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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남편에게 싸주고 있는 도시락
ⓒ 옥영경
남도의 작은 읍에서 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2학년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토요일 오후였지요. 모두가 돌아간 교실에서 늦도록 윤동주 평전에 빠져있다 학교를 나오고 있었습니다.

"옥영경!"

언덕배기에 있던 학교였으니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겠지요. 텅 빈 학교였는데,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이가 있었습니다.

"사전이네."

돌아보니 막 부임해 오신 국어선생님 (그렇지만 우리 반엔 한자 수업으로 들어오신) 이셨고, 제 오른손에 들려있던 사전에 눈길을 주며 다가오고 계셨지요.

"어, 국어사전이네."

사전이 그토록 낡도록 들고 있는 고등학생이야 드문 것도 아니었을 텐데, 그것이 국어사전이었으므로 선생님으로선 기이하기까지 하셨던 모양입니다. 그 즈음 모국어에 대한 매력에 흠뻑 빠져있었지요.

며칠 뒤 선생님과는 문예반에서 다시 만납니다. 그렇게 오랜 인연이 시작되고 있었지요.

고3이 되었습니다. 시골이라고 고3의 형편이 다른 것도 아니어서 모두 대학을 향해 매진하고 있었지요.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할머니 혼자 소일삼아 텃밭과 논 한때기를 돌보고 계셨습니다.

공부 때문에 도시로 떠나는 아이들을 보며 남아있는 막내가 안타까웠던 어머니(소문난 교육도시에 나가서 두 오라비를 뒷바라지하던)도 홀로 계신 할머니 때문에 별 말씀을 못하고 있었지요. 사실은 어쩜 이미 어머니 허리가 휘여 막내는 할머니 밑에 있어줬으면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집 막내들이 으레 그러하듯 저도 일찌감치 경제적 독립을 꿈꾸었는데, 마침 기회가 닿았습니다. 시골 공립학교는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장학금도 많아서 학비도 해결을 하고 있었던 터에 학교 선생님들 댁에서 그 자녀들 공부를 돕기도 하고 테니스교실에서 공 줍는 일도 하며 용돈도 벌고 있었지요.

대학에 대해서도 별 생각을 안했습니다. 당시 인문계를 나온 처자의 최선의 길이었던 공무원시험이나 보지했지요. 그러다 대학도 가지했습니다. 그러니 느슨할 밖에요.

그런데 선생님은 무척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공부란 게 손을 놓으면 쉽지 않더라며 대학 역시 장학제도도 많다고 설득하셨고 그러다 너무 늦어지지 않을까 걱정을 얹으셨으며, 무엇보다 대학이라는 새로운 세계가 제 그릇을 키울 수 있다 믿고 바라셨습니다.

"우리 집에 와서 다녀라."

할머니 댁이 학교랑 멀었던 것과 달리 선생님 댁은 바로 학교 아래였지요. 수개월을 그 댁에서 보냈습니다. 그 즈음 다른 도시에 사시던 당신의 시어른들도 합가를 하셨지요. 돌 지난 아이도 하나 있었습니다.

고3, 도시락이 두 개입니다. 그때 선생님은 바로 그 도시락을 날마다 싸 주셨던 겁니다. 혹 선생님의 아침이 너무 바쁘기라도 하는 날이면 선생님 담임반 아이를 통해 늦게 도시락이 배달되어 오기도 했지요.

"먹을 만 하더나?"

알고 보니 그날 도시락의 야채 동그랑땡에는 아주 잘게 부숴 가리기도 힘든 고기가 들어있었던 겁니다. 고기를 입에 대지 않는 입맛, 그래도 고3의 건강을 위해 선생님은 갖은 애를 쓰며 도시락을 싸 주셨습니다.

가끔 한국사회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부재를 들먹이면 흔히 부자들의 반발을 사기도 합니다.

"아니, 부자가 주면 고마운 거고 안 줘도 말 못하는 거 아냐?"

사회의 공적자금으로 그가 성장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적자금으로 교육을 받았고 그 힘으로 성공했기 때문에 혹 그가 사회를 위해 아무것도 내놓지 않겠다 해도 우리는 할 말이 없다는 겁니다.

뼈 빠지게 부모가, 혹은 자신이 번 돈으로 공부했기에 이 사회에 연대책임을 느끼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그들의 생각은 혜택 받은 제도의 경험이 없는 그이기에 혜택주는 제도에 대한 필요성도, 혜택을 줄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거지요.

저는 지금 산골 아주 작은 학교에서 아이들을 돌보고 있습니다. 무상교육입니다. 아이들은 학비를 내지 않으며 교사는 임금이 없습니다.

학교살림은 아이들이랑 공동체식구들, 그리고 자원봉사자들이 같이 키우는 농사와 사람들이 기꺼이 나누어주는 것들로 꾸려집니다.

부자는 아닙니다만, '혜택' 받은 경험은 '주는 실천'을 만들어 내지요. 아무 대가도 없이 산골의 학교에 삶을 온전히 던질 수 있는 건, 바로 그 힘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 요즘입니다.

사랑이 사랑을 키운다 하였습니다. 저는 일찍 세상을 떠난 아비로부터 교사가 되고 싶었고 선생님은 그 꿈을 잃지 않고 지닐 수 있게 해주고 나아가 그리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에 좀 늦어버린 나이일지도 모르는 마흔, 제 손이 더 필요한 다른 곳이 있을지도 모른다 찾고 있지요. 자신을 키운 건 8할이 바람이었다는 노시인의 말을 기대자면, 저를 키운 건 8할이 그 '도시락'이었던 것입니다.

처음 선생님을 뵈었던 때 당신의 뱃속에 든 아이가 자라 대학을 갔습니다. 대입 시험을 끝내놓고 제가 사는 산골공동체 배움터에 그가 겨울 한 주 자원봉사를 왔지요. 아이들과 덕유산 향적봉을 같이 오르던 눈발 날리던 그날, 그 아이 곁에서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커지는 사랑의 비밀을 새삼스럽게 마음에 담았더랍니다.

이 나이 되도록 선생님께 해드린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선생은 아이 가르치는 보람으로 산다', '그저 아이들이 제 삶의 길을 잘 찾아가길 바라는 게 선생이다'. 그것이 위로겠습니다. 제가 함께 하고 있는 아이들도 제가 그랬듯 그들의 길을 잘 찾아갈 수 있겠지요.

지금 선생님은 제게 또 하나의 큰 그늘이던 다른 선생님과 함께 마산의 한 인문계 고등학교에 계십니다. 두 분 선생님, 여전하시지요?

덧붙이는 글 | ☞ [기사공모] 도시락에서 학교급식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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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깃들어 아이들의 학교이자 어른들의 학교이기도 한 작은 배움터를 꾸리며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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