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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은 배의 맨 앞부분인 이물 쪽 난간에 나란히 기대어 서서 두 곳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오른쪽으로 신라의 땅이 보이고, 왼쪽으로는 일본의 대마도가 마주 보고 있었다. 돛은 준비되어 있었다.

바람도 적당했고, 방향을 조정하는 키도 온전하다. 거기다 식량까지 충분했다.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갈 수가 있는 것이다. 문제는 어디로 가느냐는 것이다. 왕신복이 먼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김충연도 몸을 돌리며 둘의 시선이 딱 마주쳤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다가 김충연이 말을 하기 위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였다. 배의 좌현 쪽 난간에서 풍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얼음장 같이 차가운 둘의 시선이 마주치는 것과 동시에 난간으로 달려갔다. 방금 까지 갑판 위에 기대어 앉아 있던 박영효가 보이지 않았다. 스스로 바다 위에 몸을 던진 것이다. 난간 쪽 바다 밑을 바라보자 방금 물에 빠진 곳에서 거품이 올라오고 있었다. 왕신복이 바다 쪽으로 뛰어들려는 데 김충연이 그의 팔목을 세게 쥐며 막아섰다. 그리고는 고개를 옆으로 내저었다.

"그의 선택을 존중해주자구."
"하지만…."

"그는 무사로서 어려운 결단을 한 것이야. 박영효도 나처럼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화랑출신이었지. 신라로 다시 돌아갈 면목이 없었던 게야."

왕신복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난간에서 내려왔다. 이어 갑판에 주저앉은 채 난간에 기대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목숨보다 소중한 그 무엇이 있는 법이지. 네가 그토록 살고자 했던 것도 네 목숨이 아까워서 그런 것은 아니잖아."

왕신복은 김충연의 말을 들으며 먼바다 쪽을 올려다보았다. 돛대와 난간 사이로 붉은 노을이 점점이 퍼지며 하늘과 바다를 물들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수평선 위 푸른 장막이 핏빛 노을에 겹겹이 말려들고 있었다.

김충연도 왕신복 옆에 나란히 앉아 함께 그 노을을 바라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흘렸던 피가 저렇게 노을이 되어 하늘을 물들이는 게야."

김충연이 반쯤 옆으로 돌아앉으며 왕신복을 건너다보았다.
"어긋난 것을 바로 잡으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까?"

"모든 걸 순리대로 다시 되돌려 놓으면 돼."
"순리대로라면……."

"맨 처음 뒤틀어진 것부터 바로 잡아야지. 우린 폭풍우 때문에 훨씬 빨리 여기까지 밀려왔어. 지금이라도 일본으로 향한다면 오히려 사절단 보다 먼저 도착할 수 있을 게야. 우린 이제 바람을 타고 움직일 돛대가 있지 않아? 더구나 일본 땅도 바로 저기 코앞이야."

그러면서 몸을 일으켜 눈앞에 펼쳐진 대마도를 가리켜 보였다. 활대처럼 길쭉한 섬이 수평선과 맞닿은 채 구름과 섞여 있었다. 마치 손을 내밀면 단숨에 잡힐 듯이 가깝게 보였다. 왕신복이 그 섬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일본이 신라만 공격하지 않으면 신라도 굳이 먼저 나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야. 신라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

왕신복은 결연한 표정으로 말을 마치고 옆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김충연은 옆에 없었다. 그는 갑판 중앙의 포판 위에 선 채 돛대를 들어올리고 있었다.

"뭐해? 어서 오지 않고."

왕신복은 잠시 그 자리에 선 채 비씩 웃음을 흘렸다. 그는 입술을 움직여 무엇이라 말하라고 하다가 그만두고 이내 그쪽으로 달려갔다.

둘이 힘을 합해 돛대를 일으켰고, 왕신복이 그 돛대를 잡고 있는 동안 김충연이 쇠못과 나무못을 갑판 중앙에 솟아있는 범주에 박았다. 그리고 밧줄로 단단히 묶자 돛이 정면으로 갑판 가운데에 섰다. 거센 바람이 불어와도 돛대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왕신복이 활대 사이를 연결한 아디 줄을 잡아당기자 돛이 자유롭게 옆으로 움직였다. 바람은 다행히 동남쪽으로 불고 있었다. 그 방향으로 돛을 돌리자 배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왕신복이 돛을 조정하는 동안 김충연은 이물로 달려가 키를 단단히 거머쥐었다. 바람에 따라 키를 조정하여 배의 방향을 일본으로 향하게 했다.

탄력을 받은 배가 속도를 점점 내며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의 정면으로 바닷물이 넘실 튀어 올라 하얀 물보라가 일었다. 대 여섯 마리의 물새가 급히 날개를 저으며 돛대 위를 스쳐 배가 떠가는 방향을 앞질러 갔다. 눈부신 햇살이 드리운 바다는 금빛 은빛을 황홀하리만큼 아름다운 비단 폭을 널따랗게 펼쳐놓고 있었다.

파도가 점점 거칠게 일었다. 덩달아 바람도 세게 불어왔다. 배는 점점 속도를 내고 있었다. 바람 탄 그네처럼 이물이 하늘 높이 솟았다가 바다 깊숙이 곤두박질 치며 물줄기를 두 갈래로 갈라놓았다. 배가 한쪽으로 기울 때마다 팽팽한 돛이 푸르릉 소리를 내었다. 돛대 끝 말갛게 올려다 뵈던 하늘은 어느새 한지 위에 먹물이 스며드는 것처럼 점점이 어둠으로 물들고 있었다.

이제 천지는 바야흐로 어둠의 세계였다. 위로 아래로 동서남북으로 눈 닿는 끄트머리 어디를 바라봐도 있는 것은 시커먼 수평선과 맞닿은 바다와 하늘 뿐. 그 바다와 하늘을 가르며 위태롭게 떠가는 까만 한 점. 창창한 하늘 허허한 바다에 비하면 너무나 작디작은 한 점 티끌이나 다름없는 그 한 점이 삼한 땅의 무거운 운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급히 향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그동안 소설<762년>을 함께 해주신 독자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 더 좋은 소설로 독자여러분과 함께 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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