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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군 북일면 갈두마을에 있는 윤구의 묘
해남군 북일면 갈두마을에 있는 윤구의 묘 ⓒ 정윤섭
16세기 사화기에 호남지방에서는 많은 문인학자들이 배출됐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앞서 언급하였던 해남정씨 정호장 집안을 기반으로 하여 성장하였던 인물이었다는 것은 눈여겨볼 만하다. 해남정씨 그리고 이들 문인들의 혈연관계로 인해 금남 최부, 미암 유희춘, 어초은 윤효정, 석천 임억령 등 당대의 문인학자들이 서로 사림의 한 학파를 이룰 정도로 호남사림의 중요한 인맥을 형성하기도 한다.

해남윤씨가는 최부를 중심으로 한 학문적 혈연관계를 맺는다. 금남 최부(1454~1504), 미암 유희춘(1513~1577), 석천 임억령(1496~1568) 등은 어초은 윤효정이 최부로부터 수학하였듯이 서로 학문적 혈연관계를 맺게 되는데 이들은 후에 호남사림의 대표인물이 될 뿐만 아니라 해남의 육현(六賢)으로 추앙받게 된다.

해남윤씨는 학문적으로는 김종직의 문인인 최부를 그 연원으로 삼았기 때문에 자연히 사림파적 성향을 띄었다. 이로 인해 여러 인물들이 16세기 이후 당파로 연결되면서 사화로 인한 심한 부침(浮沈)을 겪게 된다.

해남윤씨가에서 이러한 사림정치의 흐름을 살펴볼 수 있는 인물이 귤정(橘亭) 윤구(尹衢)다. 윤구는 최산두, 유성춘과 함께 호남3걸로 동생인 윤행(行), 윤복(復)도 중종 때 모두 문과에 급제한다. 이처럼 사림정치 시대에 해남윤씨가도 중앙관직에 활발히 진출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윤구는 1513년(중종 8) 생원시에 합격하고, 1516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으며, 다음해 주서에 이어 홍문관의 수찬·지제교(知製敎)·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1519년 기묘사화 때 삭직되었으며 영암에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해남윤씨가는 김종직을 문인으로 하는 사림파의 흐름 속에서, 동서분당(동인·서인) 이후에는 동인의 입장에 서게 되는데 해남윤씨가의 윤의중(尹毅中,1524~1592, 윤구의 아들)과 광주이씨가의 이발(李潑1544~1589)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남북 분당 때 이발 가문과 같이 북인(北人)으로 진출하는 가문과 윤선도 같이 남인(南人)으로 진출하는 두 개의 당파로 나누어진다. 이후 인조반정(仁祖反正)과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등을 거치면서 해남윤씨는 남인계열에 서게 된다. 이후 정계에서 유리되어 주로 재야사족으로 남게 된다.

호남에는 사림이 왜 많을까

귤정 윤구 제각. 묘소옆에 있다
귤정 윤구 제각. 묘소옆에 있다 ⓒ 정윤섭
조선 건국과정에서 역성혁명에 반대한 신흥 사대부들은 관직 참여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지방의 중소 지주로 머물면서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들은 15세기 말 이후 훈·척신의 특권적 비리행위를 비판하며 중앙정계에 진출 사림이라는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다.

사림이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성종이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새로운 관료층을 등용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길재의 손제자인 김종직이 출사한 것을 계기로 다시 김종직의 제자인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등이 그 뒤를 이어 중앙정계에 진출하면서 정치세력을 형성하였다. 이들은 주로 언관직에 임명되어 훈·척신 계열의 비리행위를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파의 비리를 공격하면서 사림파와 훈구파 사이에 정치적 대립이 생겼는데 사화는 사림의 비판에 대한 훈구파의 정치적 보복과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 인해 무오사화, 갑자사화, 기묘사화, 을사사화와 같은 사화가 발생하였으며 귤정 윤구가 연루된 것은 기묘사화였다. 기묘사화는 1519년(중종14)에 일어났는데 조광조의 혁신정치에 불만을 품은 훈구세력이 위훈삭제 사건을 계기로 계략을 써서 중종을 움직여 조광조 일파를 제거하였다.

중종에 의하여 중용된 조광조를 중심으로 사림들은 훈신들의 비리를 계속 비판하는 한편 유교적인 도덕정치의 실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우선 연산군의 폭정과 훈·척신들의 수탈로 피폐해진 향촌을 안정시키기 위해 향약을 보급하고 중앙정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현량과를 실시하여 지방의 사림을 대거 정권에 참여시켰다.

호남의 사림은 낙향한 재지품관과 이주한 사족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김종직과 김굉필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중종반정 이후 중앙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사림은 여러 계보로 이어져 온 것을 볼 수 있는데 윤구는 최부의 계열로 이 계열은 최부→윤효정, 임우리, 유계린→윤구, 윤행, 윤복, 유성호, 유희춘→이중호로 이어진다.

귤정 윤구 시문집인 '귤정유고'(녹우당 소장)
귤정 윤구 시문집인 '귤정유고'(녹우당 소장) ⓒ 정윤섭
최부는 1477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신종호, 김굉필 등과 교유하였다. 그는 무오사화 때 스승인 김종직의 문집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들통나 단천에 유배되었으며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처형되었다. 최부가 언제 김종직의 문인이 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의 처향(妻鄕)인 해남에 거주하면서 사위인 유계린(유희춘의 아버지)을 비롯하여 윤효정, 임우리 등을 가르쳐 김종직의 학문이 정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해남정씨를 통해 기반을 잡고 성장했던 인물들 또한 정치적으로 사화의 참화를 비켜갈 수 없었다. 김종직의 문인인 금남 최부(1454~1504)는 1498년(연산군4)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던 김일손이 쓴 조의제문(弔義祭文)이 문제가 되어 김일손 등 사림파의 거의 전부가 죽거나 귀양가는 무오사화가 일어나는데 이때 조의제문의 삽입을 방조했다는 죄로 단천(端川)에 유배당한다. 이에 그치지 않고 1504년(연산군 10)4월에는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다시 투옥되고 참수되고 만다.

미암 유희춘(1510~1577)의 어머니는 금남 최부의 둘째딸로 해남에서 낳고 결혼한 인물이다. 미암은 최산두와 김안국으로부터 사사 받았는데 김안국은 경기학파로 조광조와 함께 김장생의 문하생이었다. 명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문종왕후가 수렴첨정을 하게 되는데 윤원형 일파가 정권을 잡자 유희춘 등 대간을 파직하고 을사사화를 일으킨다. 이듬해 9월에는 전라도 양재역에서 '양재역 벽서사건'이 일어나자 미암은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당하여 19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게된다.

석천 임억령(1496~1568)은 해남정씨 문명(文明)의 사위가 된 임수(林秀)의 손자로 석천은 사화에 깊이 연루되지는 않았지만 동생 임백령(林百齡)은 호방하고 기백 있는 인물이어서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의 총애를 얻어 을사사화의 주동 인물이 된다. 석천은 동생 백령이 불의의 사화를 주동하고 있음을 알고 거사를 중단하길 원하지만 듣지 않자 형제의절을 선언하고 낙향해 버린다.

귤정유고에 실린 내용
귤정유고에 실린 내용 ⓒ 정윤섭
또한 여흥민씨의 입향조가 되었던 민중건(仲騫)은 계유정란 때 조부 민신(閔伸)을 비롯한 6부자가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했으나 종의 등에 업혀 간신히 진도현감으로 있는 외삼촌댁에 피신하여 있다가 살아남은 인물로 이후 해남정씨에 의탁하여 사위가 된 인물이다.

당시 이러한 사화 속에서 많은 인물들이 피난 내지는 낙향을 하게 되는데 마을의 입향조를 보면 이처럼 사화로 인한 경우가 많음을 알 수 있어 당시의 사회상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이들은 정치적으로 박해를 피해 중앙으로부터 멀리 낙남(落南)해온 가문들로 이들이 호남을 낙남의 대상지로 택한 것은 중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정화(政禍)가 미치지 않으며 기후가 좋고 물산이 풍부하여 은둔의 적지로 판단하였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다.

호남지방의 낙남현상은 연산군 때도 계속되지만 1506년 연산군의 폭정을 무너뜨린 중종반정을 계기로 그 존재가 희미했던 호남지방 사림흥기(士林興起)의 배경이 되었다. 과거를 통해 관로(官路)에 오르기 시작한 사림은 점차 삼사(三司)의 언관직에 등용되어 중앙정계에 활발히 진출하게 된다. 윤구 또한 최산두, 유성중 등과 함께 홍문관을 중심으로 언관직을 차지하고 있었다.

해남정씨 혈족들도 사화에 연루

귤정 윤구의 묘비
귤정 윤구의 묘비 ⓒ 정윤섭
중종 명종 때에 호남 사림들이 중앙진출이 현저하게 나타나는데 해남윤씨 집안 또한 어초은 윤효정이 4형제 가운데 윤구(衢), 윤행(行), 윤복(復) 3형제가 중종 때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이후 윤선도에 이르기까지 등과자가 이어진다. 또한 해남정씨와 관계를 맺었던 유성춘과 유희춘 형제의 선산유씨, 임억령, 임백령 형제를 배출한 선산임씨 등이 중종 명종 때에 중앙에 진출한 가문들이었다.

호남 사림들은 중앙 진출 과정 중에서 많은 좌절을 겪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 중에 '호남가단'이라는 말처럼 시문학과 예술의 꽃이 피어나기도 한다. 사림이 추구한 개혁이 사화라는 파국으로 좌절되면서 현실정치 참여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그로부터 좌절과 퇴각을 수용하고 스스로를 이념적으로 재충전하는 방식으로 전환되었다.

현실 정치는 지고한 도덕적 이상에 의해 철저하게 재정립되어야 하며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타락한 세속을 부인하고 이와 단절된 전원의 세계로 돌아와, 밖에서 펼치지 못한 숭고한 정신을 지켜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이념적 재충전이 풍류정신으로 나타나게 된다. 시간적 여유가 많은 사림파들이 고향에서 열심히 '수기'를 하면서 또 하나의 세계를 개척했다.

그 세계가 말하자면 시문학의 세계이다. 조선조 때 남도의 시문학은 그 형세가 다른 어느 곳보다 융성했다. 한시는 물론이거니와 특히 국문시가에서는 호남가단이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그 세가 컸다. 어초은 윤효정과 윤구가 벼슬길을 포기하고 고향 향리에서 자녀들을 가르치며 '수기'를 하면서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고자 하였던 것도 이러한 사림시대의 사화를 통한 정치적 역경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시가문학의 최고라고 불리는 고산 윤선도의 본향이 해남윤씨 녹우당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윤효정과 윤구로부터 이어지는 사림정치의 흐름을 이어 학문과 지식을 정치적 바람 속에서 시가라는 아름다운 정서로 표출해낸 것이라 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 녹우당 해남윤씨가의 5백년 역사속으로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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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문화를 중심으로 지역의 다양한 소재들을 통해 인문학적 글쓰기를 하고 있다. 특히 해양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16세기 해남윤씨가의 서남해안 간척과 도서개발>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은 바 있으며 연구활동과 글을 쓰고 있다. 저서로 <녹우당> 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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