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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에서 수세미 노점을 하는 맹인 아버지와 그 아들. 아들의 미소가 환하다.
시장에서 수세미 노점을 하는 맹인 아버지와 그 아들. 아들의 미소가 환하다. ⓒ 김남희
ⓒ 김남희
모하메드는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믿음이 깊은 한 족장의 집 문을 두드렸다. 족장의 아내인 자이납이 그에게 문을 열어주러 달려왔다. 그녀가 문을 열자 바람이 불어 그녀의 옷에 주름이 지면서 가슴이 드러났다. 모하메드는 넋을 잃었다. 그는 즉시 사랑했던 다른 모든 여인을 잊었다. 그는 손을 들어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저의 마음을 변덕스럽게 만들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알라 신이여."

나는 포트 사이드에서 나를 극동 지역으로 데려가 줄 일본 국적의 증기선에 오르면서 똑같은 감사기도를 드렸다. 나는 전에 사랑했던 나라들 모두와 나의 합법적이며 불법적인 지리적 사랑 모두를 단번에 잊어버리고, 나의 자아 전체를 새로운 연정과도 같은 모험심으로,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몽골리언의 눈과 움직임 없이 신비롭고 굳은 미소로 가득한 먼 곳으로 향했다.

- 니코스 카잔차키스 '천상의 두 나라' 중에서


올드 시티 사나의 전형적인 건축물 - 타워 하우스. 때로는 8층 높이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올드 사나에만 일만 사천 채의 타워 하우스들이 서 있다.
올드 시티 사나의 전형적인 건축물 - 타워 하우스. 때로는 8층 높이까지 높아지기도 한다. 올드 사나에만 일만 사천 채의 타워 하우스들이 서 있다. ⓒ 김남희
거리의 모든 남자들은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 그대로 여전히 칼을 차고 다닌다.
거리의 모든 남자들은 수백 년을 이어온 전통 그대로 여전히 칼을 차고 다닌다. ⓒ 김남희
낯선 길 위에 서면 심장은 먼 북소리처럼 울려대기 시작한다. 국경을 넘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새 땅을 향해 귀와 눈과 마음은 활짝 열린다. 새로운 것에 대한 이 지독한 호기심은 옛것에 대한 탁월한 망각의 능력과 맞닿아 있다.

다시 낯선 길 위에 서는 날이면 나는 그전 나라를 여행하며 익힌 인사말이며 숫자, 생존을 위한 간단한 표현마저 까맣게 잊어버린다. 마음이 돌아선 연인처럼 그토록 뜨거웠던 열정은 금세 식어버리고, 낯선 풍경에 무섭도록 매혹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누군가 내게 지금까지의 여행 중에 가장 좋았던 나라가 어디냐고 물어오면, 대답은 언제나 같을 수밖에 없다. "지금 여행하고 있는 나라"라고.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을 거쳐 아라비아 반도의 남쪽에 자리 잡은 나라 예멘에 들어서던 날, 심장은 다시 북소리를 내며 울려대고 있었다. 그곳의 수도 사나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 나는 지금껏 사랑했던 모든 땅을 잊었다.

아름다움에는 때로 불편함이 따른다. 올드 시티 사나의 부족한 수도시설은 어린 아이들을 물 긷는 일에 동원되도록 한다.
아름다움에는 때로 불편함이 따른다. 올드 시티 사나의 부족한 수도시설은 어린 아이들을 물 긷는 일에 동원되도록 한다. ⓒ 김남희
동서남북 어디를 향해도 반경 1킬로미터 내에서는 단 한 채의 현대적인 건물과도 마주치는 일이 없는 올드 시티 사나.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동서남북 어디를 향해도 반경 1킬로미터 내에서는 단 한 채의 현대적인 건물과도 마주치는 일이 없는 올드 시티 사나. 도시 전체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 김남희
2500년을 건너온 옛 도시 사나는 시간이 멈춘 땅이었다. 거리의 남자들은 몇 백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여전히 허리에 칼을 차고 있었고, 여자들은 눈만 내놓은 검은 옷자락을 끌며 걷고 있었다. 눈만 살짝 드러난 여자들이 서로 알아보고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 내게는 마법처럼 신기했다. 일없는 남자들이 콰트 잎(니코틴을 함유한 야생 잎)을 씹고 있는 옆으로는 당나귀를 탄 노인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집들은 모두 오래된 벽돌집이었고, 회반죽으로 덧댄 창마다 정교한 조각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거리에 차들이 다니고, 기도시간을 알리는 뮈아젠이 확성기를 쓴다는 걸 빼면, 그곳은 서기 611년, 신의 계시를 받은 무함마드가 살던 시절과 별다를 게 없어 보였다.

우리처럼 갈라진 땅이었으나 90년 초에 급작스런 통일을 이루면서 한반도를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남겨놓았던 예맨. 2000년 초반까지도 예멘의 이미지는 악명 높은 외국인 납치(1991년 이후 200건의 외국인 납치를 기록했다)와 결코 끝나지 않는 부족 간의 전쟁과 테러, 알 카에다로 이어지는 혼란스러움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예멘은 유향과 몰약과 향료 무역으로 그 이름을 떨쳐왔고, 세계에서 최초로 커피를 재배한, 모카커피의 원산지였다. 그보다 더 긴 시간을 건너가 본다면 성경 속의 노아가 그의 방주를 띄운 곳이었다. 그리고 3000년 전 황금과 향료와 대규모 사절단을 이끌고 예루살렘의 왕 솔로몬을 찾아가 그와의 사이에서 아들까지 낳았다는 전설의 여왕, 시바의 땅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이 땅의 사람들은 여전히 자존심이 강하고, 지독하게 독립적이라고 했다.

사나 곳곳에는 당연히 칼 ‘잠비아’를 파는 가게들이 많다.
사나 곳곳에는 당연히 칼 ‘잠비아’를 파는 가게들이 많다. ⓒ 김남희
어린 소년들도 칼을 차고 다닌다.
어린 소년들도 칼을 차고 다닌다. ⓒ 김남희
수천 년을 이어온 삶의 방식이 그대로 남아 있는 예멘이어서일까? 여행은 쉽지 않았다. 영어는 통하지 않았고, 수도인 사나를 제외한 모든 지역은 허가서를 받아야 했고, 어떤 곳은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 하는 여행사를 낀 방문만 가능했다.

예멘은 사나만 벗어나면 중앙정부의 통치권이 미치지 않는 곳이 많다고 했다. 그런 곳은 부족장들이 다스리는 전통이 그대로 남아있고, 남자들이 칼 대신 총을 차고 다니는 곳이었다. 내가 발 딛지 못한 그곳들은 기약 없는 다음 방문을 위해 남겨두어야 했다.

빠듯한 예산과 짧은 일정으로 돌아볼 수 있는 곳은 제한되어 있었기에 예멘에 머문 2주간 다녀온 곳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한 도시가, 나라 전체를 대신하기도 한다. 나는 이미 사나의 올드 시티 한 곳만으로 이미 마음을 다 빼앗긴 상태였다.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걸어가도 한동안 단 한 채의 현대적인 건물과도 마주치지 않는, 그 완벽하도록 잘 보존된 도시.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일만 사천 채의 '타워 하우스'들이 서 있는 올드 사나. 그곳은 내가 만난, 세상에서 가장 어여쁜 수도였다.

설탕에 절인 대추야자를 파는 가게. 대추야자 열매는 오랫동안 아라비아 반도 사람들의 중요한 간식거리였다.
설탕에 절인 대추야자를 파는 가게. 대추야자 열매는 오랫동안 아라비아 반도 사람들의 중요한 간식거리였다. ⓒ 김남희
ⓒ 김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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