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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의 편지, 원래 선생님의 필체는 달필로 매우 힘이 있었다. 워낙 나이드신 탓으로 필체가 흐려지셨다.
선생님의 편지, 원래 선생님의 필체는 달필로 매우 힘이 있었다. 워낙 나이드신 탓으로 필체가 흐려지셨다. ⓒ 박도
금년처럼 더위에 고생하기는 처음이었다. 이 더위에 글쓰기에 고생 많이 했지. 자신의 사상이 결집되어 한 권의 책으로 변신하여 출간될 때의 환희는 작가만이 느낄 수 있는 가치이겠지. ……

명작은 끝없는 사색과 체험, 감동이 있어야 되겠지. 노작(勞作)을 바라네. 나는 내일이 100세이나 아직도 감정이 식지 않아 지금도 시를 쓰고 있네. 내 소년시절의 하루를 생각해 주면서 일독 바라네.

슬픈 추억
- 어린 시절 이야기

박철규(전 중동고등학교장)

소년의 설날은
어느 동화속의 왕자 그대로였다.
연분홍 두루마기에 검정 돌띠를 둘렀다

강풍에 연줄이 끊어져
멀리 멀리 바다로 날아갈 때
소년은 끝내 연을 놓치고는 눈물 콧물 훌쩍이며 돌아왔다

하늘이 처음 열리는 그날부터
바닷물에 씻긴 천인단애의 절벽 노송 마른가지에는
하루 종일 황새 한 마리가 졸고 있다

노고지리가 공중에서 지저귀는 늦봄
길길이 자란 보리밭 이랑에는 푸른 물결이 일렁이고
바닷물이 핥고 지나간 백사장,
맨발로 게를 쫓기에 하루해가 모자랐다

서쪽 하늘이 벌겋게 타는 저녁놀
어린 목동들은 제각기 소를 몰고 돌아오는 황혼길
쇠 방울소리가 그렇게 정다웠다

휘어청 가을달이 하늘에 걸리고
건너 마을 강강술래의 윤무(輪舞)가
달무리를 타고 돈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밤
멀리 멀리 돛단배 한 척이
먼 포구로 돌아간다

10여 년 전 시집 <최후의 이야기>를 펴낼 때 겉표지 사진
10여 년 전 시집 <최후의 이야기>를 펴낼 때 겉표지 사진 ⓒ 박도
백수(白壽, 99세)를 앞둔 스승이 환갑을 넘긴 둔재 제자에게 '아편 한 줌'을 보냈다. 선생님은 고교 1학년 때 국어선생님으로 내 우상이었다. 훤칠하신 키에 미남으로 그 무렵 인기 외화 <우정있는 설복>의 케리 쿠퍼를 닮았다고 좋아했다.

선생님은 가난한 시골뜨기 제자를 첫 시간부터 기억해 주시고, 문학의 길로 인도하였을 뿐 아니라 모교로도 불러주셨다. 당신의 제자가 아직도 문명을 얻지 못함에 무척 안타까워하시면서 노구임에도 떨리는 손으로 아편(격려)을 담은 편지를 보내셨다.

원래 선생님은 달필이셨다. 그런데 이 즈음은 팔에 기운이 다해가시는지 필체가 흐리시다. 아무튼 백수의 노인이 맑은 정신으로 시를 담아내시는 정성이 놀랍다. 이 가을 스승이 보낸 아편을 먹고 용기백배하여 글방 책상을 더욱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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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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