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어머니는 마흔에 나를 낳으셨습니다. 지금 같으면 늦둥이라도 별 주목을 받지 못할 텐데 지금과는 달리 50~60년대의 사십대는 현재의 사십대보다 훨씬 나이 들어 보여, 늦둥이를 데리고 다니는 어머니가 애엄마인지 할머니인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영양을 충분하게 공급받지 못한 터라 낳으면서부터 골골했던 나는 가끔씩 큰 병을 앓아 어머니의 속을 태우기도 했고, 몸도 왜소해 초등학교를 졸업할 당시 내 몸무게는 27Kg 정도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나를 볼 때마다 어머니는 "오이도 끝물은 시원치 않다는데 네가 딱 그 모양"이라며 제대로 잘 먹여 키우지 못해 아들이 늘 빌빌거리는 것을 역설적으로 미안해 하셨습니다.

사는 게 힘들 때 가끔은 나도 이런 생각을 하곤 했지요. "뭐 하자고 사십이 다 되어 낳으셔서 나를 이 고생 시키나"라고 말입니다. 참 불효한 아들임에 틀림 없습니다.

보리 왕창 섞은 도시락, 혼식 장례가 좋았지요

어쨌든 콧물 질질 흘리며 가슴에 수건 달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날, 그 날로 이미 나는 어머니가 다시 학교에 오지 않으셨으면 하고 속으로 바랐습니다.

그 어린 나이에도 예쁜 한복에 미장원에서 머리를 틀어올리고 화장을 한 젊은 엄마들과, 추레한 옷을 걸치고 할머니인지 어머니인지 모를 정도의 나이든 얼굴로 서있는 우리 어머니의 모습은 너무 대조적이었습니다.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 100점을 많이 받아 상을 들고 집에 돌아왔을 때에도 나는 어머니에게 일언반구하지 않았습니다(잘난 체 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기를… 초등학교 때 100점 받지 못한 사람은 없을 테니까요). 혹시 어머니가 선생님에게 인사차 학교를 다녀와야겠다는 마음을 먹을까 지레 겁먹어서였지요. 어렵게 사는 형편에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심지어는 월사금(기성회비)을 내지 못해 부모님을 모셔오라고 수업 중에 집으로 돌려보내졌을 때에도 나는 집으로 가는 길목에서 놀다 하교 시간에 맞추어 집에 들어갔고 아무 소리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차피 집에 없는 돈 졸라봐야 나올 것도 아닌데, 정말 어머니가 학교에 가서 선생님을 만나게 될까 두려웠습니다.

이유야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때 같이 집으로 돌려보내진 누구도 부모님을 모시고 오지는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가난은 아이들을 일찍 철들게 하나 봅니다.

▲ 보리쌀이 먹기 싫었던 애들은 도시락 위에만 살짝 보리를 깔았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만, 가난하게 사는 우리 집 형편으로서는 당당하게 보리쌀을 왕창 섞어서 도시락을 싸와도 되었으니 혼분식 장려는 고마운 정책이었지요
ⓒ 윤대근
중학교에 들어가서도 형편은 피지 않았습니다. 나는 등록금 때문에 자주 집으로 돌려 보내졌고,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말에도 끄덕않을 정도로 만성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혼식 장려를 나는 무척 고마워 했습니다.

국민 전체가 먹고 살만큼 쌀을 생산해내지 못했던 때라 혼식과 분식을 독려하여 쌀의 부족을 해소하려 했던 정책은 도시락에서 먼저 나타났습니다. 점심시간마다 도시락 뚜껑을 열고 보리가 어느 정도 섞여있는지 선생님들이 일일이 검사했고, 쌀과 보리의 혼합율이 5:5니 3:7이니 이런 걸 따졌으니까요.

보리쌀이 먹기 싫었던 애들은 도시락 위에만 살짝 보리를 깔았다가 선생님에게 들켜 혼이 나기도 했습니다만, 가난하게 사는 우리집 형편으로서는 당당하게 보리쌀을 왕창 섞어서 도시락을 싸와도 되었으니 고마운 정책이었지요.

"이거 받아, 도시락이야" "창피해 죽겠어"

어쨌든 등록금 때문에 자주 수업 시간 중에 돌려보내지는 나도 한계에 이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참다 못해 아침 등교길에 어머니와 크게 다퉜습니다. 이젠 도저히 견딜 수 없노라고, 창피해서 학교에 다니지 못하겠다고 대들었습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학교를 그만두는 게 낫겠다며 악을 쓰고, 없는 형편에서도 어머니께서 정성스럽게 싼 도시락을 팽개쳐두고 집을 나왔습니다.

어머니와 싸우고, 가봐야 등록금에 시달릴 것을 생각하면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지만, 딱히 혼자 어디 갈 데도 없는 터라 나는 학교로 갔습니다. 수업 시작 종이 울리고 수업이 시작되어도 마음은 어머니와 아침에 싸운 일 때문에 영 편치 않았습니다. 뻔한 형편에 조른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을, 그래도 마음 속에서는 어머니가 야속했지요. 어린 마음에 말입니다.

그런데 2교시가 끝나는 종이 울리고 선생님이 막 교실을 나가시던 순간이었습니다. 언제 오셨는지 어머니께서 도시락을 들고 교실로 살짝 들어서며 내게 "이리 오라"고 손짓을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쉬는 시간이라 밖으로 나가려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어머니에게 쏠렸습니다.

오십이 넘어 쪼글쪼글해진 얼굴, 추레한 옷차림새. 깨끗하게 손질이야 했지만 언뜻 보기에도 가난이 줄줄 흐르는 어머니의 행색에 아이들의 눈이 쏠리자 나는 순식간에 얼굴이 벌개졌습니다. "너희 엄마 맞냐?"라는 아이들의 물음이 귀에 쨍하게 울렸습니다.

이 순간을 어떻게 모면해야 하나 당황하던 나는 얼른 교실을 나가 어머니의 팔을 끌고 복도 끝으로 갔습니다.

"학교는 왜 왔어?" 아이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나는 어머니에게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도시락을 열었습니다. 언뜻 보아도 평소보다 보리가 덜 섞인 밥 위에 계란 프라이 두 개가 나란히 얹혀져 있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 나는 반찬 투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 sigoli
"네가 도시락 놓고 갔잖아. 그리고 엄마가 선생님에게 다 이야기했다. 조금만 참아주시면 이달 말까지 밀린 등록금 다 내겠노라고…. 이젠 걱정하지 말고 학교 다니거라. 엄마가 어떻게든 해볼 테니까. 그리고 이거 어서 받아. 도시락이야."

"알았어, 얼른 가. 창피해 죽겠어."

빼앗듯이 어머니에게서 도시락을 받아들고 빨리 가시라고 채근했습니다. 어머니가 길게 시간을 끄는 것이 싫었습니다. 어머니를 밀다시피 하며 건물 밖으로 내보내고 교실로 돌아온 나는 여전히 얼굴이 후끈거려 고개를 들지 못했습니다.

보리 덜 섞인 밥 위에 계란 프라이 두 개

오전 수업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 가져오신 도시락을 열었습니다. 언뜻 보아도 평소보다 보리가 덜 섞인 밥 위에 계란 프라이 두 개가 나란히 얹혀져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다시 만들어 오신 것이 분명했습니다.

철없는 아들을 위로하려고 하셨던 것인지, 본인이 직접 가져오시는 도시락이어서 조금 더 신경을 쓰고자 하셨던 것인지 아무튼 코끝이 약간 찡해지면서 도시락을 먹었습니다. 이달 말까지는 등록금 때문에 수업 도중에 집으로 쫓겨가는 일을 없을 거라는 어머니의 말이 떠오르면서 선생님에게 궁색한 소리를 하셨을 어머니가 안쓰러웠습니다. 어머니를 창피해 한 내가 얼마나 죄스러웠는지 모릅니다.

그 이후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어쨌든 그날 이후로 나는 등록금을 내야 한다고 조르지 않았고, 도시락은 반찬투정을 하지 않고 어머니가 싸주시는 대로 가지고 다녔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힘든 시기에 임종도 뵙지 못한 채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효도라고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채 말입니다. 나이 마흔 넷에 혼자 되어 다섯 식구를 먹여 살리려고 안간힘을 쓰다 고생만 하고 돌아가신 어머니는 지금 살아계셨더라면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이겠지만 나는 어머니를 자주 그리워 합니다.

특히 요즘 들어 나름대로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친구들을 볼 때면 더욱 그렇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가 생긴다면 어머니가 싸주시는 도시락을 꼭 먹어보고 싶습니다. 이제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어머니가 가져오셨던 그 도시락은 그래서 늘 기억에 남습니다.

"어머니 저승에서 뵙게 될 때 저에게 도시락 한 번 꼭 싸주세요. 그때 그 도시락은 제 생애 가장 소중한 도시락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도시락과 급식 기사응모

☞ [기사공모] 도시락에서 학교급식까지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