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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쩜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는 한국인인 우리를 퍽이나 불편케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ㄱ선생을 만난 것은 호주였지요. 현지 교민신문에 교육칼럼을 이어쓰기 하고 있었던 인연으로 알게 되어 식사 초대를 여러 차례 받았습니다. 어린아이 때문에 남의 집에 가는 걸 망설이곤 하던 때였는데, 그 댁에만 가면 아이는 후덕한 어른들 덕에 행동이 의젓해져 애 잘 키웠단 소리까지 듣게 되니 그 방문을 꺼릴 것도 없었지요.

뉴질랜드로 이민을 갔으나 먹고 살 일이 없어 5년 만에 호주로 재이민을 왔다 했습니다. 한국을 왜 떠났냐 물었겠지요. 그는 우회적으로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 집 말고도 다른 집이 있거든요.”

당시 한국유학생 대상 영문법 강의를 하는 일 말고도 그네는 커다란 집 두 채에 ‘쉐어(자취방이라고 하면 되려나요)’를 하고 있었는데, 여러 나라 학생들이 묵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 학생들과 중국인 학생들이 참 다릅니다.”

새로운 학생이 들어왔을 때 보이는 반응이 극명하게 차이를 드러낸다 하였지요. 중국인들은 자기 동포에게 살아가는 법을 친절하게 일러주는 것에 반해 한국인은 새로 온 이들에게 텃세란 걸 부린답니다.

“불법 체류자에 대한 두 나라 사람들 반응도 달라요. 중국인 틈에 가면 찾을 수가 없는데, 한국인들은 꼭 밀고자가 생깁니다.”

제 질문에 대한 그의 대답이었던 셈이지요. 그런데 아주 개인사적인 이야기라고만 흘리기엔 자꾸 뒤가 돌아봐졌습니다.

한국을 떠나온 이들이 날로 늡니다. 명분으로는 아이들 교육이 1순위(영어공부를 위해서든 교육환경 때문이건)라지만 다 헤아릴 수 없는 갖가지 까닭들이 있겠지요.

여러 나라에서 여러 한국인을 만났습니다. 아름다운 일로 떠나와 그리운 조국에 돌아갈 날을 손꼽는 이도 많았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 또한 적지 않았지요. 한국에서 살아내는 일이 지긋지긋해서 떠났다고도 했고, 희망이 없어서 떠났다고도 했으며, 생각의 자유를 위해서 떠났다고도 했고, 서민이 살아가기엔 도저히 버거워서 떠났다고도 했습니다.

다른 삶의 길을 선택하고 그 길을 들어선 사람들한테 이왕이면 어디 가서라도 잘 살아라 인사하며 보내면 그만이지만, 긍정적이지만은 않은 까닭으로 보따리를 싸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습니다.

한 선배는 외국의 어느 공동체로 들어갔습니다. 아이 셋 중 둘이 장애아인데 그들을 한국 사회에서 키워내는 일에 자신이 없던 게 그가 떠난 첫째 까닭이었지요.

옛 소련과 동구권의 몰락 뒤에 한국의 이데올로기 지층에 변화가 일던 때 한국을 떠나 공부를 하며 뭔가 길을 모색해보겠다던 선배들이 정작 다른 사회 안에서 외려 한국사회의 절망을 더 많이 보며 그 길로 아주 터를 잡고 주저앉는 것도 보았습니다.

꽤 큰 화제였던 사건으로 아이를 잃고 정부가 하는 그 사후대책, 그리고 사람들의 무관심에 다시 한 번 아이를 잃은 듯한 마음으로 결국 다른 나라로 이삿짐을 꾸린 부모도 있습니다.

오래 나와 살아 그래도 목 메이게 고국이 그리워 다시 들어갈까 하고 한국을 갔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돌아온 선배도 있습니다. 한국인의 빠른 삶의 흐름으로 살아갈 자신이 없더라지요.

한국전쟁에서 더 많은 이들이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던 이념으로 빨치산이 되었고 널리 불리던 노래를 만들었던 ㅂ선생을 만난 것도 호주였습니다. 홀로 외로이 살고 계셨지요.

“이민 20년에 남은 것은 하나도 없고…”

그러면서도 다른 생각에 대해 가차 없는 한국으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셨습니다.
결국은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아무리 언어문제가 해결되더라도) 외로움을 감수하고라도 한국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그들이었습니다. 어느 사회라고 문제가 없겠는가만은 우리는 너무 가깝고 너무 많이 남의 일에 간섭하며, 우르르 몰려다니는 것이 마치 연대인양 착각한다던 말도 기억납니다.

미국에서 머물다 한국으로 들어갔던 몇 해 전, 여러 사람이 길을 막았습니다.

“남들은 비자가 안 나와서 못 온다던데, 당신은 이곳에서 살 수 있는데도 왜 굳이 가나요?”

정겨워진 미국 친구들이 말리기도 했지요. 필라델피아에 있는, 오래 전 이민을 온 고교 친구도 생각을 다시 해보라 하였습니다.

“가지 마라.”네가 지금 하고 있는 일(쏘셜워커 social-worker 라고 하데요)이라면 이곳에서는 얼마든지 정부 도움 받으며 할 수 있는데, 왜 그토록 어려운 길을 가려하느냐 물었지요.

“무슨 대단한 까닭이 있겠어. 내 삶터가 그곳이고, 내가 쓰일 데가 있고, 나를 기다리는 동료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아이들이 있으니까.”

“아이들에 대한 애정이라면 이곳이라고 다를 게 뭐있겠어. 꼭 우리나라 아이들이어야 할 까닭일 건 없잖아.”

그런데 이제 한국을 떠나왔던 사람들과 동일한 생각이 제 안에서도 꿈틀거리고 있는 걸 발견하게 됩니다. 어떤 사안이나 사람에 대해 ‘나는 잘 알고 있어’하는 아집으로 똘똘 뭉친 경우를 너무 흔하게 만나기 때문이지요.

살아갈수록 삶이 익숙해지는 것만은 아니더라는 앞선 이들의 교훈을 귀담아 듣더라도 사람을 만나고 생각을 나누는 일에 막막해지는 순간이 잦습니다. 적어도 ‘다른 생각’에 대해 동의까지 얻을 수는 없어도 ‘그럴 수 있다’라고만 해도 좋겠습니다.

공항에서 이민을 떠나는 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며 그런다지요, ‘떠나는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고.

아니요. 떠나는 것이야말로 가장 쉬운 길일 지도 모릅니다. 남아서 버거운 짐들을 지고도 나날을 헤쳐 가며 사는 이들이야말로 정녕 용기 있는 자일지도 모르지요. 고름덩어리 한반도에서 그래도 무언가를 하려는 남은 이들이야말로 ‘남아서 살아가는 용기’에 박수를 받아야할 지도 모를 일 아닐지.

얼마 뒤면 다시 찾은 미국에서 인천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겠네요. 떠나온 이들에 대한 비난이 아니라 남은 이들에 대한 격려로 스스로를 위로하는 오늘입니다.

(2006년 7월 10일 달날, 연일 높은 기온)

덧붙이는 글 | 옥영경 기자는 생태, 교육, 공동체에 관심이 많아 1989년부터 관련 일을 해오고 있으며, 이어 쓰고 있는 ‘가난한 산골 아줌마, 미국 가다’는 스스로 가난을 선택해서 들어간 산골에서 잠시 나와 미국에서 두 달을 체류하는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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