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여기저기 분석이 난무한다. '된장녀'말이다. 못생긴 '된장'에 비유해서 한국인의 전형적인 외모지상주의라는 비판(K신문)부터 인터넷에 번지는 마초주의에 불과하다는 의견(K일보), 심지어 이것저것 다 생각하기 싫다며 취향의 문제일 뿐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분석도 있었다.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대충 포탈에 달리는 댓글과 언플(언론플레이)만 보고 기사가 쉽게 쓰인 탓이다.

본질에서 자꾸 벗어나는 된장녀 논란

지금의 된장녀에 대한 분석은 본질에서 너무 벗어나 있다. 단순히 외모지상주의자들의 찌질이짓(다른 사람에게 쓸데없이 피해를 준다는 의미의 인터넷 은어)이나 마초들의 반발 정도만으로 보기엔 지지층이 너무 광범위하다. 여기서 된장녀 논란을 촉발 시켰던 '된장녀의 하루'라는 글의 일부를 살펴보자.

"마치 내가 전지현, 한가인이 된 듯한 기분이다"
"샤넬 넘버 파이브의 냄새는 강의실을 진동하게 만든다"


단 두 문장을 제외하고는 여성의 외모에 대한 언급은 전무하다. 정작 스타벅스, 아이쇼핑, 뉴요커 등 20대 후반 여성의 생활패턴이 조소의 대상일 뿐이다. 된장녀 논란의 핵심은 바로 '생활패턴에 대한 조롱'이다. 지금까지 인터넷 공간을 달군 '엘프녀', '떨녀'와 같은 '~녀 시리즈'처럼 단순한 외모지상주의가 아닌 뿌리 깊은 남성들의 심리적인 반발이 존재하고 있다.

그 반발의 대상은 '섹스앤시티'나 '프렌즈'에 등장하는 '쿨'해 보이는 20대 후반의 미국 여성상이다. 마치 미국의 젊은 도시 여성상이 이상적인 여성의 표준인양 받아들여지고 있는 지금 한국 문화에 대한 직격탄인 셈이다. 실제로 '된장녀의 하루'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된장남의 하루'가 생각만큼의 공감을 얻지 못하는 이유도 후속작이 전작의 '스타벅스 커피'를 단순히 '양주'로만 치환했을 뿐, 근본적인 심리의 허영심을 잘못된 곳에서 찾았기 때문이다.

여자만 해당되나? 진짜 본질은 생산성의 소멸

된장녀 비판이 의미 있는 것은 단순히 비판의 숨은 칼날이 '여성'만 겨냥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지금 인터넷 공간에서 비판이 되고 있는 대상은 분명히 20대 후반의 여성이다.

▲ 스타벅스 그린티 프라프치노. 한 잔에 5천원이 넘지만 문제는 5천원도 그들이 직접 번 돈이 아니라는 것
ⓒ 스타벅스
그렇지만 된장녀 논란의 근본은 현재 한국 20대 후반 젊은층에서 퍼지고 있는 생산성이 전무한 무작정 '미국녀 추종하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쿨’하게 여겨지는 여성상을 선보인다는 앞에서 언급한 미국 드라마나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류의 칙릿(Chick-lit) 소설에서 주인공의 행동거지가 바로 추종의 대상이다.

그런데 한국에는 이러한 행동양식이 이상하게 수입되고 말았다. 칙릿 류의 소설에서 등장하는 미국 커리어 우먼들의 경제적 자립심은 쏙 뺀채 소비패턴, 심리패턴만 카피하고 있다. '허영심'으로 요약 가능한 이런 패턴에는 생산성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볼 수 없다.

가령 '된장녀의 하루'란 글의 원문을 다시 살펴보자. 수업시간에 계속 의미없는 문자질을 주고받거나 아빠를 졸라 타낸 돈으로 명품 가방을 사는 대목에서 커리어우먼들의 경제적 자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쿨'해 보이고는 싶어 하지만 그 '쿨함'의 근본인 돈은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하고 부모에 의존하는 된장녀(혹은 된장남)로 지칭되는 20대 후반의 행태는 그래서 생산성이 없다는 말이다.

최소한의 쿨함을 유지하기 위해 미국 NBC 시트콤 <프렌즈>의 부잣집 외동딸 레이첼은 BMW를 공짜로 사주겠다는 부모의 제안도 거절하고 웨이트리스로 피나는 노력을 하면서 돈을 벌었다. 혼자서 빨래도 할 줄 몰라서 흰 옷을 붉은 옷과 섞어 빨아 빨래를 망치던 레이첼이 나중에 집안 재산에 비하면 정말 새발의 피도 안되는 월급봉투를 들고 좋아하는 모습이야말로 진정한 커리어우먼의 모습이다.

▲ <프렌즈>의 레이첼. 빨랫감도 구분할 줄 모르지만 자립의지만큼은 강하다
ⓒ 강현석
화려한 패션으로 이목을 사로잡은 <섹스앤더시티>의 화려함은 칼럼니스트, 변호사, 홍보 대행사 대표, 큐레이터같은 주인공들의 확실한 직업을 기반으로 한다. 화려해 보여도 불로소득은 없는 셈이다. 된장녀 논란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경제적 자립을 쉽게 이루지 못한 젊은이들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는다. 된장녀를 운운하는 네티즌들의 다수야말로 알고나면 '경제적 자립력'이 없는 진짜 비판의 대상이라는 게 된장녀 논란을 즐기는 숨은 묘미다.

물론 된장녀라는 게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선동적인 비판임은 틀림없다. 그렇지만 된장녀 논란은 이제껏 '겉모습'에만 치중한 인터넷 문화가 아닌 '심리현상'을 비판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것이 우리가 '된장녀의 하루'를 단순한 찌질이 네티즌의 눈길끌기 정도로만 봐서는 안 되는 이유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