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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가 살았던 '삭고개' 마을입니다. 가장 가까운 산 밑 동네까지 갈려해도 산길을 30분 이상 걸어내려와야 했답니다.
내 친구가 살았던 '삭고개' 마을입니다. 가장 가까운 산 밑 동네까지 갈려해도 산길을 30분 이상 걸어내려와야 했답니다. ⓒ 안상숙
오늘 낮에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야야, 잘 지내나?”
내 친구는 고향을 떠나 도시생활을 한 지가 벌써 30년이 넘었는데도 아직도 고향 말씨를 그대로 쓴다. 친구랑 전화하면 나도 모르게 친구 따라서 고향 사투리로 말을 하기 시작한다.
“내사 잘 지내지. 니는 우에 지내노?”

나도 촌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래도 내 고향 마을은 제법 큰 동네였고, 우리가 다녔던 국민학교까지 걸어서 우리 걸음으로 20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하지만 내 친구가 나고 자랐던 동네는 아주 깊은 산 속 마을이었다. 차는 고사하고 바퀴 달린 그 어떤 것도 갈 수 없는 그런 산 속에 그 친구 집이 있었다.

내 친구가 살던 동네에서 가장 가까운 마을까지 갈려고 해도 산길을 30분 이상 걸어 내려와야지만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가 다녔던 국민학교까지는 산길을 한 시간 이상 걸어 내려와야 올 수 있었다. 여름이면 풀숲을 헤치고 오느라 그 동네 애들 바지춤은 늘 젖어 있었고, 겨울에는 산등성이에서 부는 바람을 맞아서 양 볼이 빨갛게 얼어 있곤 하였다.

그 때는 다 그렇게 학교에 다녔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눈이 오고 날이 추워도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 한 동네 아이들끼리 뭉쳐서 학교까지 다녔다. 그래도 결석 한 번 안 하고 다닐 만큼 그 시절 우리는 건강했고 단단했다.

예전의 우리들이 걸어서 학교에 다녔다면 지금의 아이들은 스쿨버스를 타고 학교를 오간다. 시골의 작은 학교들을 통폐합하면서 집이 먼 아이들을 위해서 스쿨버스를 운행하게 되었는데, 어떻게 보면 요즘 아이들은 학교까지 편하게 오가게 된 셈이다.

강화도 속의 강원도인 산비탈 길을 걷던 선생님

이정표를 적어넣은 큰 바위 앞에 산벚꽃 나무가 있었습니다. 40년 전에는 없었을 나무가 자라서 이정표를 가리고 있습니다.
이정표를 적어넣은 큰 바위 앞에 산벚꽃 나무가 있었습니다. 40년 전에는 없었을 나무가 자라서 이정표를 가리고 있습니다. ⓒ 이승숙
강화군 화도면에는 화도초등학교가 있다. 예전에는 화도초등학교 외에 마리산초등학교, 흥왕초등학교, 그리고 장화초등학교까지 화도면 안에 4개의 초등학교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로 합쳐져서 화도면의 아이들은 모두 다 화도초등학교에 다닌다.

화도초등학교는 마니산 바로 앞에 있는 학교인데 산 뒤쪽 마을인 흥왕리와 여차리, 그리고 분오리, 동막리, 사기리 등 여러 마을의 학생들을 태우고 다니기 위해서 스쿨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강화군 길상면에 있는 강남중학교에 올 봄에 새로 교장 선생님이 부임해 오셨는데, 교장 선생님이 교육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발령 받은 곳이 바로 강화군 화도면 흥왕 초등학교였다 한다. 그 당시(1969년)에는 마니산 뒷동네인 흥왕리에서 강화 읍까지 가는 길이 제대로 없어서 인천 집에서 주말을 보내고, 흥왕초등학교까지 가자면 굽이굽이 몇 시간을 바쳐야만 했단다.

인천에서 버스를 타고 강화 읍까지 와서 다시 화도면까지 가는 버스로 갈아탄다. 화도면 소재지가 종점인 그 버스에서 내려서 산길을 또 십여 리 걸어야만 흥왕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한다.

지금은 바다를 끼고 자동차 길이 잘 닦여져 있지만 옛날에는 화도면에서 흥왕리 쪽으로 가자면 ‘매너미(뫼넘어)고개’라고 부르는 산길을 넘어가야만 했다. 주말을 인천 집에서 보내고, 다시 부임지인 흥왕초등학교로 오는 일요일 저녁이면 장화초등학교로 가는 선생님들과 동행을 했다.

화도면 소재지에서 매너미 고개 중턱까지는 동행이 있어서 괜찮았지만 중간쯤에서 그 선생님들이 장화초등학교 쪽으로 가버리고 나면 흥왕초등학교 쪽으로 가는 사람은 지금의 교장 선생님 혼자밖에 안 남았단다.

혼자서 어둑어둑한 산길을 걸어가자면 꼭 뭐가 나올 것만 같았고, 자기 발소리에 자기가 놀래서 겁을 먹기도 했다 한다.

스물 한 살 총각 선생님에서 반백의 교장으로 돌아오신 선생님

가파르고 험한 산길에도 선생님의 손길이 있어서 학교 가는 길이 힘들지 않았겠지요.
가파르고 험한 산길에도 선생님의 손길이 있어서 학교 가는 길이 힘들지 않았겠지요. ⓒ 이승숙
강화도 사람들이 농담으로 강화도 속의 강원도라고 부르는 그 산비탈은 제법 깊고 험하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수 있는 좁은 길이 산 속으로 나 있는데 오가는 차도 별로 없는 아주 외지고 험한 길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화도면 흥왕리 근처 마을에서 강화 읍으로 나가는 유일한 통로였다 한다.

그 길은 산 저 쪽 동네 아이들이 흥왕초등학교로 오가는 통학로였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이정표를 표시해 두었는데 그로부터 근 40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 이정표는 남아서 길 안내를 해준다.

페인트와 붓을 든, 이제 막 스물 한 살을 넘긴 총각 선생님이 막걸리 주전자를 든 기사 아저씨와 함께 산길을 숨차게 올라와서 길 가 큰 바위에 정성 들여 이정표를 썼다. 그 때 페인트를 붓에 묻혀서 정성 들여 글을 썼던 선생님은 지금 반백의 교장 선생님이 되셨다.

선생님은 처음 만났던 그 학교와 제자들, 그리고 동네 분들을 늘 생각했고 그래서 교직의 마지막을 강화도에서 보내기로 하시고, 일부러 자원하셔서 강화 강남중학교 교장 선생님으로 초빙되어 오셨다.

흥왕 초등학교는 지금은 자연 학습장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그래서 이제는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놀지 않는다. 교장 선생님은 교직 생활의 출발점이었던 흥왕초등학교가 폐교되어서 아쉽지만 그래도 교직 외길을 걸어오신 마지막을 강화에서 다할 수 있게 되어서 매우 행복하다 하셨다.

매너미 고개를 넘어 내리막길로 쏟아질 듯 내려가다 보면 넓적한 큰 바위가 보인다. 그 바위에는 제자들을 사랑하는 그 당시 (1969년) 선생님들의 마음이 담겨 있다. 지금도 그 이정표는 오가는 사람들에게 다정하게 손짓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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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을 '놀이'처럼 합니다. 신명나게 살다보면 내 삶의 키도 따라서 클 것이라는 생각을 하며 오늘도 뭐 재미있는 일이 없나 살핍니다. 이웃과 함께 재미있게 사는 게 목표입니다. 아침이 반갑고 저녁은 평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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