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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오디 고명 콩국수
시원한 오디 고명 콩국수 ⓒ 김관숙
“이 봐요~.”

할아버지 한 분이 잔디밭 저만큼에 있는 작은 나무 밑에서 지나가는 우리를 부릅니다. 나는 남편과 같이 새벽 걷기운동을 하러 한강 둔치에 나온 길입니다. 남편이 먼저 노인에게로 몸을 돌렸습니다. 할아버지는 뭔가를 부지런히 줍고 있는 중이었는데 한 손에 들려 있는 검은 비닐봉지가 묵직해 보입니다. 가까이 가서야 나는 그 나무가 뽕나무이고 할아버지가 오디를 줍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번 흔들어 줘요, 난 당최 기운이 없어설랑~.”

별로 크지도 않은 나무입니다. 손을 뻗으면 오디들이 줄줄이 달린 가지들을 얼마든지 잡을 수가 있습니다.

“야아, 까맣게 익었네."

나는 머리 위에 가지 하나를 잡고는 까맣게 익은 오디 하나를 따서 입에 넣습니다. 달큰합니다. 그새 오디 철이 온 줄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오디 철이 왔는 줄도 몰랐습니다
오디 철이 왔는 줄도 몰랐습니다 ⓒ 김관숙

손을 뻗으면 오디들이 줄줄이 달린 가지가 잡힙니다
손을 뻗으면 오디들이 줄줄이 달린 가지가 잡힙니다 ⓒ 김관숙
“그렇게 가지를 잡아당기면 부러진다구. 부러지면 쓰나. 뽕나무는 보약 나무라구, 하늘이 내린 보약나무!”

나는 얼른 잡았던 가지를 놓았습니다. 그때입니다. 야구모자에 청바지를 입은 건장한 청년이 다가 왔습니다. 할아버지에게 반듯하게 인사말을 합니다.

“또 나오셨군요.”
“오라, 어제 그 얼굴이구먼.”

할아버지가 아주 반색을 합니다. 그러면서 나무 밑에서 나와 거리를 두고 뒤로 물러섭니다. 우리는 거들떠도 안 봅니다. 청바지 청년이 두터운 운동화 발로 별로 굵지도 않은 뽕나무 기둥을 '뻥뻥' 서너 번인가를 찼습니다. 뽕나무는 기둥이 휘청 휘청거릴 적마다 잔뜩 품고 있던 까맣게 익은 오디들을 와르르 와르르 쏟아냅니다. 꼭 우박이 쏟아지는 것만 같습니다.

요즘 발차기 수모를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요즘 발차기 수모를 당하고 있는 중입니다 ⓒ 김관숙
청바지 청년이 발차기를 끝내자 할아버지는 다시 나무 밑으로 들어가 머리를 숙이고 풀밭에 깔린 오디를 줍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청바지 청년이 그런 할아버지를 보고 빙그레 웃다가 물었습니다.

“어제도 많이 주웠잖아요. 근데 뭐 하실려구요? 오디술 담그시려구요?”
“할망구가 눈이 안 좋아. 이게 오장에도 좋고 특히나 눈을 밝게 한다구. 이걸 많이 오래 먹으면 눈이 좋아지지. 그래서 냉동실에 여축해 둔다구.”

“병원엘 가셔야죠.”
“갔지, 노환인 걸 어쩌나. 그나저나 고맙네, 어제두 그랬구.”

“익은 건 다 떨어지고 이젠 퍼런 것만 보이는데요. 어제 저 나무처럼 말예요.”
“그럼 이삼 일 쉬어야지.”

남편과 나는 걸음을 놓습니다. 뭔가 모르게 기분이 어정쩡합니다.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분간이 안 됩니다. 아무리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할아버지를 위해서라지만 청바지 청년이 아무 거리낌이 없이 대뜸 크지도 않은 나무를 뻥뻥 차는 모습도 마음에 걸리고 노환으로 시력이 좋지 않은 부인을 위해 새벽에 굼뜬 몸으로 오디를 주우러 나온 고령이신 할아버지 모습도 마음에 걸립니다.

“배고팠던 시절에 많이 먹었던 건데. 이맘 때 산에 가면 오디 산딸기 찔레순 칡뿌리, 뭐 그런 것들이 지천이었다고.”

남편은 어린 날을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나는 남편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뒤를 돌아다보았습니다. 청바지 청년이 풀밭을 나가고 있습니다. 기세로 보아 걷기운동을 하러 나온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부지런히 오디를 줍고 있고 엄청난 수모를 당한 그 뽕나무는 그림같이 서 있습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파리들이 몇 떨어진 것쯤이야 감수하고 살아야지 어쩌겠냐는 듯이 그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남편이 내 속을 헤아렸나 봅니다.

“그 청년, 조금 지나쳤어.”
“조금이 뭐야 아주 많이 지나쳤지. 근데 그 청년이 안 나타났으면 어쩔 뻔했어?”

“뭐, 내가 뽕나무한테 단단히 찍혔겠지. 하지만 난 그 청년처럼 그렇게 확실하게는 못했을 거야.”
“그럴 때 좋게 거절하는 방법 없나 몰라.”

남편은 아무 말도 안 합니다. 우리네 정서로는 거절할 수 없잖아 하는 눈빛입니다. 잔디밭에는 여러 그루의 뽕나무들이 드문드문 서 있습니다. 할아버지가 이삼 일 쉬어야지 하고 말한 것을 보면 할아버지는 그간 새벽마다 잔디밭에 드문드문 있는 뽕나무들을 순례를 한 모양입니다.

뽕나무와 비둘기들
뽕나무와 비둘기들 ⓒ 김관숙
목적지까지 갔다가는 돌아오는 길에 보니까 그 뽕나무 밑이 텅 비었습니다. 깨끗하게 씻어 건진 오디를 할머니와 같이 먹기도 하고 또 냉동실에 저장해 두는 구부정한 할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지나쳐 가는 데 길섶에 떨어진 까맣게 익은 오디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바로 아까 그 뽕나무에서 이만치 떨어진, 그러니까 그 뽕나무의 둘레가 됩니다. 발차기를 당한 뽕나무가 깊이 휘청하다가 바로 설 때 튕겨 나왔나 봅니다. 그런데 하나 둘이 아닙니다.

한 웅큼이 넘자 나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서 안에 질경이 이파리들을 뜯어 촘촘하게 깔고는 거기에 담았습니다. 이내 가득 찼습니다. 할아버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여기까지 살펴보지 않으셨을까. 이만큼이나 더 가져가실 수가 있었는데.

이만큼이나 더 가져가실 수가 있었는데
이만큼이나 더 가져가실 수가 있었는데 ⓒ 김관숙
달큰한 오디 냄새가 할아버지 모습에서 풍겨나는 냄새만 같고 손가락에 든 검붉은 오디 물이 할머니를 생각하는 할아버지의 아픈 심정만 같습니다. 오디 철도 얼마 안 남았는데 오디 철이 지나가고 나면 그래서 냉동실에 저장해 둔 오디들마저 다 떨어지고 나면 할아버지는 무엇으로 또 할머니의 눈 보신을 해 드릴까요.

나는 문득 남편에게 물어 봅니다.

“근데 뽕나무를 왜 하늘이 내린 보약나무라고 할까?”
“뽕나무는 이파리부터 뿌리까지 하나도 안 버리니까.”

“자기 말씀야 동의보감 말씀야?”
“그 옛날 우리 할머니 말씀!”

우리는 마주보고 웃었습니다. 남편이 퍼지기 시작하는 햇살을 보며 오늘은 날씨가 무덥겠다고 저녁에는 얼음 띄운 콩국수를 해 먹자고, 하늘이 내린 보약나무의 열매로 고명을 하면 맛도 모양도 훌륭할 거라고 하면서 앞장을 섭니다. 하긴 오디를 토마토나 오이채 대신 얹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름 모를 할아버지 덕분에 오늘은 나도 하늘이 내린 보약나무 열매로 보신을 하게 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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