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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강신일의 진술'은 정신과 의사인 처남을 살해한 혐의로 경찰에 붙잡힌 40대 대학 철학과 교수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하룻밤 동안 진술하는 내용의 일인극이다
ⓒ 극단 파크
캄캄한 어둠이 잠시 사위를 옥죄더니 책상 하나와 전화기 한대만 달랑 놓여 있는 무대 위에 불이 들어오자 수갑을 찬 한 남자가 소리친다.

"내가 체포되어 경찰에 끌려오다니, 내 생애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소. 군사독재 치하를 거쳐오면서도 이런 변을 당하지는 않았소. 대답하지 않겠소, 거듭 말하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겠소..."

섬뜩하리 만치 충격적인 일인극 '강신일의 진술' 첫 모놀로그다. 이 작품은 '문학계의 강준만' 하일지 교수가 대본을 쓰고 극단 파크의 박광정씨가 연출했다. 대사의 토막토막마다 터져 나오는 음악은 영화 '한반도' '실미도'의 한재권씨가 맡았다.

마흔 네 살의 대학 철학과 교수가 결혼 10주년 여행으로 첫날밤을 보냈던 호텔 방에서 아내와 달콤한 하룻밤을 지내다가 아내가 잠든 사이 갑자기 경찰에 붙잡혀 온다. 이 남자는 정신과 의사인 처남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아내와의 연애담을 시작으로 배고팠던 유학시절, 결혼 10년만의 아내 임신 등 행복했던 가정생활을 이야기하며 혐의 사실을 완강히 부인한다.

지독한 연애주의자인 그는 애원하듯 말한다. "아! 아내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내 김유리는 그가 예술고등학교 교사 시절 처음 만나 운명적으로 사랑하게 되는 열 여섯 살 연하의 제자.

▲ 배우 강신일씨.
ⓒ 극단 파크
"지난 십 년 동안 아내와 나는 매일매일 새로 태어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머리에서 발끝까지 내 몸에는 경이로운 기쁨의 전류가 흐르고 있답니다. 또 그런 시간이면 아내는 언제나 수줍은 듯이 쌩긋 나에게 미소를 보냅니다. 첫날밤을 보낸 이튿날 아침의 신부처럼 말입니다. 나에게는 아내와 함께 하는 하루가 아내 없이 보내는 십 년 보다 더 값지고 소중합니다."

그의 앞에는 취조하는 사람도 추리하는 수사관도 없지만 혼자서 무대 위를 오가고 소리를 내지르며 진술이 계속 이어진다. 객석에서는 숨소리와 침을 삼키는 소리만 간간이 들릴 뿐 누구도 옴짝달싹하지 않는다. 소름끼치는 독백만으로도 지루하지 않을 수 있다는 전혀 색다른 문화 체험을 하면서 말이다.

"우리가 외국으로 간 첫해 가을이었어요. 그 무렵에 우리는 돈이 떨어져 먹을 것도 없을 지경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밤, 아내는 산책을 가자고 하면서 비닐 봉지 몇 개를 장만했습니다. 나를 데리고 아내는 달이 휘영청 밝은 길을 따라 어느 집 담장 밑으로 갔습니다. 담장 너머 그 집 뜰에는 커다란 서양 배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습니다. 길바닥에는 서양 배들이 하얗게 흩어져 있었습니다. 아내는 길바닥에 떨어져 있는 그 서양 배들을 주워 다 저녁 한끼를 떼우려고 했던 것입니다.

... 최근에 나는 <환상과 실제>라는 제목의 새 책을 출간했거든요. 그렇게 책을 내면 얼마나 버느냐고요? 나의 경우, 특히 이번 책의 경우, 이십 년 동안 팔린다고 가정했을 때, 내가 버는 돈을 평균 낸다면 일 년에 구두 한 켤레 값은 되겠지요. 그런데도 왜 책을 내느냐고요? 그건... 그냥, 그게 내 삶이니까요. 좀더 솔직히 말한다면 아내를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내가 책을 낼 때마다 이 세상에 누구보다도 기뻐하는 사람이 아내거든요."


오늘 밤 안으로 아내에게 돌아가기 위한 애틋한 남자의 진술은 계속되지만 갈수록 앞뒤가 맞지 않고 실체와 환영, 꿈속과 현실이 마구 뒤엉킨다. 평소에는 멀쩡한 이 남자는 8년 전에 죽은 아내에 대해 집착이 강해질수록 실제와 허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다. 진술이 격해지면 음악도 덩달아 숨이 가빠지고 속도가 점점 빨라진다.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던 관객들은 미궁 속에 빠져 있던 진실이 안개가 걷히듯 조금씩 모습을 드러내자 극적 긴장감이 주는 감금에서 풀려난다. 대단한 끈기와 인내를 요구하는 이 연극은 결코 편안하고 쉬운 작품은 아니다. 그럼에도 배우 강신일씨의 힘을 발견할 수 있다면 관객에게도 큰 축복이다.

진실이 무엇일까를 앞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 진실은 언제나 악전고투 끝에 천천히 그러나 기어이 다가오는 법. 자신을 빠져 나올 수 없는 미궁 속에 밀어 넣고 살아날 수 있는지 끈기를 시험해 보라. 이 작품의 백미는 개인기 위주의 여느 일인극과 달리 끝까지 진지함을 잃지 않고도 관객을 사로잡는다는 것. 빼어난 연출력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 2일 오후 4시부터 100분 동안의 연극이 끝난 뒤 관객과 만남의 시간을 갖고 있는 제작진. 왼쪽부터 박광정, 한재권, 강신일, 하일지
ⓒ 극단 파크
"그 순간 나는 내 눈앞에 있는 것은 처남의 실상이 아닌 허상이라는 것을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바닥에 놓인 아령 하나를 집어 등뒤로 감췄습니다. 그리고는 그 지긋지긋한 처남의 허상에게로 다가가며 '형님, 다시 한번만 말해주십시오. 유리가 살았는지 죽었는지' 하고 물었습니다. '죽었어. 이미 팔 년 전에'...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들고 있던 아령으로 힘껏 내려쳤습니다. 그 지긋지긋한 처남의 허상을 향하여 말입니다."

이 작품은 2000년 첫 발간된 하일지 교수의 소설 <진술>을 원작으로 하여 2001년 초연에 이은 2006년 버전이다. 추리소설 같은 서사구조와 절제되고 격조 있는 대사가 이처럼 슬프도록 아름다운 충격의 드라마를 빚어낸다.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연극의 동력"
관객과의 대화... 강신일, 박광정, 하일지


2일 오후 5시 40분 서울 대학로 정보소극장. 연극이 끝났지만 여운이 가시지 않는 듯 70여 명의 관객은 떠나지 않았고, 강신일씨는 세 번의 기립박수를 받았다.

관객의 뜨거운 호응에 감격한 연출가 박광정씨는 관객들에게 일일이 맥주를 내놓고 '만세'를 부르자고 제안했다. 그리고 객석의 질문을 받겠다고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질문이 쏟아졌다.

- 극중 인물 김유리가 사망한 원인이 궁금하다.
"그건 모르지. 꿈속의 일이었으니까. ㅎㅎㅎ." (강신일)

"원작 소설에서는 그 이유가 명확하게 나와 있지는 않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니까." (하일지)

"미루어 짐작하건대 심장질환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번 작품은 원작 소설의 1/7 정도로 압축시킨 대본으로 공연한 것이다. 인물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고 싶다면 원작을 읽길 바란다." (박광정)

- 2001년과 2006년 '진술'의 차이점이 있다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무대가 바뀌었다는 것이다. 2001년 무대는 모텔 같은 분위기였다. 냉장고, 테이블, 침대가 놓여 있고 창도 여러 군데 나 있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에는 그런 걸 모두 배제하고 책상 하나 전화기 하나만 놓았다. 꼭 필요한 장치만 갖고 하겠다는 것이다." (박광정)

"2001년 당시 이 칙칙한 배우 하나를 놓고 관객이 편안하지 않은 대사법을 어떻게 견딜까 하는 걱정을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관객이 보기에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 없을까를 고민하면서 박광정 연출과 함께 무대를 2001년과 다르게 꾸몄다. 기본에 충실하자. 가능하면 무대를 비우는 쪽으로 그리고 가능한 배우를 좀 옥죄고 고독하게 만들어 보고자 했다." (강신일)

"가장 괄목할만한 변화는 관객이다. 5년 전과 비교해 관객 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작품에 대한 이해도도 훨씬 높아졌다. 대학로의 관객을 보면 우리나라 전체 문화수준이 많이 높아져 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하일지)

- 연극으로 수지를 맞출 수 있나.
"어려운 문제다. 이 작품은 돈을 벌고자 하는 프로덕션이 아니다. 강신일 선배하고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하는 공연이다. 2001년 공연이 끝난 뒤 술자리 등에서 다시 공연하자고 했는데, 결국 얘기만 하다 5년이 훌쩍 흘러버린 것이다. 적자 난 부분은 열심히 몸(영화 출연 등)으로 때워서 메꾸고 있다. 그러니까 연극 보러 많이 와달라." (박광정)

"80년대 연극할 때는 1년 연봉이 20만원이 채 안 될 때도 있었다. 한 작품 끝내놓고 수고했다고 개런티(출연료)로 3만원 받으면서 지냈다. 경제적인 풍요로움 때문에 연극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한 작품을 끝내고 관객 앞에 서면 정신적으로 커다란 풍요로움을 얻는다. 이런 정신적인 풍요로움이 연극을 계속할 수 있게 했던 원동력이다." (강신일)

- 대사를 어떻게 다 외우나. 이 작품의 대본은 글자 크기 10폰트로 A4용지 29장 분량이다.
"대사는 머리로 외워서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상황과 내면심리의 관계를 찾으니까 그 긴 대사가 다 외워지더라. 작품에 집중하는 것도 여럿이 하는 연극이라면 달랐을 것이다. 혼자 낭떠러지에 서 있다는 느낌으로 공연했다.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고 그렇게 하니까 집중이 되더라." (강신일) / 석희열

덧붙이는 글 | 공연 시간은 100분. 9일까지 대학로 정보소극장. (02)743-7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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