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환장 할 향기'가 나는 꽃병 입니다.
'환장 할 향기'가 나는 꽃병 입니다. ⓒ 양지혜
어제(6일)는 하루 종일 화분과 도자기를 정리했다. 이삿짐 가운데 가장 큰 몫을 차지하는 게 바로 이 두 가지. 그러다 발견한 아주 생뚱맞은 도자기 꽃병 한 점. 일명 '환장할 향기'란 별명을 시어머님이 직접 지어주신 우리집 가보 중 으뜸인 물건이다. 그러기에 다른 무엇보다 소중하고 깨끗이 닦아 상자에 넣으며 대신 지나간 시간 속 꽃병에 담긴 '환장할 향기'를 끄집어냈다. 순간 이삿짐 싸기의 고단함이 저만치 달아나며 빙그레 웃음이 솟았다.

얼마간 우리집을 방문하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집 분위기와 영 딴판인 커다랗고 새빨간 꽃에 놀라고, 꽃에 얽힌 사연에 배꼽 잡고 웃는 탓에 남편과 종종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꽂혀 있던 꽃은 세월에 유명을 달리 했지만 내가 간직한 감동은 꽃병과 같이 남았다. 결혼 전후를 통해 처음으로 남편에게 받은 꽃다발(?). 누구도 그런 특별한 꽃다발을 받을 일이 없기에 은근히 자랑감이기도 했던, 그래서 많은 이들에게 긴 시간 회자됐던 유명한(?) 꽃다발에 얽힌 이야기.

멋과 분위기, 그리고 감각이란 것은 애당초 담 쌓은 듯 산 남편이 서른 살 내 생일날 느닷없이 내민 꽃다발. 마침 집에 놀러 와 있던 남편 후배들과 시어머님, 나는 감동과 놀라움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비록 신문지에 둘둘 쌓여 있기는 했지만 크기가 어림잡아 2자 정도가 가까운 꽃다발이었으니... 평생 꽃 한 송이를 못 사준 한을 풀려고 어느 꽃집을 통째로 옮겨 왔나 놀랐고, 무슨 꽃인지 기대와 궁금함에 남편이 내민 신문지 뭉치를 얼른 받았다. 물론 입을 귀에 걸은 채.

'마음'으로 맡아야 할 향기를 가진 꽃. 아세요?
'마음'으로 맡아야 할 향기를 가진 꽃. 아세요? ⓒ 양지혜
시어머니와 후배들도 평소와 다른 남편의 모습에 눈을 크게 뜬 채 연신 빨리 풀어 보라고 재촉했다. 더구나 꽃다발을 사 온 남편도 양복도 갈아입지 않고 내가 꽃다발 포장 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러 겹의 신문지로 여물게도 싼 포장을 조심조심 열어갔다. 그런데 포장을 벗길수록 불안함이 엄습했다. '이게 아니야'라는 불길한 징조. 딱딱한 느낌 속에 느껴지는 날카로움. 그리고 마지막 신문지를 여는 찰라 아뿔싸. 왜 이렇게 불길한 예감은 적중률이 높은 것일까. 나의 외마디 비명. "헉! 뭐야!"

펼쳐진 신문지 사이로 드러난 꽃다발. 꽃다발을 내려다보던 새까만 눈동자 모두는 한동안 침묵과 함께 시간이 멈춘 듯 그 어떤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때 침묵을 깬 것은 시어머니셨다. "환장하겠네. 아이구 이 사람아!" 그러나 남편은 그때까지도 상황파악이 안 되는지 오히려 내게 물었다. "이쁘지? 여보, 이 꽃 저어기 현관 입구에 올려놓자. 사람들 오갈 때 보도록!"

난 저만치 달아났던 정신을 다시 끌고 오느라 한참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여보, 그런데 이거 정말 내 생일 꽃이에요?" 남편은 자신이 더 감동스럽다는 눈빛으로 되레 내게 물었다. "그럼 내 평생 꽃이라고 처음 사 보는데. 꽃 선물 할 사람이 당신 말고 또 누구에게 하겠어? 왜?"

황당한 상황을 눈치 챈 시어머님의 손짓으로 후배들이 슬금슬금 손님방과 서재로 자리를 피했다. 들어가면서 킥킥거리는 웃음과 일면 벌어질 상황에 걱정스러워했다. 그러나 무심한 남편은 여전히 집에 들어선 그 차림 그대로 나더러 꽃다발을 안아 보란다. 남편의 말소리가 들릴 때마다 내 눈 꼬리는 점점 치켜 올라갔고, 끓어오르는 부아를 내리느라 '참자 참자... 참자!'를 수 없이 되뇌며 남편에게 다시 물었다. "여보, 이 꽃 왜 샀어요? 그리고 꽃집 사람도 웃기다. 마누라 생일 꽃으로 이걸 팔다니!"

수 없이 많은 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사랑 향기'를 가진 꽃이 아닐까요?
수 없이 많은 꽃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은 '사랑 향기'를 가진 꽃이 아닐까요? ⓒ 양지혜
향기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향기는 어디서나 존재 하겠지요.
향기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향기는 어디서나 존재 하겠지요. ⓒ 양지혜
그제야 남편은 나와 주변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눈치 챘는지 오히려 황당한 표정으로 말없이 눈만 굴렸다. "아니, 세상에 멀쩡하게 살아 있는 마누라 생일 날 조화가 뭐예요? 그리고 이건 집에다 놓는 크기도 아닌데... 당신 정말 이거 산 거예요?" 속사포 쏘듯 쏘아대는 내 말이 그칠 기미가 없자 참고 있던 남편이 벌컥 화를 냈다. "당신, 사람을 어떻게 보고 그래? 내가 주워서 당신 생일선물 할까 봐? 꽃은 금방 시들기에 아까워서 오래 두고 보라고 샀다. 왜? 경제적으로도 좋고!" 그리곤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휘리릭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경제적이라니... 아니 결혼 후 처음으로 마누라 생일 꽃다발 사면서 경제적이라니...' 야속함과 황당함을 견디느라 입 다물고 큰 숨 쉬는 수밖에 없었다. 상황정리(?)가 끝난 것을 알고 한 둘씩 나온 후배들은 부글거리는 내 마음은 아랑곳 안 하고 숨넘어갈 듯 깔깔거리며 웃어제꼈다. "형수님은 좋겠습니다. 이렇게 커다란 꽃다발을 받으셨으니!" "형님 아니면 이런 꽃다발 생각도 못하죠. 하여튼 축하 드려요~!" "내 아들이지만 참 용타. 어찌 저리 눈치가 없는지..." 시어머니의 민망함까지 보태졌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를 풀어가던 후배 중 한 명이 화병까지 달린 꽃다발을 들고 남편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더니 남편을 데리고 나왔다. 남편 가슴엔 기다란 도자기 화병에 어른 손바닥만한 자줏빛 꽃이 늠름하게 안겨 있었다. 짓궂은 후배 녀석이 손마이크로 "자 지금부터 형님께서 형수님의 서른살 생일축하 꽃다발 증정식을 하겠습니다! 모두 축하의 마음으로 박수!" 남편이 자랑스레 안겨준 도자기 화분에 담긴 꽃다발(?)을 받아들고 기념사진을 찍으며 그제야 나 또한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세상에 이런 꽃다발을 나 말고 또 누가 받을 수 있을까?

식사를 하며 후배들이 남편에게 왜 조화를 사왔는지 연유를 물었다. 남편 왈 "얘들아, 무슨 꽃값이 왜 그렇게 비싸냐? 너무 비싸서 꽃다발 하나 하려면 만원은 줘야겠기에, 그럼 얼마나 가냐고 물어 보니까 일주일 정도 간다고 하더라고. 더 오래 가는 게 없냐고 했더니 저걸 알려 주기에 샀지. 금방 시드는 것보다 경제적이고 여러 사람이 오래 보고 더 좋잖아. 안 그러냐?" 천연덕스런 남편의 말에 후배들은 또 까무러칠 듯 웃었고, 시어머니조차 아들의 황당함에 대꾸 없이 혀만 차셨다. 그러나 그냥 넘어 갈 수는 없다는 생각과 경제적 운운에 대한 발언에 약이 올랐다.

사랑으로 꽃 피우고 마음으로 향기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 행복이죠.
사랑으로 꽃 피우고 마음으로 향기를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 일. 행복이죠. ⓒ 양지혜
영원히 지지 않는 꽃처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향기로운 사람들. 가족 입니다.
영원히 지지 않는 꽃처럼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향기로운 사람들. 가족 입니다. ⓒ 양지혜
"그래요. 좋은데요. 오래 가고 시들지 않아서. 그런데 향기가 없잖아요. 향기 없는 꽃이 꽃인가요. 머?"

나름, 남편의 궁색해 하는 변명을 예상하며 기어코 향기 나는 꽃다발을 받아 보겠다는 심사로 정곡을 찔렀다며 쾌재를 부르려던 난 실망과 함께 15년간을 그 요상한 꽃다발을 지켜야 할 책임을 떠안았다. "여보, 당신 그거 모르나? 향기는 마음으로 맡으면 되는 거야.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 향기롭지 않아? 난 향기가 너무 지독해서 문젠데." 그리고 재차 이어진 남편의 멋진 멘트 "얘들아, 난 이렇게 변치 않는 꽃을 형수한테 줬으니 금방 시들지만 향기가 풀풀 나는 것은 너희들이 형수한테 이 집에 올 때마다 사 와라. 여보, 그럼 됐지?"

으이구... 경제적 가치만 따지는 사람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문학적인 면도 있다니. 한동안 할 말을 잃고 가만히 있는 내 대신 참다 못한 시어머님이 한 말씀 하셨다. "그래, 환장하게 향기가 펄펄 난다. 에미야 너 좋기도 하겠다. 내 아들이지만 물건은 물건이다." 그 뒤부터 시어머니는 우리집에 오실 때마다 정신 사납다며 빨갛고 커다란 장미꽃다발을 어서 치우라고 종용했었다.

하지만 그날 이후 그 꽃다발은 남편의 뜻대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는 현관 입구를 차지하는 영광을 10년간 누리게 되었고, 오가는 사람들이 유난스러운 꽃에 대해 물을 때마다 나는 열심히 대답 했었다. "향기 좋지요? 향기가 없다고요? 향기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대요. 에이~ 그러면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거네요. 하하."

그리고 잦은 이사 때마다 항상 남편은 그 꽃다발을 챙겼다. 아마 남편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샀던 꽃다발이었고, 남편에게는 그만큼 소중했던 마음을 담았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그 엄청난 장미꽃다발 사건 이후엔 절대로 남편에게 꽃 선물 운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절대 하지 않을 생각이다. 15년간의 향기가 아니라 영원할 향기를 이미 가졌기에.

덧붙이는 글 | 지금으로부터 16년 전 조화의 모습은 참으로 조악했습니다. 그리고 그 시절은 우리 모두가 넉넉지 못했지요. 돈 만원이면 큰돈이었기에... 남편의 알뜰함이 배어 있는 선물이지요. 언젠가는 그 꽃병에 조화가 아닌 행복의 향기가 솔솔 흩날리는 정말 아름다운 꽃이 가득 꽂혀질 것이란 소망으로 앞으로도 잘 간직할 것입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