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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끼던 세 명의 장졸이 끝까지 배에 남아 물을 퍼다가 참변을 당하고 말았습죠."

"더 이상 하늘의 진노를 받기 전에 사실대로 말해보거라."

박영효는 가만히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명주(溟洲)를 지키는 변수장(邊守障)의 책임자로 있을 때의 일입니다요."

"명주라 하면 발해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군사 요충지가 아니더냐?"

"그렇습죠. 저는 거기서 신라도를 거쳐가는 사람들을 단속하고, 발해의 군사 동향을 중앙에 보고하곤 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상대등 영감께서 제가 있는 곳까지 손수 찾아오셨습니다. 오셔서 발해의 최고 대장군과 연줄을 놓을 수 없냐고 부탁을 해왔습니다."

여태 듣고만 있던 왕신복이 자신도 모르게 끼어 들었다.
"발해의 대장군이라면…."

"좌우맹분위(左右猛賁衛)를 지휘하는 대장군 양승경이옵니다."

"그 자와 연줄을 놓아 어떻게 하였단 말인가?"

"저는 그 장군을 뵙고 상대등 나리의 서찰을 직접 전했습니다. 대장군은 서찰을 읽어보시고 흡족한 표정으로 답신을 적어주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명주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상대등 나리에게 전해 드렸습죠. 그 후로도 몇 번이나 두 분 사이의 연통을 제가 전달하곤 하였습니다."

김충연과 왕신복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발해의 최고 군사 책임자와 신라의 상대등이 오래 전부터 교류를 해왔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 때문에 교류를 하였을까? 둘 모두 군사를 총 지휘하는 자리에 있는 자로서 적대관계에 있는 사이가 아닌가? 서로 적대감을 드러내며 칼끝을 겨누어도 모자라는 판에 오랫동안 연통을 나누며 교류를 해왔다? 도대체 어떤 말이 오갔던 것일까? 둘의 의문은 점점 커져만 갔다. 박영효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올해 초였습니다. 그러니까 감포 앞 바다에 그 섬이 떠있기 전이었습죠. 대장군 양승경을 찾아갔지만 서찰을 써주지 않았습니다. 워낙 중요한 일이기 때문에 비밀이 샐 것을 염려하여 직접 제가 일러주어 그대로 전하라고 하였습니다."

이번에는 왕신복이 물었다.
"그가 무엇이라 하던가?"

"이번 여름에 일본으로 떠나는 사절단이 출항한다 하였습니다. 정확한 출항날짜까지 알려주었습죠. 그러면서 이번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마지막 기회라는 말도 했습니다."

"마지막 기회라…."

"전 그 기회가 무엇인지 모릅니다. 단지 그대로 전하라고만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서 그 일을 서둘러라 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그 일이라 하면 혹 움직이는 섬을 만드는 것을 말하는가?"

"아마도 그러하온 것 같습니다. 상대등 나리께 그 말을 전하고 난 다음날 그 섬이 바다에 떠다닌다는 소문이 돌았습죠."

"항해를 하는 도중에 발해로 떠나는 사절단이 탄 배를 공격한 사실도 알고 있나?"

"그 배를 해적선으로 위장한 것이 바로 저였습니다. 몇몇 군사들에게 신라의 허름한 옷을 입히고 배를 낡아 보이게 만든 다음에 발해선을 공격했습니다. 칼과 창을 들고 배에 올랐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우리가 올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 밑의 선실에 있는 곳으로 우릴 안내했습죠."

순간 왕신복의 표정이 후드득 흐려지며 목소리를 높였다.
"선실로 들어와서 양승경과 대척점에 있는 문관들만 골라서 죽였단 말이지?

박영효가 고개를 끄덕이자 왕신복은 혐오스런 벌레를 발견한 듯 눈빛이 허물어지며 저절로 탄식을 내질렀다. 이것으로 사실은 명확해졌다. 이번의 모든 일은 신라의 김충신과 발해의 양승경이 함께 꾸민 것이다. 둘이 오래 전부터 연락하며 치밀하게 이번 일을 준비해왔다.

발해가 일본의 협공작전을 거부할 것을 간파한 양승경은 신라를 이용해 왕신복을 제거하여 대문예왕의 뜻을 왜곡하여 일본에 전하려 하고 있었다. 양승경 대신 다른 무관이 사절단으로 일본에 건너가 후지와라를 만나 협공의사를 전할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일본은 즉각 신라를 공격할 것이고, 두 나라가 전쟁을 하는 것을 빌미로 양승경은 왕을 압박하여 군사를 남으로 움직일 것이다.

김충연은 마저 물었다.
"그럼, 내가 타고 있던 배가 공격을 당한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죽은 네 명의 선원이 그 음모를 간파했기 때문에 죽인 것이더냐?"

"그 선원들이 만파식적을 대신할 대나무를 발견한 것을 제가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상대등 어른께 보고하자 그들을 죽이라고 하시더군요. 하지만 전 같은 신라 사람을 차마 죽일 수가 없었습니다. 또 그들을 죽인다면 소문이 이상하게 날 수도 있었죠. 그래서 발해의 배에 비둘기를 띄워 이번에는 그쪽 배가 해적선을 가장하여 우리 배를 공격케 했습니다. 그 네 명만 죽이려던 것이 불화살을 잘못 쏘아 배에 번져 화재가 나고 말았습죠."

"하지만 그 배는 불에 타지 않았어. 이렇게 멀쩡하지 않나? 그들은 나까지 죽이려 했지만 난 보다시피 이렇게 살아있네."

"전 당주 어른을 해칠 생각은 없었습니다요. 그들이 잘못 하여 당주 어른까지…."

박영효는 채 말을 맺지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도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엄청난 일인지, 그리고 순리에 어긋나는지 새삼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결과야 어떻게 되었든 수십 명의 사람이 그로 인해 목숨을 잃지 않았던가? 더구나 세 척의 배 중 두 척이 난파당하고, 상대등 김충신은 수많은 신라사람들을 현혹시켜 전장으로 내몰 것이 아닌가? 그는 문득 하늘이 두려운지 그 자리에 엎드려 몸을 벌벌 떨기까지 했다.

박영효 못지 않게 두 사람의 충격 또한 컸다. 그들이 파악한 음모의 실체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치밀했다. 둘이 오랫동안 바다 위를 표류한 것도 결국 그들의 음모에 기인한 것이었다. 어쩌면 둘은 가장 큰 피해자일지도 몰랐다. 중요한 것은 그 피해자가 앞으로 더 생길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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