 되었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건국 이후 예루살렘을 수도로서 인정받기 위해 국가의 규모에 상관 없이 외국 대사관들을 유치하기 위해 끊임없는 외교적인 노력을 해 왔다.

코스타리카의 대사관 철수 소식이 접해진 직후,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부수상은 직접 코스타리카 대통령에게 전화를 직접 걸어 대사관 이전을 재고해 줄 것을 간절히 요청했었다.

페레스가 전화를 건 것은 이 둘 모두 노벨평화상 수상자라는 특별한 관계를 강조한 것이다. 오스카 아리아스 코스타리카 대통령은 87년 시민전쟁을 종식시키는데 기여한 공로로, 시몬 페레스는 93년 오슬로 평화협정을 이끌어낸 공로로 각각 노벨평화상 수상한 정치인들이다.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의 대사관 이전 소식이 전해지자 리쿠드 당의 기드온 사아르 의원은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 마저 대사관을 옮긴 것은 "수상과 외무장관의 외교정책의 실패"라며 강하게 비판했다. 예루살렘에 대사관들을 유치하려는 노력이 허사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그간 상주하고 있던 대사관들 마저도 잃어버린 실패한 외교라는 것이다.

친 이스라엘 국가들에 친 아랍 정권이 들어서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가 과거 아랍국가들과 관계 단절하면서까지 대사관을 예루살렘으로 옮겼던 것은 당시 두 나라 대통령의 친이스라엘 성향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들 두 국가에 친-아랍성향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코스타리카는 87년 시민전쟁 종식에 앞장섰던 민주 인사 오스카 아리아스가 최근 코스타리카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는 취임 100일을 맞은 기념식에서 자국 대사관의 예루살렘 철수를 공식 발표했다. 성명에서도 밝힌 것처럼, 이스라엘의 대 아랍정책에 일침을 가하고 아랍과의 친분을 돈독히 하기 위한 목적에서다.

엘살바도르는 작지만 이라크에도 자국병력을 파병한 미국의 동맹이면서도 정권은 이민자인 팔레스타인 기독교인 출신의 후손들이 쥐고 있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과 엘살바도르는 크고 작은 외교적인 갈등이 빚어왔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팔레스타인 수반 야세르 아라파트가 2004년 11월에 사망하자, 그 이듬해 5월에 엘살바도르 수도의 한 광장을 아라파트광장으로 명명했다.

이에 항의한 이스라엘은 엘살바도르에 대사 파견을 보류하기도 했다. 또한 지난 7월에 이스라엘의 대대적인 레바논 공격이 시작되자 마침 모르코를 방문한 엘살바도르 외무장관은 모로코와 함께 이스라엘의 "즉각적인 전쟁 종식"을 촉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결국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은 예루살렘의 유일한 남은 대사관 두 개를 내쫓은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헤즈볼라와 같은 테러단체가 이스라엘에 대한 외교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고 평가하고, 아직도 아랍외교는 살아있다고 대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엘살바도르 대사관 주거건물 2층에 자그마한 대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엘살바도르는 8월 26일 자국 대사관을 예루살렘에서 텔아비브로 옮긴다는 결정을 내렸다. 엘살바도르가 떠나면서 예루살렘에는 외국 대사관이 하나도 없게 되었다.(위) 대사관 입구에 붙은 엘살바도르 푯말.(아래)
ⓒ 이강근
완전한 실패로 돌아간 예루살렘 외국대사관 유치 노력

1948년 독립 당시만 해도 이스라엘은 감히 예루살렘을 자국의 수도로 정하지 못했다. 그러나 독립과 동시에 발생한 1차 중동전쟁에서 승리한 이스라엘은 용기를 얻어 1950년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고, 아예 기본법으로 입법화했다.

그리고 외국 대사관을 유치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해왔다. 그러나 쉽지는 않았다. 그리스가 예루살렘으로 대사관을 옮기려다 포기했고, 네덜란드는 옮겼다가 아랍국들의 압력에 못 이겨 끝내 다시 철수했다. 당시 네덜란드는 위로의 표시로 예루살렘에 튤립을 한 배 가득 실어 보내기도 했다.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후 제일 먼저 예루살렘으로 옮긴 부서가 외무부였다. 비록 대사관은 텔아비브에 있다 하더라도 각국의 대사들이 부임할 때 대통령 신임장을 받고 예루살렘의 외교부를 방문하도록 공식일정을 유도함으로써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의 수도임을 인지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외무장관 집무실이 예루살렘에 있었지만, 각국의 난처한 사정을 고려해 텔아비브에 별관을 만들어 외무장관에게 신임장을 제정받아왔다.

사실 뒤늦게 발생한 문제로 대통령 신임장이었다. 대통령인 경우는 집무실을 떠날 수 없었기 때문에 신임대사 부임은 대통령 집무실을 찾아야만 했다. 와이즈만 대통령까지만 해도 대통령 관저가 예루살렘 밖(르호봇, 예루살렘과 텔아비브 사이)에 있어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1952년 와이즈만 대통령이 사망하고, 후임 이츠하크 벤 쩨브 대통령 관저가 예루살렘에 있어 신임 대사들은 신임장을 제정하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야만 했다.

1953년 5월에서 7월 사이, 독일 대사와 칠레 대사가 예루살렘을 찾았다. 프랑스와 미국 그리고 아랍국가들이 이스라엘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외의 국가들은 예루살렘 방문을 거부했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방문하느냐 안하는냐는 각국의 대응에 따라 많은 부작용을 야기 시켰다.

그러나 예루살렘 신임장 제정 거부에 종지부를 찍은 것은 바로 러시아였다. 1953년 12월에 새로 부임한 러시아 대사는 당당하게 예루살렘의 외교부를 방문했고,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했다. 러시아 대사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자 다른 나라들은 더 이상 눈치를 볼 이유가 없었다. 결국 예루살렘 방문 문제는 1954년 이후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1967년까지 23개국의 대사관이 예루살렘에 상주해 있었다. 그러나 이들 대사관들은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 이전부터 이미 들어와 있던 대사관들로 큰 비난 없이 대사관 업무를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67년,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해 합병한 이후 그나마 있던 대사관도 곤란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추가로 대사관이 예루살렘에 주재하는 일은 없었지만, 67년 이전에 이미 요르단 통치하에서 상주해 있던 대사관이 이스라엘 통치 하로 들어가자 이스라엘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하나씩 예루살렘을 빠져 나갔다.

결국은 추가로 대사관이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저런 외교적인 마찰로 인해 1994년까지만 해도 예루살렘 주재 외국 대사관은 고작 손가락에 꼽았다. 엘살바도르, 도미니카공화국, 덴마크, 그리고 코스타리카가 전부였다.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서는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대사관은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만이 유일한 대사관 상주 국가였다. 작은 나라였지만, 그나마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인정한 유일한 국가들로 이스라엘의 외교적 자존심을 지켜주는 상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2006년 7월 이스라엘의 레바논 공격은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에 마지막 상징이었던 코스타리카와 엘살바도르 두 대사관을 내쫓아내는 결과를 가져왔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