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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화가 이윤엽씨의 대추리 작업실. 이곳에서 최근 한달 동안 현장판화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목판화가 이윤엽씨의 대추리 작업실. 이곳에서 최근 한달 동안 현장판화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 문만식
미군기지 확장 예정터 한복판인 평택 대추리에 체류하면서 지난달부터 꾸준히 판화를 만들고 있는 미술가가 있어 주목받고 있다. 전쟁터 아닌 전쟁터가 돼 고통받고 있는 대추리를 소재로 현장 판화를 만드는 일이어서 그의 작업은 더욱 관심을 끈다.

그가 처음 대추리와 인연을 맺은 계기는 대추초등학교 건물에 주민들 얼굴을 그린 일. 지난 2월 5일과 5월 4일 꼭 석달 사이에 대추리를 방문한 적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학교건물을 환하게 채색하고 있는 인물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이 <대추리 사람들>을 연출하고 그림에도 참여한 작가가 바로 목판화가 이윤엽(38)씨다.

그가 대추리에서 판화작업을 시작한 지는 한 달이 넘었지만 처음부터 작업을 염두에 두고 대추리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그가 화성 동탄면 목리에 있는 작업실을 제쳐두고 대추리에 작업실을 차린 까닭은 어떤 '불안' 때문이었다. 반드시 대상을 눈앞에 두고 작업해야 하는 게 아닌데도 대추리를 떠나 있는 데서 오는 불안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다. 대추리에서 벌어지는 비정상적인 사태들에 대한 낯설고 혼란한 감정이 그의 불안에 가세했을 것이다. 그런 불안은 5월 4~5일 강제집행 이후까지 이어졌다.

<공권력과 맞장 뜨는 사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작품 중에서 동료 예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공권력과 맞장 뜨는 사람>.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자신의 작품 중에서 동료 예술가들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 가운데 하나다. ⓒ 이윤엽
"5월 4~5일 이전부터 강제집행 지나고 나서까지 되게 불안했어요. 대추리에서 언젠가 누가 나더러 낙관주의자라고 한 적이 있어요. 그런 내가 그럴 줄 몰랐거든요. 학교도 내 눈 앞에서 부서졌어요. 사람들이 학교 벽화 부서진 걸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올 때도 아무 생각이 없었어요. 그런데 날이 갈수록 충격으로 와닿고 슬픔이 커져갔어요."

그는 붓을 들지 못했고 문밖을 나서지도 않았다. 주민들을 만나고 얼굴을 보면 슬퍼지고 위축이 됐기 때문이다. 자신이 죄인처럼 여겨지고 당당하지도 용감하지도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닥쳐오기 시작한 그와 같은 '증상'들은 사실 대추리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이렇게 말한다.

"나는 대추리 사람들이 어느 정도씩은 다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기간이 길진 않았지만 나 자신이 그걸 느꼈는데 여기 사람들은 훨씬 심각하겠죠. 이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 감정이 굉장히 건조해지는 거죠. 감정이 다양하고 풍부해야 되는데 점점 단순해지고 짧은 시간에 표정이나 말투가 극과 극을 오가요. 가끔 주말에 위로행사도 하지만 그보다는 주민들을 치유하는 일이 급하다고 생각해요."

치유의 문제를 언급하는 그의 태도는 진지했다. 그 자신이 불안, 위축, 슬픔 같은 수동적인 정서들을 딛고 치유를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를 치유한 건 목판작업이었다. 목판을 시작하면서 그는 스스로 "내가 치유되는구나"하고 느끼기 시작했다.

<씨 뿌리는 사람>. 작가가 천착하고 싶은 것은 진솔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 땅을 매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다.
<씨 뿌리는 사람>. 작가가 천착하고 싶은 것은 진솔하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 땅을 매개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리는 것이다. ⓒ 이윤엽
목판작업...정신적 치유의 시작

목판작업을 시작한 뒤로 그를 작업실 밖에서 보기가 힘들 정도로 그는 창작에 몰입하고 있다. 많은 소재들이 순간순간 떠오른다. 하지만 5월 중순께 처음으로 작업을 시작할 때는 이미 보아둔 일들을 연습장에 조금씩 에스키스(회화에서 작품구상을 정리하기 위해 그리는 밑그림)를 하거나 그림일기를 쓰기도 했다. 그때 만든 작품이 <황조롱이 숲> <대추리 사람들> <미군기지 확장반대> 같은 것들이다.

<황조롱이 숲>은 5월 5일 밤을 묘사한 작품이다. 작가는 그날 밤을 이렇게 체험했다.

"그날 밤 마을회관 앞을 지나가는데 동네에 개미 새끼 한 마리 없고 사복경찰들이 돌아다니고 살벌했어요. 그때 동네 형님을 만났는데 나더러 주민 집에 숨어있으라고 했어요. 그러면서 누구누구가 안 보인다고 찾아다녀요. 그 전에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죠. 지금 전쟁도 아니고 계엄도 아니고 잘못한 것도 아닌데, 대추리에 들어와 있다는 자체가 잘못한 것이 아닌데 숨어있어야 되고."

판화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전경들이 무장한 채 나무숲 앞의 길 한가운데로 떼를 지어 가는 모습이 그려졌다. 전경들의 동작에 "처벅 처벅 처벅"하는 군홧발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어이가 없는 상황, 눈에 띄어 잡히면 연행되는 심각한 상황,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심각할 이유가 없는 상황, 어이없는 상황. 그것은 그의 작가적 상상력 혹은 환상 안에 존재하지 않던 상황이었다. 그는 그 상황이 가한 충격으로 위축되었다가 마침내 판화를 통해 이상한 상황을 이상한 상황 자체로 받아들임으로써, 그렇게 말할 수 있게 됨으로써 치유를 경험했을 것이다.

<황조롱이 숲>. 5월 5일 밤 대추리 마을회관 앞 풍경. 작가는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열흘 뒤 목판에 담았다.
<황조롱이 숲>. 5월 5일 밤 대추리 마을회관 앞 풍경. 작가는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를 열흘 뒤 목판에 담았다. ⓒ 이윤엽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대추리 부녀회장님> <공권력과 맞장 뜨는 사람> <비오는 날> <오리를 잡고 오는 민의 형님> 같은 "위트 있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한 자신을 그는 이렇게 바라본다.

"많이 나아졌어요. 급해지지 않고. 일하려고 바득바득하지 않고. 대추리 사람들을 위해 뭘 할까 이런 강박도 사라지고. 물론 완전히 편안하진 않죠. 어쨌든 나는 내가 행복해지려고 목판을 하고 있어요. 요즘엔 재미있게 그리고 싶고 행복한 대추리를 그리고 싶어요."

행복한 대추리를 그리는 것이 소원

작가 스스로 "좀 웃기다 싶어요" 라고 말하는 작품이 있다. <낮잠>이 제목인 이 판화는 지난 6월 7일 광화문 문화제에 내놨을 때 가장 많이 팔린 작품이기도 하다. 많이 팔린다는 건 작가의 말에 따르면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거나 스트레스를 주는' 작품이 아니라는 의미. 그렇다면 구매자들은 작품의 소스가 된 사정을 알고 나서 환불이나 교환을 요구하게 될지도 모른다.

"평화예술공원에서 은행나무를 깎아서 의자를 만들고 있었는데 한 주민이 다가오시기에 몇 마디 주고받았어요. 그런데 되게 피곤해보이세요. 같이 산소 있는 쪽으로 올라갔는데 그분이 탁 쓰러지는 거예요. 내가 잠깐 딴 데 보는 사이에 이번엔 코를 골아요. '야 금방 잠드시네' 하는데 또 금방 깨더라고. 멋쩍으니까 하시는 말씀이, 밤에 불안하고 성질나고 열 받아서 잠도 안 오고 먹어도 먹은 것 같지도 않고 철조망이 쳐져서 일할 것도 없고 굉장히 피곤하대. '어디 일당직이라도 나가야 되는데'하면서 한숨을 쉬세요."

알고 보면 '스트레스를 주는', 곧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작품인 셈이다.

<낮잠>. 평온하고 한가로와 보이는 이 풍경의 이면에는 대추리 주민들의 서글픈 현실이 담겨 있다.
<낮잠>. 평온하고 한가로와 보이는 이 풍경의 이면에는 대추리 주민들의 서글픈 현실이 담겨 있다. ⓒ 이윤엽
'소스를 제공'했다는 그 주민은 최근 '영농투쟁'에 전념하느라 탄탄한 바깥 직장도 그만둔 상태였다. 그 주민은 작가에게 "군인들이 들판에서 축구하는 건 왜 안 그리느냐"고 주문하기도 했다. 자신이 씨 뿌려 자라고 있는 벼 위에서 군인들이 축구하는 모습을 그저 "저 사람들도 휴식하는구나"하고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윤엽씨는 <씨 뿌리는 사람>도 그렸다. 이 작품에는 땅을 일구며 진솔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랑이 담겨 있다.

"사람이 가장 진솔하고 올바르게 사는 법이라 할 때 남에게 피해 안 끼치고 자기가 행복하게 먹고 사는 것이 기본이잖아요. 대표적인 것에 땅이 들어가요. 땅에서 나오는 것은 다른 사람 노동을 착취하거나 사기를 치지 않잖아요. 땅을 매개로 사는 사람은 가장 솔직하고 진솔하게 살 수 있는 것 아니에요? '대추리' 그러면 통상적으로 미국, 철조망, 괴로워하는 농민들 이 정도잖아요. 대추리에서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은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사람이 진솔하게 사는 것, 그리고 그렇게 사는 데서 오는 행복이에요. 그런 것에 천착하고 싶어요."

땅은 착취하거나 사기치지 않는 존재

수많은 날 동안 많은 사람들에게 밥을 해서 먹이고 있는 여성 주민들에 대한 존경심도 그의 작품에는 담겨 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밥 해먹이는 게 그에게도 "굉장히 위대한 일"로 비친다. "미국이나 그 무엇보다도" 위대하다고 그는 생각한다. 미 군용기 위에 밥솥단지를 이고 서 있는 부녀회장은 위대한 대추리 여성들을 상징한다.

<대추리 부녀회장님>. 미국이나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한 것. 수많은 사람들에게 3년 동안 밥을 해 먹이고 있는 대추리 여성 주민들. 기자가 아는 한에서는 대추리 여성을 다룬 첫 예술작품이다.
<대추리 부녀회장님>. 미국이나 그 어떤 것보다도 위대한 것. 수많은 사람들에게 3년 동안 밥을 해 먹이고 있는 대추리 여성 주민들. 기자가 아는 한에서는 대추리 여성을 다룬 첫 예술작품이다. ⓒ 이윤엽
이윤엽씨는 주변으로부터 "꼼꼼한 노력형 인물"로 평가받는다. 하지만 그러한 인물평은 예술가에 대한 평가로서는 적절하지 않아 보인다. 그는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가 보고 싶은" 작가다. 비록 그렇게 안 되더라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한 시기를 그는 대추리에서 갖고 싶어 한다. "사람들 마음속에 예술이 들어갈 수 있다는 희망"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작품을 통해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은 그의 마음은 대추리 바깥쪽으로도 향해 있다. 단지 대추리의 현실과 진실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예술에 대해서도 더 많은 사람들과 뭔가 나누고 싶다. 작가로서 이른바 사회적 지위를 추구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과 작품으로 만나고 싶은 게 그의 소망이다.

대추리 작업실에서 목판에 붓칠 하는 이윤엽씨. 그의 희망은 예술이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다.
대추리 작업실에서 목판에 붓칠 하는 이윤엽씨. 그의 희망은 예술이 사람들 마음속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확인하는 것, 적어도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다. ⓒ 이윤엽

덧붙이는 글 | 그의 인터넷 블로그(blog.naver.com/pparu1)에서 '대추리에서' 연작 30여 점(현재) 전작품을 볼 수 있다. 작품 구입도 가능하다. 가격은 한 점당 1만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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