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화투모양으로 만든 개인 출석부. 기억을 되새기는 대는 화투만한 것이 없다고.
화투모양으로 만든 개인 출석부. 기억을 되새기는 대는 화투만한 것이 없다고. ⓒ 김혜원
가을이 든다는 입추라는 말이 무색하게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8월 8일. 웃음치료사이며 치료 레크리에이션사과정을 밟고 있는 조영희씨와 함께 그녀의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서초치매노인주간보호소를 찾았다.

"오늘이 무슨 날이지요?"
"…."
"에이~ 기억을 해보세요. 24절기 있잖아요. 그중에 오늘이 가을이 온다는…, 그 뭐더라?"
"입추."
"맞아, 입추야."
"네, 맞아요. 잘 하셨어요. 오늘이 입추예요."

아주 쉬울 수도 있고 생각하기 따라서는 다소 어려울 수도 있는 질문이지만 조금 머뭇거렸을 뿐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이내 기억을 더듬어 정답을 내놓는다. 가물가물한 기억의 문을 두드리는 조 선생의 질문이 또 이어진다.

"내일은요? 내일은 무슨 날이죠? 그 왜 삼복 중에서 제일 마지막이라는…, 뭐더라?"
"말복이야."
"맞아. 말복이 맞아."
"어머니, 아버지, 예전 생각나세요? 그 땐 왜 형제간이나 이웃간에 복날이 되면 수박도 나눠먹고 닭도 잡아 선물하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맞아. 그랬어. 보신탕도 먹고. 삼계탕도 먹고…."

보신탕과 삼계탕, 그리고 복중에 나누어 먹던 음식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표정이 밝다.

치매라서 모를 거라고? 무시·경멸 다 느낀답니다

경증치매는 증상에 따라 잠깐씩 혹은 좀 더 자주 기억의 저편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의 경험을 주고받을 때는 정상인과 다르지 않아 환자라는 사실을 잊어버리게 하는 특징이 있다.

행동이 조금 느리고 말이 조금 느리다는 것을 제외하면 조 선생의 학생들은 외양상 여느 어르신들과 전혀 다름이 없어 보이는 멋쟁이 노인들이다.

오늘의 반장으로 뽑히신 할아버지.
오늘의 반장으로 뽑히신 할아버지. ⓒ 김혜원
"저 분들도 젊은 시절에는 모두 자신의 역할을 톡톡히 하신 분들이세요. 훌륭하게 자제분들을 키워내신 어머니들이고, 또 몇 분은 젊은 시절 전문직에 종사하셨던 엘리트도 계시지요. 가끔씩은 저도 모르는 지식들 이야기를 해주시는데 깜짝 놀라지요.

저 분들이 치매라고 함부로 말하거나 무시하거나 경멸하면 안 됩니다. 정신이 돌아 왔을 때는 정상인과 다름이 없거든요. 그래서 '누가 나를 무시하는구나' '나를 싫어하는구나' 하는 것을 다 알고 계시거든요."

능숙하게 노인분들과 소통하는 조영희씨는 치매노인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증상이 더 이상 진행되거나 악화되지 않도록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어둔한 손놀림, 그래도 그 솜씨가 어디 가랴

이날은 말복을 하루 앞두고 예전에 어르신들이 직접 만들었던 '화채 만들기' 수업을 진행했는데 이런 수업을 통해 단기 기억과 간단한 작업 능력 등을 훈련하게 된다고 한다.

"각자 좋아하는 과일을 말해보세요."
"참외."
"난 수박이 좋아."
"나도 수박이 좋아."

좋아하는 과일을 말하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유치원 어린이들처럼 천진해 보인다.

할아버지도 화채 만들기가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할아버지도 화채 만들기가 재미있으신가 봅니다. ⓒ 김혜원
"그럼 이제 수박화채를 만들어 보세요. 어머니는 많이 만들어 보셨지요? 이렇게 더운 날 학교 다녀오는 아들 딸들을 위해 만드셨잖아요. 오늘은 아들딸 말고 우리가 먹을 거니까 더 맛있게 만들어 보세요."

예전에는 눈을 감고도 만들었을 수박 화채도 지금은 그리 쉬운 작업이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열심이다. 손에 느껴지는 감각이 어둔해서 예전처럼 빠르고 예쁘게는 할 수 없을지라도 뭔가 내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생긴 것이 좋으신지 수저를 잡고 수박을 긁고 과일을 자르는 손들이 신이 났다.

"이거 봐요. 이렇게 하면 되지?"
"아이구, 수박 구멍나겠네. 어쩌면 그렇게 알뜰하게 긁어. 퍼런 거 들어가면 맛없어."
"이건 뭐지? 키위? 그래, 키위도 잘라야지."
"할아버지는 뭐해요. 거기 사이다 좀 부어줘요."
"거 자꾸 먹던 수저로 맛 좀 보지 말아. 여러 사람 먹을 건데 입에 넣었던 수저로 자꾸만 맛을 보면 더럽잖아."
"더럽긴…, 맛만 좋다. 하하하… 호호호…."

어둔한 손놀림이지만 예전에 만들었던 솜씨가 어디 가랴.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화채는 멋지게 완성됐다. 다 만들어진 화채를 바라보는 어르신들의 시선에 자랑스러움이 묻어난다.

퀴즈입니다. 화채속에 사과를 넣었을까요? 안 넣었을까요?
퀴즈입니다. 화채속에 사과를 넣었을까요? 안 넣었을까요? ⓒ 김혜원
"먹자."
"잠깐만요. 공부 한 번만 하구요. 자~ 이제 화채를 보자기로 가리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화채를 만들 때 넣었던 과일들을 하나씩 맞춰 보시는 거예요. 맞으면 동그라미, 틀리면 엑스를 저에게 보여 주시면 됩니다."
"수박 들어갔나요? 오, 엑스?"
"오. 맞았습니다. 잘하셨어요."
"키위는요? 참외랑 바나나는요?"
"오지요. 잘 하셨어요."
"사과는 어떤가요?"
"들어갔다는 분도 있고 안 들어갔다는 분도 있네요. 네, 알았습니다. 수고하셨고요. 이젠 맛있게 드세요."

초기 치매는 약물치료만으로도 큰 효과

수업 내내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얼굴을 떠나지 않았던 밝은 웃음을 보면서 치매노인을 위한 전문시설이 왜 필요한지 새삼 그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었다. 다만 아직은 우리나라 곳곳에 이런 시설들이 충분히 설치되어 있지 않아서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인원이 지극히 한정되어 있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건강박수 쳐봅시다. 아랫 쪽 손바닥을 치면 대장과 신장기능이 좋아진답니다.
건강박수 쳐봅시다. 아랫 쪽 손바닥을 치면 대장과 신장기능이 좋아진답니다. ⓒ 김혜원
여든 중반을 넘기신 시어머니와 칠십 중반을 넘기신 친정 아버지가 있는 나로서는 노인성치매가 남의 일로 느껴지지 않는다. 늘 집에서 마주치는 시어머니나 가끔씩 보는 친정 아버지의 기억력이나 인지능력이 하루가 다르게 떨어지는 것을 심각하게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치매노인주간보호소를 직접 찾아보기 이전엔 나 역시 막연히 시설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막상 시설에 와서 즐겁게 생활하는 어르신들을 보니 내 걱정이 지나친 기우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매가 질병이라면 그에 따른 전문적인 치료와 재활서비스를 받아야 하는 것이 환자나 보호자를 위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수업을 마치고 서초 치매노인주간보호소의 이원이 과장을 만나 치매노인주간보호소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들어보았다.

이원이 과장은 "월 18만 원의 실비만을 받고있는 서초주간보호소의 경우 아직은 십여명 정도의 환자를 받는 데 그치고 있다"면서 "사회의 노령화에 따라 중증환자의 보호나 종일 보호 등의 요구도 늘어가고 있는 만큼 보다 심층적이고 전문적인 치매요양시설의 마련이 시급하다"고 한다.

또 이 과장은 "아직은 우리 사회가 치매라는 질병에 대해 무지할 정도로 정보가 없다, 초기에 얼마든지 치료하거나 예방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데도 이를 몰라 치매환자를 양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치매도 하나의 질병이므로 창피하다거나 자존심 상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가족과 본인이 적극적으로 병원 등 전문기관을 찾아 미리 진단을 받고 치료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초기의 경우 간단한 약물투여만으로도 상당한 치료 효과를 보인다고 한다.

그는 "노인분이 있는 가정의 자녀들은 어르신의 행동이 전과 달라졌다거나 이상행동을 보이시는 경우 빨리 병원을 찾아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면서 "중증으로 진행되기 전에 미리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다면 얼마든지 치매의 위험에서 벗어나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노후를 맞을 수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