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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물에 잠긴 풍납동 주택가 모습.
1984년 물에 잠긴 풍납동 주택가 모습.
"야~ 이러다 물 넘치는 거 아니야?"
"설마… 그럴 리가."
"봐. 벌써 도로 위까지 올라왔잖아."

서울지역에 큰 홍수가 났던 1984년 9월. 우리가족은 서울시 강동구 성내동 2층짜리 단독주택에 살고 있었습니다. 밤새도록 내렸는지 며칠째 내리고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집에서 500여m 떨어진 성내천은 넘칠 듯 넘실거리고 있었습니다.

인근 풍납동이 상습침수 지역이라는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지만 아직은 한번도 폭우로 인한 수해를 당해 본적이 없었던 터라 남동생과 저는 장난스레 농담까지 해가며 버스를 타러 나왔습니다. 남동생은 친구를 만나러 저는 약혼자와 낭만적인 '우중 데이트'를 하기 위해 외출을 한 것이지요.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지만 약혼을 한지 얼마 되지 않았던 당시엔 홍수 아니라 태풍을 뚫고라도 약혼자를 만나러 갈 기세였답니다. 물론 그때는 우리 집이 물에 잠기는 일이 일어나리라는 걱정은 조금도 하지 않았었지요.

우리집이 물에 잠겼다니

철이 없었던 것인지 생각이 없었던 것인지 약혼자와 저는 비가 억수로 퍼붓는 홍대근처에서 맛있는 점심도 먹고 커피도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커피숍 한쪽에 켜져 있는 TV 화면에 눈이 갔습니다. TV에서는 시시각각 늘어가고 있는 침수지역에 대한 뉴스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한강 물이 역류하여 성내천이 범람했습니다. 성내천의 범람으로 저지대인 풍납동 일대는 물론 성내동 지역까지 침수가 우려되니 침수 위험 지역 주민들은 서둘러 대피하시기 바랍니다."

더 이상 밖에 있다가는 가족과 생이별을 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하는 약혼자를 뒤로하고 서둘러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러나 넘쳐나는 강물에 길은 이미 끊긴 뒤였습니다.

잠실에서 둔촌동으로 가는 버스는 성내천 배수 펌프장 앞 낮은 언덕 위에서 멈추었습니다. 물에 길이 막혀 더이상 갈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멀리 1층이 완전히 물에 잠긴 우리 집이 보였지만 안타까워만 할 뿐 한 발짝도 물 속으로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저와 같은 시간에 외출을 한 남동생을 만났습니다. 결국 그날은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가까운 잠실 고모네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고모부와 함께 가족들을 찾기로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인근 초등학교들 모두 뒤졌지만 가족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치매로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방이 있는 아래층은 이미 물에 잠겼을 텐데… 더구나 아래층엔 젖먹이 아기가 있는 대웅이네도 살고 있는데….'

남동생과 나는 인명구조를 위해 현장에 투입된 군인 아저씨들을 찾아가 사정을 하기로 했습니다.

1984년 수해당시 모습. 우리가족도 저런 보트로 구조 되었습니다.
1984년 수해당시 모습. 우리가족도 저런 보트로 구조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는 일흔이 넘으신 할아버지가 계세요. 치매로 거동이 불편하시고 걷지도 못하시는데 도와주세요. 아래층엔 젖먹이 아기도 있어요. 그 아기네 가족도 안보여요. 아무래도 아무도 못 나오고 이층이나 옥상에서 대피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군인 아저씨들이 저희 집 주소를 묻습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아버지를 먼저 모시고 나오기 위해 구조 헬기를 보내겠다는 것입니다. 집에 계시던 아버지나 아래층에 사시던 아저씨가 옥상에 올라가 구조신호를 보내셨던 모양입니다. 할아버지는 군용구조헬기를 타고 무사히 근처 둔촌초등학교 교실에 모셔졌습니다.

"아이고 내가 물난리 덕에 잠자리 비양기를 다 타보네. 이보오 군인양반 고마워. 고마워요."

보트 타고 가족을 찾아 나서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기다리고 있던 고모에게 부탁하고 저와 남동생은 다시 해병대 아저씨의 군용보트를 타고 집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기름과 흙 오물이 뒤범벅된 물위에는 나무판자나 스티로폼은 물론 항아리들까지 떠다니는 통에 그것들을 치워가면서 집 근처까지 노를 저어가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만 이때는 제 약혼자보다 우리가족을 구조하러 가주는 군인 아저씨들이 더 멋있어 보였답니다.

마침내 집에 도착해보니 물이 2층 현관 위까지 찰랑거리고 있습니다. 공포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던 여동생 둘은 구명보트를 보자 반가워 눈물을 흘립니다.

아버지, 엄마 그리고 아래층 대웅이네 가족까지 여덟명이 모두 나오기까지 얼마나 가슴 졸이며 걱정을 했던지요. 보트를 타고 나온 가족과 헬기로 나오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수재민구호소인 인근 초등학교 교실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수재민구호소인 학교에서 하루나 이틀 밤을 지냈던 것 같습니다. 물이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가족들은 다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물이 빠진 현장은 참담했습니다. 골목 골목마다 어느 집에서 나온 것인지 알 수 없는 가전제품이며 가구들이 나뒹굴고 있었고 집안은 흙물과 자동차 기름, 보일러용 기름통에서 흘러나온 기름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당분간은 물도 나오지 않아 식수차가 오기만을 기다려야 했고 끊어진 물이 다시 나오기 시작하면서는 청소와 빨래와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버려도 버려도 끝이 없는 쓰레기, 닦아도 닦아도 끝이 없는 청소, 빨아도 빨아도 끝이 없는 빨래. 너무나 힘들고 속상해서 아래층 대웅이 아줌마와 우리엄마 그리고 딸들은 울면서 빨래를 했습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소독차가 지나다녔지만 더운 날씨에 산더미처럼 내다버린 쓰레기에서는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습니다.

와중에 조등을 내다 건 집들도 보였습니다. 물을 피해 대피를 하려다 급류에 휘말려 실종이 되었다는 젊은이, 거동이 불편하셔서 산채로 수장되었다는 혼자 사시던 노인분…. 마을에는 이런저런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습니다.

"김일성 동지가 보낸 쌀이래요"... 수해를 견디게 한 건 이웃의 사랑

그러나 힘든 와중에도 이웃사랑은 전에 없이 끈끈했습니다. 수재민들끼리 네 집도 내 집도 없이 서로 서로 도와가며 일을 나누어 했기 때문입니다.

수해를 겪고 보니 이웃은 정말 사촌보다 가까웠습니다. 도저히 재기가 불가능 할 것처럼 보이던 수재민생활도 이웃들과 힘을 나누고 전기와 수도가 다시 들어오면서 빠르게 정상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모여 앉으면 앞으로는 어찌 살아야 할지 걱정들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그 와중에 동사무소에서 안내문이 왔습니다. 북한에서 남한의 수해소식을 듣고 구호물자를 보내왔으니 동사무소에 수재민신고를 하고 배급을 받아가라는 것이지요. 수재민들은 알록달록 빛깔도 화려한 옷감(예전 이불껍데기로 쓰이던 포플린과 비슷한 천입니다)과 쌀을 받았답니다.

"이게 북한의 김일성 수령 동지가 주신 거래요. 여기 보세요. 물건마다 써 있잖아요."
"정말이에요? 이게 정말 북한에서 보낸 거 맞아요? 오래 사니 별걸 다 보내. 이거 가보로 물려야하는 거 아니에요? 수해를 당하니 이런 일도 있네요."
"맞아요. 헬기도 타보고 고무보트도 타보고 북한 구호물자도 받고… 하하하."

20년도 더 흐른 일이 지만 어딘가에서 수해를 당했다는 뉴스만 들리면 그때 일이 떠오릅니다.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수해이야기를 들려주면 헬기도 타고 보트도 타고 그 귀한 북한산 구호품도 받아서 좋았겠다고 하지만 그건 그때의 어려움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지요.

저는 수해를 입은 수재민들이 다시 일어서기까지 얼마나 힘든 시간을 겪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고생스러운지도 잘 알고 있지요. 그리고 이웃들이 사랑과 관심 그리고 따뜻한 온정은 커다란 힘이 된다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북한에서 온 구호물자를 받고 기뻐했던 것은 그때 받은 물건이 비싼 것이거나 귀한 것이라서가 아니었답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 [기사공모]"내가 겪은 '물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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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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