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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무교동 한 호프집에서 전기철 시인이 불쑥 내민 시집이 <아인슈타인의 달팽이>라는 제목의 시집이었다. 시집을 펼치는데 눈동자를 잡아끄는 것이 '불뚝, 불뚝'이라는 시였다.
'불뚝'은 갑자기 불룩하게 솟아오른 모양을 말한다. 상대와 이야기하다가 입을 쑥 내밀며 성난 태도로 무뚝뚝한 모습을 일러 불뚝하다고 표현하곤 한다.
이 시는 일기를 쓰듯 쉽게 서술한 시이다. 그런데 자꾸 '불뚝'이 '불도(佛道)'를 연상시키는 것은 왜일까? 시인이 유난히 불교와 긴밀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인연의 소중함 때문? 그도 아니면 긴 세월 동안 쌓은 인간의 업보 탓일까?
아무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집과 직장을 오가는 한 도시인, 한 모더니즘 시인의 명치를 두들기는 것은 우연인 듯 우연이 아닌 모습으로 다가선 길가의 돌멩이이다. 돌멩이는 시인의 또 다른 자아이다. 굴러다니는 돌멩이는 도시의 이방인이고 중심축이 무너져버린 세상, 어른이 사라져버린 우리 시대 지식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모두가 네 탓이라며 아우성칠 때 불현듯, 군중 속의 고독으로 끼여 있는 한 시인이 그 반경을 밀치고 나가는 속 울음 같은 것이다. 먼바다로 떠나고 싶은 찢어질 듯 나부끼는 포구의 깃발 같은 것. 무언의 돌멩이를 통해 흡사 마오쩌둥의 혁명 같은 반면교사를 하고 싶은 것이다.
자연과 인간이라는 거대한 구조 속에서 나누면 나눌수록 또 나누어지는 숱한 인연의 고리를 통해 우리는 살아간다. 그걸 잠시 잊고 살 뿐이다. 저 해무 낀 바다에 몽돌, 깊은 산 속의 돌멩이 하나 그냥 버려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물며 사람과의 만남, 인연, 사랑은 어떠하랴. 채근담에서는 "남에게 베푼 일은 잊어버려도, 남에게 신세진 일은 잊지 말라"고 한다.
때로 사람들은 세상과 등지고 살고 싶어한다. 그러나 잊는 것과 비우는 일은 다르다. 다시 노자는 말했다. "무엇을 접고 싶다면 반드시 먼저 펴주라. 빼앗고 싶다면 먼저 그것을 내주라"고. 간단치 않은 세상사의 일갈이다. 그러나 그도 마음이 없으면 보고도 안 보이고 들어도 들리지 않는 법이니…. 그러기에 시인의 눈에 걸리는 이런 풍경은 늘 경이롭다.
영국 시인 콜리지는 말했다. "만나서 알고,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이 모든 사람의 슬픈 이야기"라고. 그렇다면, 다시 만나는 것은 기쁜 인생인가? 오늘은 돌멩이를 거울삼아 뒤안길을 반추해보면 어떨는지?
덧붙이는 글 | 섬과문화(www.summunwha.com)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