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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겉표지
ⓒ 문학동네
<광장>의 이명준은 포로교환 장소에서 선택을 강요받는다. 바로 ‘남이냐, 북이냐?’ 하는 것. 이명준이 바다에 뛰어든 지도 벌써 45여 년이 지났다. 그 시간이 흐르는 동안 이명준의 문제는 목숨과 함께 사라진 줄 알았건만 이게 웬일인가? 김영하의 <빛의 제국>에 빼 닮은 문제가 나온다. ‘남이냐, 북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한 남자의 고뇌가.

<빛의 제국>은 하루 동안에 벌어진 일을 삼고 있다. 그 하루의 시작은 ‘김기영’이 연다. 평소에 없던 두통을 앓던 그는 회사에서 ‘명령’을 전달받는다. 북에서 돌아오라는 것이다. 남파간첩 김기영은 당황한다. 십 년의 시간동안 그는 잊혀진 존재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명령을 지시하던 이는 제거된 상태였기에 그는 끈이 떨어진 신세였다. 그런데 연락이 온 것이다. 귀환하라고.

‘간첩’이라는 단어보다 ‘배 나온 평범한 아저씨’라는 설명이 그럴듯하게 어울리는 김기영은 고민한다. 북으로 돌아가 봤자 무얼 할까 싶은 것이다. 재수 없으면 가자마자 죽을지도 모르고, 운이 좋다고 해봐야 여전히 독재자가 있는 북인 것이다. 시장경제의 한복판에 있던 그로서는 쉬이 감당이 안 된다. 그렇다고 해서 남이 좋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이곳 또한 북과 마찬가지로 가당치 않다. 그래도 선택은 해야 한다. 시간은 하루. 그의 고민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 동안에도 시간은 멈추지 않고 흘러간다.

<빛의 제국>은 김영하가 <검은 꽃>이후 3년만에 내놓은 장편소설이다. 그런 만큼 반가울 수밖에 없는데 책장을 넘길수록 반가움의 자리는 당황스러움이 대신하게 된다. 소위 후일담 소설이라는 것들도 ‘시대착오적’이라는 막말까지 듣는 이때에 ‘간첩’이 등장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 아무리 김영하의 호출이라고 하지만 돌아온 간첩은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당황스러움도 잠시, <빛의 제국>은 낯설면서도 낯익은 이야기로 독자의 시선을 잡아끈다. 첫 번째는 '북'을 이야기하는 김기영의 회상이다. 여기에 이데올로기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다. 대신 북에서 겪은 이야기들부터 남으로 내려오기 위해 받았던 과정들이 다수를 이루는데 이것은 낯익은 것 같으면서도 낯설다. ‘간첩’이라는 단어는 다른 나라의 어느 국민보다 잘 알지만, ‘간첩’의 속은 모르기 때문일 텐데 그걸 엿보는 재미는 김영하의 어느 단편소설에 못지 않은 즐거움이 있다.

두 번째는 '남'을 이야기하는 김기영의 주변 인물들의 행동이다. <빛의 제국>은 김기영 뿐만 아니라 아내와 딸, 그리고 형사 등을 내세우는데 이들의 등장은 자연스레 남의 음지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대비되는 것은 운동권 출신 아내 장마리다. 김기영이 고민하는 날, 장마리도 고민한다. 어린 애인의 요청 때문인데 그것은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난잡한 섹스다. 김기영이 고민 끝에 결정을 하듯, 장마리도 결정을 한다. 그래서 그 장면이 찍히는 지도 모른 채 두 명의 남자와 침대 위를 뒹군다.

딸 현미는 어떨까? 세상의 웃음거리가 됐던 가장 친한 친구를 지켜준다고 하면서도 필요에 의해 그 친구를 팔아버리는 딸 역시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소통 안 되는 세상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눈을 보고 말할 때는 버벅 거리면서도 문자로 말할 때는 누구보다 말 잘하는 그런 모습의 아이로써 말이다.

이런 딸과 아내가 있는 남, 이미 변해버린 북 사이에서 김기영은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김기영의 선택은 이명준의 것과 다르다. 비교한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선택한 뒤의 뒷모습은 다른 쓸쓸함을 남겨준다. 이명준은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 바다로 뛰어들기라도 했지만, 김기영은 스스로의 선택에도 아랑곳없이 돌아와야 했기 때문인데 문제는 그 모습이 간첩 김기영만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모습은 이명준과 달리 허무로 점철되어진다. 문제의 하루가 지나간 뒤에도 더욱 그렇다.

이야기 구조상 ‘선택’을 할 때까지 점층적으로 긴장감을 쌓아간다. 재미가 상승하는 과정도 마찬가지. 읽을수록 손에서 놓기 힘든 작품인 셈이다. 특히 이 책의 제목으로 쓰인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이 작품 속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하며 본다면 더욱 흥미롭다. 빛과 어둠이 기묘하게 공존하는, 한낮의 하늘 아래로 야경이 담긴 그림을 등장인물들과 결부시켜 보는 것은 제국의 그늘에서만 찾을 수 있는 재미임에 분명하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알라딘 개인블로그에도 게재했습니다.


빛의 제국 (교보 특별판)

김영하 지음, 문학동네(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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