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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북인
그림은 눈으로 보는 것만은 틀림없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은 보기도 하지만 읽기도 하는 그림을 제작했다. 그 중 한 가지가 바로 탁족도(濯足圖)이다. 탁족도란 말 그대로 시원한 물에 한가롭게 발을 담그는 모습이다.

발을 물에 담그는 모습이야 오늘날엔 흔하게 볼 수 있다. 뜨거운 여름날이나 휴가철이면 냇가나 계곡물을 찾아 마음껏 발을 담글 수 있기 때문이다. 직업이나 신분에 구애받지도 않고 누구나 자유롭게 담글 수 있다.

그런데 그 옛날 선비들이 바지를 걷어 올리고 다리를 꼰 채 발을 담그고 있다면 어떠했을까? 머리가 벗겨지고 아랫배가 나온 중년의 선비가 저고리의 앞섶을 풀어헤친 채 탁족을 즐기고 있다면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것도 유쾌한 얼굴이 아니라면….

그것은 분명코 여름철 더위를 피하기 위함이 아닐 것이다. 피서를 즐기기 위함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나랏일을 위해 제 한 몸 던지고자 애를 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기에 은둔하는 것이리라. 나라꼴 돌아가는 일이 올바르지 못해 끝내 탄식하는 선비의 슬픔인 것이다.

심상대가 쓴 〈탁족도 앞에서〉(북인)란 책은 바로 그런 사연들을 담고 있다. 이는 지난 15년 동안 곳곳에 실은 글들을 다시금 새롭게 묶은 책으로 나랏일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마땅히 정치가 앞서겠지만 그렇다고 경제와 문학, 영화와 스포츠에 대한 이야기도 빠트리지 않는다. 그 모든 초점은 어떻게 하면 이 나라가 바로 세워질 수 있는 지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무섭게 된서리를 퍼붓고 있는 대목은 지식인들을 향해서다.

“어느 놈이 차지하든 곳간이 잠잠해지기만 하면 줄지어 달려 나올 작정으로 눈알을 빈들대고 있는 쥐식인들아. 정치가 무너지면 곳간도 무너지고 사람이 굶으면 쥐도 굶게 된다. 그나마 반쪽으로 갈라진 나라에서 태평스럽게 서식하고 있는 몰염치하고 가증스런 쥐식인들아. 쥐의 생리를 버리고 구멍에서 나오라. 네가 가진 것이 쥐의 생리가 아니라 마땅히 사회에 환원해야 할 지식임을 우렁차게 밝혀 자신이 위상을 공고히 해야 할 때가 지금이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등에서 지식인들이 나서서 해 주어야 할 몫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나서서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데도 그들은 눈치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탁족도가 은유하는 뜻과는 분명 다른 것이다. 그 옛날 선비들은 나랏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은둔하고 자적하는 것으로 그쳤다. 하지만 요즘은 그 처세와 대처 방식이 달라야 함을 고집하는 것이다. 도의와 원칙이 무너진 세상일수록 오히려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선해야 함을 표방한 것이다.

모든 물이 흐리듯 사회 전반이 혼탁할 지라도 지식인 제 한 몸이 생수 한 모금이라면 거기에 목숨을 걸어야 함을 뜻하는 것이리라. 그 때에만 ‘은둔의 지혜’에 만족하는 '쥐식인'이 아니라 ‘행동하는 양심’으로 우뚝 설 수 있는 참된 지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정의감이 먼저인지 도덕성이 먼저인지 그것을 놓고 저울질하는 지식인들도 적지 않다. 심판과 단죄를 통한 역사 바로 세우기인지 아니면 역사 속의 허물을 사랑으로 덮을 것인지 사이에서 갈등하는 지식인들의 고민도 만만치 않다. 그런 상반된 논리들로 인해 종종 잔인하고 사악한 헐뜯기로 상대방을 상처 입히다가 끝내 허망한 결과로 그치는 일들이 적지 않다.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는 것은 논리만 온통 가득 차 있을 뿐 상대를 받아들이는 겸양이 없기 때문이다. 상대방에 대한 비판에는 뛰어나지만 정작 자신의 허물에는 관대하여 침묵으로 일관하는 등 균형 감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제 것과 관련된 일에는 쥐구멍을 찾아 뒤로 쏙 빠지고 남의 일과 먹이감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까지 들이대며 피 튀기는 싸움을 하려고 하지 않던가.

“누군가의 탄식과 같이 ‘시는 죽었다’는 말이 실감난다. 원로는 여유와 달관으로, 중진은 서정과 잠언으로, 신인은 기치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시대’를 노래하고, 그리하여 나는 음산하고 낮선 무릉도원 어귀에 버려진 듯 불안하고 얼떨떨하다. 나아가야 할 길도, 돌아가야 할 집도, 물리쳐야 할 적도 다 잊어버린 혁명군중의 낙오자와 같은 꼴이다.”

실로 그렇다. 시대를 밝혀주는 시 마저도, 그것을 쓰는 시인들마저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시대를 노래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이 사회의 모든 밑바탕이 되어야 할 이 땅의 지식인들도 심상대가 말한 그대로 혁명군중의 낙오자, 쥐식인들로 사는 것 같다. 그 때문에 우리 시대의 지식인들은 그 옛날 탁족도 속의 선비보다도 더 못한 한심한 처지에 처해 있지 않나 싶다.

이러한 때에 이 땅의 지식인들은 그 옛날 탁족도 속의 선비로만 그쳐서는 안 될 것이다. ‘은둔하는 지혜’에 만족하는 것이 결코 이 시대를 일깨우는 시대정신은 아닌 까닭이다. 만약 쥐구멍 속의 지혜로만 만족한다면 또 다시 된서리를 맞을 것이다. 오히려 그 지혜를 ‘행동하는 양심’으로, 세상 밖으로 끌고 가야만 한다. 마치 세상 속의 군중들을 향해 십자가를 지고 나아갔던 나사렛 빈민 출신의 예수처럼.

그 때에만 찬 물에 발을 담그고서 그저 은둔하는 선비가 아니라, 찬 물 속에서 무언가 깊은 생각을 건져 올린 뒤, 이 시대를 일깨우기 위해 세상 속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의연한 선비의 본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탁족도 속에서 읽은 선비정신이요, 이 시대의 시대정신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탁족도 앞에서

심상대 지음, 북인(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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