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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사
<사조영웅전>의 곽정이 자신을 키워준 몽고와 혈연적 뿌리인 송 황조 사이에서 충성의 대상을 놓고 갈등하게 되고, <신조협려>의 양과가 출생의 비밀과 사부와의 결혼이라는 선택으로 인하여 사회적인 편견과 충돌하게 된다면,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명교의 교주로서 작게는 정파와 사파, 크게는 한족과 몽고족의 민족 대립이라는 좀더 복합적인 딜레마에 부딪히게 된다.

주인공들의 로맨스는 대단히 상징적이다. 중심 인물들이 각자의 파트너인 황용, 소용녀, 조민을 선택하게 되는 것은, 곧바로 자신의 정치적인 입장을 두고 동시대의 사회-문화적 규범과 충돌하는 과정이자, 여주인공은 단순히 연애의 대상을 넘어 남자 주인공이 지향하는 가치관을 대변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물론 이들은 저마다 사랑을 찾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세 주인공이 해답을 얻기까지 자신만의 딜레마에 대응하는 방식은 전혀 판이하다.

우선 <사조영웅전>의 곽정은, 사조삼부곡의 세 주인공 중에서 가장 고전적인 영웅의 모습에 가까운 캐릭터이다. 반골 이미지가 강한 양과나 우유부단한 장무기와 달리, 곽정의 일생은 언제나 '정도'와 '원칙'이라는 대의명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때로는 고지식하고 어리숙한 모습으로 비치기도 하지만, 돌아보면 그는 누구보다 주관이 뚜렷하고 신념이 강한 인물로 묘사된다.

곽정은 자신의 주관이나 원칙이 위배되는 일이라 생각되면, 누구의 강요나 부탁을 받아도 절대 굽히지 않는다. 그리고 그 원칙은 민족에 대한 '충성'이나, 언약에 대한 '신의', 무림인으로서의 '협의'같은 당시 한족사회의 전통적인 가치 덕목에 충실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혈연적 뿌리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일가를 불행에 몰아넣은 송 황조에 대한 '충성'을 지키기 위해 절대적 후원자였던 징기스칸과 등을 돌리게 되는 장면이나,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신의'를 지키기 위해 한때 황용을 버리고 화쟁공주와의 혼약을 응낙하는 장면, 장년이 된 <신조협려>에서 딸인 곽부가 양과의 팔을 상하게 하자 자신의 딸임에도 그 책임을 물어 똑같이 팔을 자르려고 했던 장면 등.

곽정에게 중요한 것은 개인의 이익이나 자유보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헌신,희생 같은 좀더 거대한 원칙과 대의명분이었고, 평생 이러한 원칙에 충실했던 곽정의 삶은 한마디로 동시대의 보수적인 가치관을 옹호하는 사회적 롤 모델이라 할수 있다.

개인과 선택과 자유를 중시하는 양과

반면, <신조협려>의 양과는 협객이기는 하지만, 곽정과는 정반대로 반골 기질이 심한 '야인'에 가깝다. 그는 악역이었던 양강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한계로 인하여 어린시절부터 언제나 주변의 의심과 오해를 받아야했고, 사부인 소용녀와의 결혼이라는 선택은, 당시 엄격한 예교 규범에 길들여져있던 한족 사회의 문화적 관습과 정면 충돌을 불러일으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양과는 이러한 사회적인 편견 속에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다. 한때 개인적인 원한으로 몽고와 결탁하여 곽정을 죽이려는 마음을 품었던 것이나, 후일 양과가 신조협으로 보여주는 놀라운 활약상 등도 알고보면 민족이나 국가같은 거대한 이데올로기보다는, 모두 그때그때 사사로운 감정이나 이해관계에 좌우된 바 컸다.

곽정의 의협심이 국가나 민족을 우선시하는 원칙주의에 기반한 것이라면, 양과의 의협심은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성격이 다르다 할 것이다. 그는 언제나 조직의 힘이나 권위를 빌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한다.

사회적인 규범이나 대의명분보다 개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선택을 중시하는 그의 가치관은 현대 사회의 관점에서 봤을 때 대단히 진보적이지만, 당시로서는 사회질서를 부정하는 위험한 발상으로 보일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 대중의 입장에서는 틀에 얽매인 곽정보다 자유분방한 양과의 반골 정신이 주인공 캐릭터로서는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우유부단한 중도파 장무기

ⓒ 김영사
그럼 사조삼부곡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의천도룡기>의 장무기는 어떨까? 시종일관 보수적인 색채가 분명한 곽정과 진보적인 양과와 달리, 장무기는 태생에서부터 복합적인 양면성을 지닌다. 부친인 장취산은 명문정파인 무당파, 모친인 은소소는 소위 사파인 천응교이다.

원칙과 명분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장무기의 이념적 성향은 보수쪽에 가까웠지만, 우연한 계기로 그는 당시 사회 관점에서 정도에서 벗어나 비주류 세력에 가까웠던 명교(진보)의 교주가 된다. 또한 후일 몽고에 맞서 한족의 독립 운동을 이끄는 과정에서, 공교롭게도 한족 처녀(주지약)과 몽고 공주(조민) 사이의 미묘한 삼각관계에 빠지게 된다.

장무기의 딜레마는, 정도와 순리를 중시하는 그의 성격과 맞지 않게, 모순되는 선택을 강요받는데서 나온다. 그의 일생은 언제나 주변 환경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이점은 곽정과 양과도 사실 마찬가지였지만, 문제는 장무기가 이들처럼 과감하고 주동적인 인물이 되지 못한데서 있다.

장무기는 언제나 대의명분과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번민한다. 만일 곽정처럼 원칙과 대의명분을 강조하는 인물이었다면, 처음부터 명교의 교주가 되지 않거나 아니면 주원장의 함정에 빠져서 교주직을 물러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또한 개인의 감정에 순수하게 충실하지도 못하여 시종일관 주지약과 조민 사이를 오가며 방황한다.

그의 개성이나 사상적 뿌리는 사실 무당파에 가깝다. <의천도룡기>의 곤륜,소림,아미,개방 같은 소위 명문정파 들이 사파보다 더욱 악랄한 이중적인 모습으로 장무기를 곤경에 밀어넣는데, 정파중에서는 무당파만이 유일하게 정정당당하고 사파에 있어서도 무조건적으로 선을 긋지 않는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원칙을 중시하되, 사파와도 이해와 포용의 가능성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무당파는 정치적으로 '온건 보수'에 가깝다.

장무기는 이런 성향을 물려받고 있기에, 보수와 진보의 간극을 모두 포용할수 있는 개방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었다, 명교 교주로서 보여주는 그의 정치적 색깔은 ,주변의 여론과 영향에 따라 보수로도 진보로도 치우칠수 있는 '중도적 좌파'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

제도와 규범을 초월한 낭만적 영웅상에 대한 예찬

여기서 독특한 것은, <사조삼부곡>의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지도자로서의 재능은 인정받지만, 정치적인 야심 혹은 권력욕은 결여된 인물들로 설정된다는 것이다. 이 세명의 주인공들이 각자 다른 개성과 장단점에도 불구하고, 영웅이라는 범주에 일반화할수 있는 것은, 모두 세속적인 이해관계를 넘어선 자신이 중시하는 가치관에 모든 것을 헌신할수 있는 낭만적인 인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곽정은 개인적 욕심없이 오로지 민족을 위해 고생스러운 최전선 야전사령관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고, 양과는 도덕이나 이념따윈 아랑곳없이 오직 사랑을 위해 올인하는 순정파의 모습을 보여준다.

명교 교주의 지위를 물러나고 조민과의 사랑을 선택한 장무기는, 그것이 순수한 자의가 아니고 주지약과의 정리가 불분명하다는 (드라마가 아니라 소설 기준으로) 점에서 현실 도피의 인상이 없지 않지만, 오히려 그런 점에서 더 인간적이고 사리사욕에 얽매이지 않는 순한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굳이 사조삼부곡만이 아니라, <소오강호>의 영호충에서 <녹정기>의 위소보에 이르기까지, 개인의 이해관계나 정치적 성향은 달라도, 최소한 정치권력에 대한 사적인 야심의 부재는,인물의 순수성을 변호해주고 영웅의 풍모를 유지시켜주기 위한 김용식 캐릭터 만들기의 보편적 특성이라고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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