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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기파랑
비정부 인도주의 단체인 '국경 없는 의사회(MSF)'에서는 북한을 위한 지원활동을 하고 있다. 그 단체는 주로 북한 체제의 희생자인 탈북자와 그 난민들을 돕고 있다. 이를테면 북한 체제로부터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오거나 조선족 사이에서 숨어 지내는 사람들을 돕고, 그들이 제 3세계나 남한 땅으로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그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다.

현재 국경 없는 의사회에 소속된 소피 들로네와 마린 뷔소니에르는 그 탈북자들 가운데 생사를 넘나들며 남한 땅까지 넘어 온 세 사람의 이야기를 엮었다. 바로 〈이곳에 살기 위하여〉(기파랑․2006)란 책이 그것이다.

그들 세 사람은 남한에서 태어나 전쟁포로로 끌려간 할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스물 네 살의 '김태금'과 어린 시절 거리를 헤매며 소매치기 일을 일삼았던 스물 세 살의 '박복열', 그리고 북한 체제에 충성하는 군인을 남편으로 두었던 마흔 한 살의 '고신경'이다.

"우리는 그들의 이야기가 출간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보복행위를 막기 위하여, 실명과 지명을 바꾸고 사건의 순서를 변경했다. 하지만 세 사람이 겪은 온갖 시련은 그들이 직접 상세하게 진술한 내용 그대로이다. 그들 세 사람은 계층이나 출신지도 다르고,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이지만, 우리에게 공통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11쪽)

말 그대로 그들 세 사람은 출신 배경이 다르다. 김태금은 그야말로 북한 아오지(지금의 은덕) 탄광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할아버지가 6.25를 기점으로 남쪽에서 넘어왔지만 북한 당국에서는 남한에서 보낸 첩자로 낙인찍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원치 않게 아오지 탄광에서 태어나야만 했다. 이른바 출신배경이 대물림됐던 것이다.

그 아오지 탄광은 그야말로 북한 내에서 불순분자들이 끌려가는 곳이다. 북한 당국에서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전력을 갖고 있거나, 북한 제체에 대한 비판을 한 자들이 적대계층으로 분류되어 그곳에서 일을 하는 것이다.

당연히 일은 혹독하게 시키면서도 공공배급소의 행정은 부패했기 때문에 배급량은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1993년도 전까지는 배급이 나았지만, 그 이후부터는 배급도 완전히 끊겨 버렸다. 1994년부터는 모든 탄광촌 사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풀뿌리처럼 산으로 들로 나물을 캐러나갔고, 장작을 모아다가 시장에 내다 팔면서 생계를 유지해야 했다. 이는 김태금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박복열은 또 어떠한가? 그는 1984년 함경북도 함흥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그는 배고픔에 시달렸고 술주정뱅이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렸다. 그 때문에 어려서부터 소학교를 떠나 소매치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이른바 '꽃제비'들을 만나 하루 종일 시간을 때우기 시작했던 것이다.

"북조선 곳곳에서 나처럼 먹을 걸 훔치러 다니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이 수두룩합니다. 노인이나 여자는 우리처럼 날쌔고 빠릿빠릿하질 못해서 길에 누워서 구걸을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도와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92쪽)

그리고 나머지 한 사람, 고신경도 기구한 운명의 여인이었다. 그녀는 1966년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서 스물다섯 살에 '영달'이란 남자와 혼인했다. 혼인할 때까지만 해도 모든 주민들의 부러움을 받았다. 이른바 그 남편은 북한 당국에서 충성된 모범당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0년 초반부터 불어 닥친 경제난이 1996년에는 북한의 지도계층에까지 파고들었고, 그들이 낳아서 기르던 딸마저도 치료할 방법을 얻지 못했다. 그만큼 병원비를 부담할 경제난이 문제였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마저도 남한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고발당해 결국 직장에서 쫓겨나야만 했다.

이러한 운명 속에서 그들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 있겠는가? 아오지 탄광에서 대물림하며 평생을 노예처럼 살 것인가? 거리를 떠돌며 소매치기, 이른바 꽃제비 노릇을 하며 한 평생을 살 것인가? 치료비가 없어서 죽어가는 딸아이를 넋 놓고 보고만 있을 것인가?

결국 그들 세 사람이 선택한 것은 북한 당국의 체제를 벗어나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 밖에 없었다. 그래야만 돈을 벌어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고, 딸아이도 치료할 수 있었고, 어떻게든 자신들과 같은 불행을 대물림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죽음을 무릅쓰고 중국으로 넘어갔다가 이미 몇 번씩이나 중국 공안에 잡혀 북한 감옥으로 이송된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고, 그 감옥 속에서 시체가 되어 나간 사람들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세 사람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이 중국으로 넘어가 죽기 살기로 남한 땅까지 자유를 찾아 올 수 있었던 것도, 모두 두세 번 이상의 그러한 전력들을 겪고 난 뒤였다.

"나는 남한이 제2의 고향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남한 사람들이 우리를 그들과 똑같은 시민으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예성하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남한 사람들은 북한 사람들을 고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우리가 마치 전염병자라도 되는지 지레 겁을 먹는 것입니다. 또 언론에서는 탈북자들이 저지르는 범죄를 너무 과장해서 떠들어대니까 우리 평판만 나빠지고 일자리 찾기는 더욱 힘들어집니다."(132쪽)

이는 러시아 대사관을 통해 남한으로 넘어 온 박복열씨가 증언한 내용이다. 남한 땅에서 자유를 찾아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막상 남쪽에서의 삶이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그만큼 자유 이상의 또 다른 고충이 뒤따르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사업주가 일을 시킬 때 주는 수치심, 인간 이하로 여기는 동물적인 모멸감, 제 3세계 사람들 다음으로 취급하는 대우들….

그러나 그것은 비단 박복열씨 만의 고충은 아닐 것이다. 현재 남한 내에 머물고 있는 김태금씨와 고신경씨를 비롯해 모든 탈북자들의 경우가 이와 다르지 않겠나 싶다. 하여 북한 체제로부터 생사를 넘나들며 도망쳐 나온 탈북자들에게, 남쪽에 사는 우리 모두가 좀더 관대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지 않겠나 생각한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남한 땅에 생사를 넘나들며 찾아 온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일이요, 훗날 통일이 된 이후에도 그들이 품고 있는 좋은 감정으로 인해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데 더욱 더 탄력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아무리 통일이 되었다 해도 진정으로 하나가 되는 데에는 그만큼 더딜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분명 통일은 탈북자들의 고충을 이해하는데서 부터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살기 위하여

엘뤼아르 지음, 오생근 옮김, 민음사(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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