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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60년대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50~60년대 방직공장에서 일하는 여성들 ⓒ 우먼타임스
1960년대 본격적으로 추진된 산업화는 농촌에서 도시로의 대규모 인구 이동을 낳았다. 이러한 이동의 중심에는, 그럴듯한 도시 생활과 취직에의 꿈을 안고 상경했지만 결국 열악한 환경의 저임금 노동력으로 동원되었던 15~19세의 나이 어린 소녀들이 있었다.

특히 가족의 생계가 압박을 받는 하층 가정의 경우 가장 먼저 노동시장으로 방출되는 대상은 미혼의 딸들이었다. 그러나 새로운 일을 찾아 서울과 대도시로 향한 이들이 쉽게 진입할 수 있는 공식적인 노동시장은 형성되지 않았고, 돈도 벌고 공부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가혹한 현실이 되어 이들을 소외시켰다.

시골에서 올라온 10대 여성들은 번듯한 공장에서 일하는 꿈을 안고 상경하지만, 여공이 되기까지 보통 몇 년의 식모살이와 버스안내양 생활을 감내해야 했다. 이들 대부분이 저학력인데다 특별한 기술을 배울 기회가 없었던 터라, 식모나 버스안내양이 되는 길 외에 다른 선택이란 꿈에 불과했던 것이다.

농촌 출신 미혼 여성들이 지속적으로 서울로 유입되면서 서울시 전체 가구의 31.4%가 가정부를 두고 있었으며, 1972년 조사에 의하면 그 수는 무려 24만6천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밥 굶지 않고 사는 서울 가정이면 의당 식모를 둬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는 당시 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가사 보조노동을 수행하는 가정부 일이 여성들이 수행하는 노동에서 높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식모는 여러모로 직업으로 인정되지 않았다.

이들 가정부들은 '기타 서비스업'이라는 항목으로 분류되었는데, 공적 영역에서의 노동이 아니라 가사일의 연장선상에서 수행되는 허드렛일이라는 이유로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들에 대한 호칭에서도 드러나는데, 가정부는 1968년 직업사전에 '하녀'라는 명칭으로 등록되어 있다.

'하녀'라는 단어에 내포된 봉건적인 의미는 이들이 가정 내에서, 혹은 사회적으로 어떻게 대우 받았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1964년 식모들은 500~600원 정도의 월급을 받았는데, 당시 노동자들의 평균 임금이 1만원을 넘어서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들의 노동조건이 매우 열악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월급이란 것도 표면상의 계약일 뿐이고, 월급 액수와 돈을 지급하는 시기는 주인 마음대로인 경우가 많아 매우 불규칙적이었다. "새벽 5~6시부터 청소, 빨래, 밥 짓기, 심부름,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들"을 수행했던 이들이지만, 그 노동의 대가는 남은 찬밥이거나 외출 없는 생활, 부엌데기라는 호칭, 기약 없는 월급이었던 것이다.

근대 산업 시기 하층 여성들이 노동시장으로 진입하여 주변화 되는 방식은 버스안내원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1961년부터 서울 시내버스의 안내원이 남성에서 여성으로 교체되면서 미혼여성들이 대거 버스안내원으로 취직하였다.

버스안내원 역시 식모와 마찬가지로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직종이 아니었기 때문에 상경한 소녀들이 쉽게 얻을 수 있는 직업들 중 하나였다. "친절한 안내를 통해 서울의 이미지를 높인다"는 이유로 여성을 고용했지만, 버스안내원은 하루 평균 19시간 동안 북적이는 만원버스에 시달려야 하는 고된 노동이었고 평균 2400원(1966년 기준)의 임금을 받는 저임금 직종이었다.

겨울철에는 버스에 난방이 되지 않는 탓에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고, 승객을 과도하게 태우다 보니 안내원은 버스에 매달린 채 도로 위를 달리는 위험천만함을 감수해야 했다. 또한 버스안내원으로 일하는 여성들은 거의 대부분 기숙사나 차주의 집에서 생활하였기 때문에 공식적인 출퇴근 시간이 존재하지 않았다. 결혼하지 않은 10대 여성들이 주를 이루었던 버스안내원의 노동 또한 공적인 영역에서의 노동으로 간주되지 못했다.

50년대 신문만평
50년대 신문만평 ⓒ 우먼타임스
이렇듯 1960년대 근대 사업화 초기 대다수 여성들은 공식적인 노동시장으로의 진입 자체가 힘들었고 안정적인 고용 조건은 꿈꿀 수도 없었다. 교육의 수혜를 입지 못한 여성들은 근대적 노동시장의 통계로도 파악하기 힘든 직종에 종사할 수밖에 없었고, 역으로 그러한 직종들은 공적 영역에서 행해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생산적인 일'로 치부되어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한국 사업화 프로젝트는 여성을 국가와 민족의 발전에 공헌하는 적극적인 동원의 대상으로 호명하면서도 동시에 여성의 노동을 남성의 보조적 노동력으로 의미화하면서 성별 분업의 관점을 고수해왔다.

특히 근대 사업 초기 식모와 버스안내양의 노동은 전통적인 여성 일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일로 인정되지 않거나 공적인 노동시장의 주변부에 위치하면서 비생산적인 노동으로 의미 지어졌다.

여성들의 노동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공사 영역의 분리라는 근대적 노동 개념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인 사고틀인지를 깨닫게 된다. 노동시장을 지배하는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는 오늘도 무수히 많은 식모와 버스안내양을 만들어내며 여성의 일을 보이지 않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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