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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원사'라고 양각된 글씨가 새겨진 와편
'보원사'라고 양각된 글씨가 새겨진 와편 ⓒ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보원사지 발굴현장에서 최근 '보원사(普願寺)'라는 글자가 양각된 기와조각이 출토됐다. 이를 두고 다시 세인들의 관심이 보원사지 발굴현장으로 쏠리고 있다.

가와는 온전치는 않고 위와 아랫부분이 떨어져 나간 조각에 불과하지만 글씨는 선명했다. 그 기와조각으로 인해 보원사지에서 처음으로 보원사임을 확증할 수 있는 유물이 나온 것이다.

30일 서산시의 이강열 학예연구사는 "보원사지에서 '보원사'라는 명칭과 관련된 유물이 나오기는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보원사는 그간 출토된 유물로 볼 때 백제시대와 통일신라, 고려시대를 오르 내르고 있으나 문헌상으로는 통일신라와 고려시대자료에만 언급될 뿐 백제시대 자료에는 존재하지 않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보조선사장성탑비(827년)에 '…가랑협 보원사(加良峽 普願寺)'라는 기록과 최치원의 법장화상전의 화엄대찰(904년) 중 '…웅주가야협보원사(熊州迦耶峽普願寺)'라고 쓴 단편적인 내용과 고려시대의 고려사 세가 6권에(1036년) '…보원사 등의 계단에서 경율시험을 봤다'는 기록 등이 나타나고 1530년에 만든 <신증동국여지승람> 19권에 '보원사 상왕산'이란 내용 등이 보일 뿐이다.

고려시대 중엽 광종대에 보원사는 국사가 주석하는 등 크게 융성했으나 이후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고 조선조 임진왜란을 전후해서 문헌에서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다만 보원사지로부터 4㎞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개심사(654년·백제 의자왕14년 창건)에 보원사에서 1560년께에 제작된 경판이 있어 갑작스럽게 절이 사라진 것이 임진왜란과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추정도 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원사는 신라말에서 고려초인 900년대에서 1000년 사이에 세워졌을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으나 1968년 4월에 밭을 갈던 농부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 보물로 지정된 '금동여래입상(높이 9㎝·백제 6세기 중반 추정)'과 인근 산자락의 바위에 새겨진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마애삼존불과 개심사 등을 연개해 볼 때 보원사도 백제연간에 세워진 것이 아닌가 하는 조심스런 추론도 있다.

보원사지의 발굴조사를 맡고 있는 국립부여문화재 연구소의 관계자는 "현재는 포토조사와 주변에 대한 발굴을 하고 있으나 금당터 등 본격적인 발굴이 이뤄질 경우 언제 창건되어 어느 시대에 폐사가 됐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지역 사계와 학계는 본격적인 발굴조사 이전에 '명문기와'가 출토된 것에 고무되어 틀림없이 천년사찰의 미스터리가 풀릴 수 있을 것으로 잔뜩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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