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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표지
겉표지 ⓒ 랜덤하우스중앙
이사카 고타로의 재주는 아무리 심각한 상황일지라도 유쾌하게, 혹은 따뜻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원조교제하던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한 아들이 곰의 탈을 쓰고 응징한다는 <칠드런>을 시작으로 <러시 라이프> <중력 삐에로> <사신 치바> 등에서 그것에 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솜씨를 보여줬다. 살인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도 이사카 고타로의 손길 아래서는 웃고 싶은 마음으로 변한다는 말이 괜한 것이 아니다.

그 마법사가 또 한번 재주를 선보여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무대는 <종말의 바보>다. 먼저 배경을 보자. 배경은 의외로 간단명료하다. '지구종말'이다. 소행성 충돌까지 남은 시간은 3년. 사람들은 죽을 날을 선고받은 셈이다.

할리우드 영화라면 이럴 때 소행성에 핵을 쏜다거나 특공대를 조직해 소행성에 들어가 뭔가를 보여주겠거니 하겠지만, 이사카 고타로는 그런 작위적인 기적은 사용하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도 나오지만, 그런 일은 '영화에서나 일어나는 일'이라고 치부해버린다. 한마디로 그런 기적은 없다. 남은 건, 현실을 인정하는 것뿐이다.

<종말의 바보>의 시작은 의외로 평온하다. 지구종말 사실을 알고 몇 차례 홍역을 치렀기 때문이다. 자포자기하는 것도, 절망하는 것도 지쳤다고 할까? 정확히 3년이 남은 시기, 나름대로 치안은 유지되고 간간이 방송이 나온다. 적어도 길거리에서 살해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는 셈이고 이때부터 큐 사인이 들어간다. 센다이 힐즈 타운에 모여 사는 이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것이다.

첫 번째 주인공은 강압적인 성품의 노인이다. 아들은 노인과 불화를 겪다가 자살했고, 딸은 집 나가서 연락안한지 오래됐다. 아내와 둘이 살고 있는데 노인은 아내를 바보 취급한다. 존경하는 것도 없고, 고마워하는 것도 없다. 당연하다는 듯이 아내를 무시하며 산다. 이 노인은 종말을 앞두고 무슨 생각을 할까?

노인은 어느 날 가출했던 딸과 재회하게 된다. 노인은 그 자리에서 쉬우면서도 어려운 사실을 알게 된다. 남은 3년의 시간은 짧으면 짧다고 할 수도 있지만, 길면 길다고 할 수 있다는 것으로 그 시간동안 옆에 있어주는 사람은 바보 취급하던 아내라는 것이다. 노인은 아내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용서를 빌어야 할 텐데 가능할까? 심각한 상황이건만, 이사카 고타로의 마법 덕분에 웃음만 나온다. 속을 훈훈하게 채워주는 그런 웃음이.

두 번째 주인공은 우유부단한 남편이다. 모든 선택은 아내가 해주기를 기대하며, 또한 실제로 그렇게 살아왔던 남자다. 지구종말을 모르던 시절 남편과 아내는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하지만 남편의 문제로 임신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런데 얄궂게도 지구종말 3년 전에 아내가 임신을 하게 된다. 아이를 낳아야 할까, 말아야 할까? 심각한다면, 정말 심각한 문제인데 구경하는 사람은 즐겁다. 이 또한 첫 번째 이야기처럼 따뜻한 웃음을 나오게 한다.

세 번째 주인공의 등장도 비슷한 효과를 만들고 있다. 주인공 형제는 복수를 하려고 총을 든다. 3년 후에 모두가 죽는다는 걸 아는 마당에 무슨 복수인가 싶겠지만 그것이 더 복수의 이유가 된다. 함께 죽는 것을 용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죽이려던 이에게 총을 겨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발생한다. 죽이지 않아야 복수가 성립된다는 기막힌 반전이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없었던 일로 하면 되겠지만, 밖에는 사명감보다는 폭력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은근히 즐기는 경찰들이 진을 치고 있다. 시한폭탄은 이미 작동됐는데 누구도 다쳐서는 안 되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얄궂다.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상황인데 이 또한 마법의 그늘 아래 있다. 덕분에 살인을 이야기하건만, 순백한 마음만 보일 따름이다. 물론 그 뒤에는 온기가 가득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분 좋은 그런 것이 여운으로 만들어진다.

다른 인물들의 등장도 이와 비슷하다. 종말과 상관없이, 심각하고 또한 복잡하다. 누군가 일깨우지 않으면 종말이 있다는 것도 잊을 정도다. 필사적이라고 할까? 그들은 나름대로 인생을 열심히 채워간다. 또한 막연히 선택을 해서 결과를 얻는 것이 아니라 노력할 수 있는 힘껏 노력해서 결과를 만들어간다. 그래서일 게다. 심각한 상황에서 따뜻해질 수 있는 것은.

이사카 코타로의 다른 작품들에 비교해보면, <러시 라이프>와 <사신 치바>를 섞어 놓은 분위기가 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만큼 부담 없이 기분 좋은 의욕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작품인 셈이다.

물론 팬이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다. 이사카 코타로의 마법은 요즘 소개되는 일본 작가들 사이에서 명품으로 손꼽히고 있으며 <종말의 바보>는 그것으로써 제 색깔이 분명하니 믿어도 좋다. 따뜻한 감동을 맛보는 기회로써.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알라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


종말의 바보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선영 옮김, 현대문학(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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